[Review] 낡지 않고 늙어가기 - 서른다섯, 늙는 기분

글 입력 2022.06.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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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대학생들이 그렇게 어른 같아 보일 수 없었다. 지금이 좋을 때다, 하는 어른들 말을 들어도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자유가 생길 것이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자유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몰랐다. 이제는 마음대로 술을 마시고, 학생일 때는 꿈도 못 꿨을 몇만 원짜리 옷을 일시불로 살 수 있다. 하지만 돈 벌기를 멈추는 순간 이 자유는 사라지고 만다. 우습게도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소호 작가가 시와 산문을 쓰며 돈을 버는 일의 면면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한테 용돈도 드리고, 서울에 전셋집이라도 한 채 마련하고 싶다. 노후 자금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언젠가 합법화될 안락사를 소망하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이나 마련해두고 싶다. 그러면서도, 메마르고 무뎌져 버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도 나로 남아있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나다움을 잊지 않으려면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소호의 글은 이런 내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 진로 수업이 있었다. 늘 꼿꼿한 자세와 인자한 웃음을 장착한 진로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빌리 엘리어트’같은 영화를 틀어주며 우리에게 꿈이 뭔지 묻곤 했다. 보통 고등학생들에게 진로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어떤 대학에 가고 싶냐는 말과 같았는데도, 선생님은 대학이나 직업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발레를 하고 싶어 했던 어린 남자애 얘기보다는 점심 메뉴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그 시간은 낮잠 시간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선생님은 화 한 번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껄껄 웃으며 자면서 꾸는 꿈도 꿈이라고 하셨다. 보기보다 연세가 많으셨던 진로 선생님은 내가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명예퇴직하셨다.


당시의 나에게 진로 수업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직장이 생기고, 애인이 생기고, 집이 생기는 줄 알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어린애였고, 마음껏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시간과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시간과 힘은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할 것이고, 그럼에도 삶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원래 없었다가 생겨난 것보다 있었다가 사라진 것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그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이십 대 중반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사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이 내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 괜히 유명해진 게 아니다.


 
“늙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낡고 싶지 않다. 자연스럽게, 멋지게 늙고 싶다. 그것이 나는 낡지 않고 늙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하게나마 필연적인 노화를 깨달았고, 그래서 내가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우리도 이제 이십 대 중반이네, 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다. 맞다. 돈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나도 이제 12월 26일의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물론 결혼을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보다는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나이 듦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혼을 외치고 다녔던 나마저도 ‘이십 대 중반’이라는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생각났다. 이제는 ‘빻은 말’ 취급받아도, 여전히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 그리고 결혼 적령기를 넘기도록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꺾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결혼정보회사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구구절절 화가 나지 않는 부분이 없어서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얕고 가벼운 것이 우리 사회의 결혼이었구나. 인간 생애에 대한 고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 사람의 가치가 오로지 외모와 젊음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기형적인 관계. 작가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자기 몸을 예전처럼 유지하기 위해 했다던 그 많은 일들을 보면서도 조금 화가 났다. 기능성 화장품과 피부과 시술은 분명 관절과 근육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 모든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았던 것만큼이나 전혀 의미 없는 일인 것을 모두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되뇌어도 이 쫓기는 듯한 기분은 멋대로 머릿속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중년 여성 배우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역할은 엄마뿐이라고. 미디어는 젊음이 사라져가는 여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자랐으니 나이 듦이 무서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스물다섯이 넘어도, 서른다섯이 넘어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어딘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 찬란한 시절은 짧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지나가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낡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쉰 살이 되어도 닥터마틴을 신고 밴드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는 사람이고 싶다. 집에서 칵테일을 말아 먹고, 친구들과 ‘아줌마들 우정은 디질 때까지’를 외치며 건배도 하고 싶다. 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미래란 그렇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갑자기 진로 선생님 생각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난히 올곧은 허리와, 서글서글한 표정과 그럼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그 눈빛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무슨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을까. 선생님 재미없어요, 같은 말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래도 네 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마음은 뭘까. 선생님은 이미 세상이 지독하게 물질적이고, 빌리 엘리어트가 되기는 무지막지하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기대와 시선에 나 자신을 맞춰가다 보면 결국에는 낡아버리고 만다.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걸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 꿈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삶에는 요령이 생기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뭐든지 하면 는다는데, 삶에는 왜 그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지.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새로운 나는, 매일매일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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