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날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 피아니스트 조재혁 리사이틀

피아니스트 조재혁의 리사이틀, 쇼팽
글 입력 2022.06.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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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안 변해’. 생각만 한 건 아니고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어떠한 상황이었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동안 이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사람은 다 변한다고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있다.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왠지 그의 말이 애정이 담긴 말로 들렸다. 앞서 말했듯 대개 타인에게 실망했거나 관계에 대한 변화의 희망이 절망했을 때 기대를 끄기 위한 성급한 결론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을 써왔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변한다는 그의 말이, 사람은 변하기 때문에 조금 더 믿어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요즘의 또다른 생각. 정지된 건 없다는 사실, 모든 건 매일 달라지고 매순간이 전에 없었던 새로운 순간들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라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을 보낸지 꽤 됐다. 그동안의 시국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집 근처를 크게 벗어나는 일도 드물게 됐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엔 변화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서 정체에 대한 불안에 자주 파묻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머리카락과 손톱의 자라남을 자주 관찰하고 자주 생각한다. 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기는 ‘취준’이라는 단어로 일상을 뭉뚱그린 무성의한 감각의 근육을 풀어주고 말랑한 상태로 되돌려주었다. 가령 일기에 이렇게 적을 때가 있다. ‘요즘은 다시 안정기를 찾았다.’ 그런데 불과 이틀 전의 기록을 펼치면 감정쓰레기통을 대하듯 거친 마음으로 글을 쓴 걸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이 아니라 ‘지금’ 또는 ‘오늘’의 안정감인 셈이다. 그것도 내일치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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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예리하게 감각하고자 노력을 기울이다보니,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초대 받고 향유했던 22건의 문화콘텐츠 각각이 일상에 크고작은 변주를 일으켰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취향에 잘 맞지 않았던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끈질기게 공책에 생각을 끄적이고, 또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내기까지하면서 감상을 흘려보내지 않았던 과정 자체가 새로운 영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중 클래식과의 역사는 점처럼 찍히곤 했다. 클래식 작곡가들의 삶과 음악을 함께 조명한 책을 읽고서, 나에게는 없는 줄만 알았던 클래식과의 여러 접점을 기억해내 한 편의 글로 엮었던 것이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점이다. 그 책으로 쇼팽을 좋아하게 됐다. 두 번째 점은 공연이었다. 음악으로 연주자 여럿과 수많은 악기들 그리고 음악의 주인인 작곡가와 교감한 소감은 ‘가사 없는 편지’로 기억되었다. 이후 클래식 곡들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작곡가나 연주자가 아닌 감상자를 매개로 음악과 연결되는 경험 또한 즐거웠다. 아직도 피아노로 인상(印象)을 그린다는 책 속 문장을 좋아한다.

 

세 번째 점 이후로는 새로운 사건이 좀처럼 찍히지 않았지만, 쇼팽을 기억하고 이 공연을 보러가기로 결정한 만큼의 애정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전히 클래식과는 소개팅 첫 만남 같은 설렘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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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조재혁 리사이틀’은 쇼팽의 곡으로만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구성은 발라드와 소나타였다. 발라드 ‘No.1 in G minor, Op.23’, ‘No.2 in F major, Op.38’, ‘No.3 in A-flat major, Op.47’, ‘No.4 in F minor, Op.52’가 연주됐고 인터미션 후 이어진 소나타는 ‘No.3 in B minor, Op.58’였다. 이 공연은 서울을 포함한 8개 도시에서의 전국투어로 진행되었다.

 

클래식 공연의 매력은 음악과 연주를 통해 연주자와 교감하며 동시에 아주 오래 전의 작곡가와도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더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공간에서 작곡가, 연주자 그리고 감상자 개개인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는 점이 새삼 가깝게 와닿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공연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나열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의 경험을 빌려 쇼팽과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을 소개하자면 쇼팽의 삶과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 앞서서는 쇼팽과 같은 낭만주의 음악가였던 리스트가 쇼팽에 대해 쓴 ‘내 친구 쇼팽’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불멸의 월계관을 써야 할 이들에게 한낱 꽃다발이 가당키나 한가?’라는 경외심 가득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쇼팽의 삶과 작품이 지닌 가치를 200페이지 가량에 걸쳐 이야기한 책이다.

 

쇼팽은 ‘요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야심을 두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온전히 상아 건반으로 옮기는 데 만족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피아노와 조재혁 피아니스트 둘만이 무대에 올라 몰입할 수밖에 없는 연주를 보여준 것을 떠올리며 이 대목을 읽었다. 또 공연 도중 쇼팽의 음악을 관통하는 유일무이한 서정성을 느낄 때면, ‘예술에서 소위 ‘고전’으로 통하는 것이 그에게는 지나치게 방법적 제한으로 보였다’며 관습적인 체계에서 균형을 갖추기를 원하지 않았던 낭만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생각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공연의 주인공인 연주자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조재혁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연주자가 악보를 공부하고 소리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그 연주자 특유의 개성이 담기는데 사람마다 외모도 다 다르듯 음악적 개성이 다 다르기에 오늘도 이 작품들을 연주하며 듣는 이유가 생기는 거지요.” 이번 공연의 중요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음악 안에는 작곡가와 연주자와 감상자의 각기 다른 서사가 무수히 공존하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서도 몇 백년의 시간을 건너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공연 현장은 아주 빠른 속도로 오고 또 가는 빛들의 향연이다.

 

세 번째는 감상자였던 나의 이야기다. 발라드를 연이어 듣는 도중에는 불현듯 슬퍼졌다. 건반 고유의 깨끗하고 청아한 음색, 거대하고 반짝이는 콘서트홀,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한 발라드 선율이 나와는 멀게 느껴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익히 알려졌듯 아름다움과 서정적인 음악을 일구어내기까지 쇼팽에게도 끊임없이 부딪히는 사유들, 타고난 섬세함과 완벽주의에서 오는 괴로움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유로움을 표현하는 연주 한올한올에서 놓칠 수 없는 연주자의 치열함을 발견하면 또다시 그들과 가까워졌다.

 

아름답지 않은 삶, 아름다운 곳으로 가고자 만들어진 음악의 언어가 어우러져 끝내 완성하는 아름다움은 문화예술이 우리 삶에 필요한 가장 첫 번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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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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