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영화]

글 입력 2022.06.1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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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내게 가장 사랑했던 영화를 묻는다면 기꺼이 침묵하겠지만, 가장 좋아했던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어벤져스> 시리즈. 그중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한 사가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며 전율하지 않은 자, 그 누구인가.


 

두 장면


마블을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모든 장면이 설렜을 영화지만, 특히 나를 아찔하게 했던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최종 빌런 ‘타노스’ 군단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모든 히어로가 다시 모이는 장면.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가슴 벅차 눈물을 훔쳤을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히어로들이 한 스크린 안에 등장한다는 판타지의 실현이자, 거대한 서사의 종결을 ‘모두의 승리’로 마무리하겠다는 전언처럼 느껴졌으리라. 역시나 어떠한 반전을 기대할 필요도 없이, 어쩌면 지극히 뻔한 방식으로, 히어로는 승리한다. 이 뻔한 승리의 서사가 영화적으로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은 <어벤져스> 시리즈에 걸었던 우리의 판타지적 기대를 이 상업영화가 정확히 해갈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어느 모임 장면. 캡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들이 둘러앉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며칠 전에 데이트를 했다거나 하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고 5년 후. 남겨진 이들은 사소한 일부터 다시 시작하며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캡틴은 그런 그들의 작은 용기에 응원을 보태준다.

 

“그래도 나아가야 해요.”

 

영화 초반, 어벤져스 멤버들이 생명체의 절반을 없앤 후 사라진 타노스를 찾아내 처치하지만 사라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를 느끼지 못한 채 고요하게 슬퍼하고, 오래도록 우울하다. 상실의 아픔은 상실이 존재하는 한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생존의 기쁨보다 훨씬 거대한 상실의 슬픔이 이미 ‘엔드’된 게임의 결과를 뒤집으려는 동력이 된다.

 


어벤져스1.jpg

 

 

정의의 악당


언제부턴가 매력적인 빌런의 존재 유무가 성공한 영화의 주요 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 선/악을 거칠게 나누고, 무조건적인 선이 절대적인 악을 물리치는 스토리는 관객을 동원할 매력을 크게 상실한다. 때론 악당을 주인공보다 심도 깊게 다루는 방식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다크 나이트> 속 ‘조커’나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 <위플래쉬>의 ‘플레쳐’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악은 복잡할수록 좋다. 그렇기에 <어벤져스>의 성공은 빌런의 성공이자, 최악의 적 ‘타노스’의 성공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입체적인 악당. 그들의 목적은 대체로 ‘정의’다. <어벤져스> 최강의 빌런 타노스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다. 인구 과잉으로 멸망할지도 모르는 우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체 절반을 없애는 일.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의도만 놓고 본다면 악당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맬서스 인구론에 기반했을지도 모를 타노스의 정의는 조금 더 특별하고 순결하다. 그의 결론은 ‘선택’ 제거가 아닌 ‘랜덤’ 제거―우연에 맡긴 완벽한 평등이다. 타노스의 핑거 스냅 앞에서는 빈/부/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저 우연에 의해 정확히 절반이 사라지는 것. 자신의 편도, 심지어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공정성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이다. 우리가 바라는 희생과 공정을 가장 철저하게 밀고 나갔기에, 모순적이게도, 그는 악당이 된다.

 


타노스.jpg

 

 

정의를 이기는 정(情)


이 영화가 짜릿한 건 정의가 두 번 이기기 때문이다. 타노스의 정의가 한 번, 어벤져스의 정의가 다시 한 번. 각각의 정의가 한 차례씩 승리하므로, 우리는 영화적 상상 속에서 평가를 내려볼 수 있다. 누구의 정의가 옳은 것인가. 인류의 절반이 사라진 지구에 ‘고래가 돌아오고 수질이 좋아졌다’면, 타노스의 주장대로 생명체 절반의 공백 이후 어떠한 좋은 변화들이 나타났다면, 타노스의 희생론을 우리는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어벤져스가 내세우는 정의는 모호하다. 분명 인류를 돌려놓아야 하지만 그들이 인류를 왜 돌려놔야만 하는지, 우리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타노스의 정의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면, 그에게 저항하는 어벤져스는 무분별하고 비합리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어벤저스어셈블.jpg

 

 

마블 영화의 매력은 난처한 질문을 던지고 대중적으로 풀어낸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쉽게 답을 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 내에서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다. <어벤져스>는 복잡한 정의의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맺는다. 우리는 <어벤져스>가 내린 결론에 화답한다. 돌아온 어벤져스에 의해 타노스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가 전율했던 건, 무결한 타노스의 정의보다 무분별한 그리움이 인간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노스를 물리쳐 사라진 절반이 돌아오고 어쩌면 인류는 다시 몸살을 앓겠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나약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 어벤져스는 돌아온다. 악당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보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다시 모인다.

 

“어벤져스, 어셈블!”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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