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욕망 또는 화려함을 담는 미술 - 1 [함명수, 이진혁]

글 입력 2014.09.1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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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생각, 끄적임

Art, think, Write


도시의 욕망 또는 


화려함을 담는 미술


1


함명수, 이진혁






도시를 그리거나 사진으로 촬영하는 작가들이 많다. 그들의 관심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면에서 도시는 삭막하거나 혹은 화려하게 보여진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마천루가 드높이 세워진 거리를 걷다보면 나는 상대적으로 도시 속에서 작은 부속품처럼 느껴진다. 도시를 위해 내가 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아니 나는 아직 학생이니 도시를 위해 일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닐까? 도시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하지만 생물인 인간에 의해 개발되고 계획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만연해있다. 그곳에는 도대체 어떤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물론 도시가 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말할 순 없다. 그저 도시는 인간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도시를 표현해내는 것 혹은 포착해내는 것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일까? 단순히 거대자본의 집합체인 현대도시에 대한 숭고미를 표현하는것은 아닌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도시를 그리는 작가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이들이 도시가 가지는 의미에 확답을 내리진 않는다. 단지 그들은 자기가 본, 살아온 도시에 대한 환멸이나 인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든 미술을 대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도시의 의미


현대사회에서 도시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도시마다의 계획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꿈과 희망이 모이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모여진 것들은 거대한 욕망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도시에선 실패자와 성공자가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도 앞날을 예견하기 힘들다. 거대대륙 국가에서는 주택이 우리나라와같이 땅의 크기가 작은 나라의 경우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가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현대인의 간이무덤과도 같다는 느낌이다. 도시는 욕망이 끊임없이 분출되고 이행되어 인간을 유혹하고 배신해내는 장소로 생각된다. 과연 현대의 도시만이 이런것일까? 프랑스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의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았건 관계없이, 도시는 늘 도시이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처럼 도시는 어느 시대, 공간에서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공간의 제공, 최소한의 치안의 제공, 돈을 벌 수 있는 장소의 제공과 같은 것들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의 도시에서는 덧없고 허울뿐인 것들이 최고의 가치로 칭송받고 있으며 이는 도시의 허울을 잘 드러낸다. 브로델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지만 역시 국가, 시대에 따라 도시는 전체적으로 같지만 다른 양가적인 존재였다. 도시라는 인간이 세운 환경은 인류의 최고의 창조물로 불리며 자연환경을 인공적으로 개조하고 바꿀 수 있는 인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라고 조엘 코트킨은 말한다. 동양에서는 그 정도가 적었지만 역시 인공적인 환경을 제작하는데에 인간의 모든 것이 총집합된것이 도시일것이다. 도시에서는 인류의 예술, 종교, 문화, 상거래, 기술 등 이른바 모든 것이 발생하고 발견되었다.


도시는 본질적으로 중동에서 먼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는 2만 5천년전에서 4만년전 사이에 진화하여 기원전 8000년전 무렵에 지구의 모든 곳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족, 씨족 사회를 이루고 살아갔으며 작지만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점 뭉치게 되었고 마을을 이루고 더 나아가 복잡한 도시라는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고대의 도시에서는 성직자들이 최고의 계급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초기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종교를 선택하진 않았을까? 그들은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도시 거주민들을 기준으로 짰다고 하니 말이다. 종교 도시의 시대를 넘어 바빌론은 법률 시스템을 가지고 도시를 지배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인이나 장인은 부를 축적해도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고 성직자와 군인, 관료가 도시를 지배했다. 시대가 지나고 점점 도시는 ‘부’를 쫓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도시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되었다. 물욕과 부, 자본을 쫓는 일이 말이다. 이에 대해서 ‘맘몬의 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이후의 도시는 빈민들의 생활은 혐오스러웠으며 즐거운 인간관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금전에 의한 인간 관계의 결합’이라고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의 이야기와 같은 관계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계화와 노조의 강화로 서구도시에서 노동자들은 좀 더 나은 도시환경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규모가 작은 도시도 이제는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산업화, 물질화의 도시는 이전 시대에 종교의 사원, 왕정의 궁정과 같은 맥락으로 거대한 철제 콘크리트로 제작된 마천루를 지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장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욕망적인 장소였으며 인간의 욕망과 오만이 하늘높이 찌르려고 하는 바벨탑과도 같다고 생각된다. ‘르 꼬르뷔지에’는 과거의 방해물을 쓸고 철저히 현대적인 것으로 자리를 채우려고 옹호하고 명료하게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요소를 불어넣고 싶어했다. 그는 맨해튼의 교령과 고층 빌딩이 가지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황혼이 내리면 유리로 된 마천루들이 불타오르는 듯 보이는 곳” 


도시는 물론 욕망의 집결지이지만 그 이면에는 도시에 와서 바랬던 인간의 꿈과 희망이 들어있다. 때문에 단순히 도시를 욕망만을 가진 환경으로 해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더더욱이 미술에서 그것은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 이다. 도시의 야경이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 그것을 바라는 꿈, 희망이 가시화되어 나타난것처럼 보인다. 도시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희망으로 가득해 애매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그리고 이 ‘도시’ 욕망과 꿈이 교차하는 ‘도시’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고와 표현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그리는 도시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도시를 그리는가? 따라서 이번 ‘도시의 욕망 또는 화려함을 담는 미술’시리즈에서는 우리나라의 4명의 작가가 그리는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함명수, 구본석, 이진혁, 김수영’ 이렇게 네 작가들이 그리는 도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사진으로 도시를 포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낀 그 장소에 대한 감정을 그리기 혹은 설치로 표현해낸다. 도시에 대해 더 다층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회화 그리고 회화에서 연결되는 LED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도시가 가지는 속성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포착하여 자칫 한쪽으로 기울어 표현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함명수 - 터치감으로 살리는 욕망의 도시


현대미술의 회화에서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많은 작가들 중 단연 확고한 자신의 색을 가진 작가가 있다. 바로 ‘함명수’작가이다. 그는 이번 전시제목과 같이 작품속에 욕망을 담는다. 목원대 미술학부를 졸업한 작가는 1993년 청담 아트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데뷔로 2001년 금산갤러리의 ‘면발풍경’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전시 제목과 같이 작가는 면발과 같이 꼬불꼬불하게 대상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 자신은 ‘면발’이라는 이름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대상을 묘사하면서 터치감을 살리고 그 터치감으로 인해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첫 경험을 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을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개성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함명수_Times Square_캔버스에 유채_220×274.5cm_2013



그의 작업들은 2001년의 작업부터 현재의 작업에 이르기 까지 ‘도시풍경’을 주로 다루었다. 이 ‘도시풍경’은 초기에는 면발이 아주 세세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작업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이 터치감이 커지고 다양성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과정은 같다. 하지만 초기에는 아주 얼룩들. 흔적들, 표면의 얼룩을 만들고 그린것이었다. 점점 더 자유롭게 되었다. 작업들 사이에 새롭게 시도했던 것들이 융화되면서 표현이 복합적으로 발전했다. 조각이나 메탈느낌들이 종합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초기에는 그리는 자체에 집중을 했다면, 지금은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주제적인 면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의 문제까지 담으려고 한다.” 


단순히 대상을 모두 같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느낌에 따라 더 다양한 터치를 구상하는 것이다. 특히나 최근 작업에서는 ‘미국’의 대도시를 묘사했다. 야경 속에서 사람들이 꽉찬 화려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하는 작가는 굳이 직접 간 이유가 스스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작업을 하기 전 항상 세부적인 모습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Time Square 연작은 이전의 작업보다도 더 화려한 색채나, 꼬불거림이 드러난다. 작가는 “‘미국’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주는 긴장감이 나의 작업을 더 다채롭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최근작들을 보면 꾸불거림의 끝에 혀를 그리는데, 이것은 작가의 말을 통해 보면 ‘욕망’ 그 자체를 상징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혀’는 우리의 욕망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말을 통한 것이든, 육체를 통한 것이든, 혀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은 계속해서 표출된다. 따라서 작가도 작품의 끝에 혀로 된 욕망의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함명수_Times Square_캔버스에 유채_162.1×227.3cm_2013


함명수 작가의 도시는 추상적이지만 그 구상적 측면은 대단히 극사실주의와 같다. 따라서 그의 도시는 몽환적인 느낌과 다채로운 색감이 느껴진다. 그는 하이퍼 리얼리즘처럼 그리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작가는 카메라는 ‘기록’의 측면이 강하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은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놓고 그것을 다시 그렸다고 한다. 이것은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런 다시 그리기를 통해서 새로운 터치감을 불어넣은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몽환적인 느낌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작가는 자기 작업에서 ‘구상’과 ‘추상’이 함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처럼 그의 도시풍경은 전체적으로 사실적이고 구상적이지만 그 세세한 면모는 굉장히 추상적이다. 이 도시의 풍경은 우리가 느낌으로 기억하는 도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도시는 인간이 세운 어떤 환경보다도 정갈하고 그 시대의 세련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는 인간의 감정들이 꿈틀대기 때문에 함명수의 그림에서도 그런 꿈틀거림이 발견되는것은 아닐까?


작가는 우리의 도시를 화려하지만 소박하고 정감이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국의 도시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다고 말한다. 외국의 도시는 우리와 다른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말하며 그 속에서 오는 느낌이 정글과도 같다고 한다. 언어 소통의 부재와 차이가 작가에겐 긴장감을 주는 요소라고 한다. 함명수 작가의 도시 풍경에서 보이는 것은 정갈하고 딱딱한 모습이 아닌 꾸불거리고 몽환적인 모습이다. 이는 욕망이라는 것이 만연하는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 작가의 터치로 표현되는 회화는 그의 꾸준한 그리기를 통해서 세밀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욕망이 꿈틀대는 듯한 그의 도시풍경을 직접마주했을때 그 화려한 표면에 매혹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도시에게 매혹되는 이유와 같은것일지도 모른다.



함명수_Times Square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13


이진혁 - 삭막함으로 세워진 도시


현대인에게 도시란 무엇보다도 동경하는 곳이자 무서운 곳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장소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도시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며 또한 그 과정에서 잃는것도 많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항상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해서 고민하며 더 행복하고 즐거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는 아직 행복의 도시가 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고 도시에서 일하며 혹은 도시에서 공부하고, 또는 도시로 가기 위해 꿈꾼다. 또 다른 사람은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도시와 반대되는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도시 하나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다른 것을 꿈꾸고 느껴댄다. 작가 이진혁은 이렇게 수많은 욕망과 행복 혹은 뒤틀린 감정이 온갖으로 섞여있는 인간의 도시를 작품에 담아낸다. 그는 도시의 그림자를 그린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행복하고 화려한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면성 현대적인 아픔을 그림에 무서우리만큼 담담하게 담아낸다. 어딘가 불안하고 무너져내릴것만 같은 혹은 이미 전쟁, 자연재해로 파괴된 것 같은 검은색의 도시 형상은 자신의 단단함을 자랑하듯 멀끔한 외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어디선가 도시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다. 





이진혁_over there


작가는 장지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한 작업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표현은 지극히 전통적이게 보이지도 않는다. 이 이유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그는 전통 한국화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이후 세대의 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의 소재는 전통적인 맥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전통의 것이 아닌 현대의 도시이다. 이를 전통적인 소재를 이용해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 현대는 전통을 넘어서고 전통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2007년의 작업부터는 서서히 도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자동차는 여전히 빽빽하게 화면을 가득 메운다. 혹은 적당한 여백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작업은 그가 바라보았던 시각적 경험에서 유발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확대되거나 발전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 2011년 드디어 현대인의 산물을 바라보고 그에 대해 작업하는 시각이 온전히 '도시'로 이동된다. 그는 이 당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작업을 하는데, 마치 헬기를 타고 지면을 바라보는듯 하다. 그는 이런 시점을 통해 도시를 날것 그대로 공개한다. 화려하게 세워진 도시의 정수리를 훑어본다. 또한 지난 작업의 차와 마찬가지로 도시도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진혁의 작업은 언제나 멈춰진 그리고 고요해보이고 섬뜩하기도 한 화면을 보여준다.



이진혁_Traffic Trouble_장지에 주묵_75×142cm_2007



2013년 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작업에서 벗어나 관찰자 시점이 되었다. 이전 작업에서 도시의 날것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면 이번에는 그 본질과 속성을 보여주려고 분투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목탄을 장지위에 반복적으로 칠하는데 이를 통해 도시의 물질성을 강화시켜나간다. 더 나아가 미니멀리즘이 추구하고자 한 모더니즘의 영역을 다시 밟아 가는 면모도 보여준다. 지난 작품들이 선을 이용해 이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시리즈에서는 '면'을 통한 모더니즘의 추구가 보인다. 그림 속의 도시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속에서 실제 도시를 만드는 절차와 같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도시의 모습은 언캐니한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이를 통해 감각의 전이가 발생한다. 우리의 지각속의 도시와 이진혁의 그림자 도시가 서로 충돌한다. 완전히 검은도시의 형상과 대비되는 배경(밝은색이든 어두운 색이든)은 도시가 가리키는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의 블럭과도 같이 건물들은 도시를 이루어낸다. 이는 매우 화려하기도 하며 차갑고 날카롭기도 하다. 오로지 도시만 자리잡은 화면은 철저히 생명과 그외 부수적인 모든 것이 배제되어 도시의 무거움만이 자리잡는다. 단순한 조형미는 작가의 의도와 감정을 확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현대에서 점점 단순화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미니멀리즘적인 특징이며 현재까지 존재하는 잔재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도 무관하지 않게 미니멀리즘적이다. 



이진혁_over there


이진혁의 도시는 마치 거울과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시만 비추지 않는다. 비록 그 그림안에는 모든게 제거되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도시 속 현대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기도 하다. 이면적인 모습들이 교차되며 부조화를 일으키는 화면은 그 단순한 조형미가 더해지며 우리의 감각을 극대화 시키게 된다. 이전 작업들과 다르게 이번 전시의 작가의 작업은 더 생각할 이야기를 제공한다. 도시에 대한 작가의 우려와 함께 긍정적인 측면도 엿보인다. 작가가 그려내는 도시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며 작가 자신의 초상화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그림을 보며 도시와 그것이 기능하는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도시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해서 자각하기도 한다. 이런 작용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위치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도시 속에서 올바르게 아니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구본석, 김수영 작가는 다음 이 시간에...


by. 하마

[하재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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