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진장 행복한 그곳, 무주 산골 영화제

글 입력 2022.06.2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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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1. 영화제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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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좇아 잠실과 올림픽공원은 물론, 자라섬과 남이섬, 인천 앞바다까지 갈 수 있는 데라면 어디든 따라나섰다. 먼 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땐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이웃나라 페스티벌로 향했다. 축제장에 캐리어를 끌고 들어선 유일한 한국인 무리였다. 코로나로 하나둘 사라졌던 축제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자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 발을 구른다. 초조하게 예매일을 기다리며 혹여나 티켓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하지만, 문득. 그 긴장감, 손에 땀을 쥐는 그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축제라면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 사람에게도 낯선 이름이 있다. 알아보고 싶었는데, 가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가보지 못할 이유도 없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영화제였다. 글쎄,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달려가던 전시회와 공연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지 않는다고, 완전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도 좋아하는 영화인들이 있었다. 잊지 못할 장면을 보고 그 마음을 설명할 언어가 없어 슬퍼하다가, 감독의 이름을 두 손에 소중히 담아두곤 했다. 섬세하고 고유한 몸짓과 목소리로 전에 본 적 없는 삶을 그리는 배우들을 조용히 좋아하기도 했다. 매일, 매주 그들을 되짚어 보진 않아도, 가끔 영화 속 장면과 사람들을 생각하곤 했다. 그 사람들의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 부푼 맘으로 어두운 영화관의 편안한 듯 불편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러니 영화제에 분명히 가볼 만했다. 아니 꼭 가보아야 했다. 끝내 대학생 시절 꿈꿨던 영화제 자원봉사자를 해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다른 길을 택하면 됐다. 한참 들려오는 축제들에 정신을 못 차리던 어느 날, SNS 피드에서 보고야 만 것이다. 무주 산골 영화제! 몇 번 들어본 축제였고, 무주라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모르나 정감이 가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산골’영화제라니? 북적이는 축제의 장도 좋지만 자연 깊숙이 들어가는 축제에 로망이 있는 그 사람은… 정신을 잃고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Scene#2. 무주행 버스에 올라

 

서울에서 무주로 오가는 셔틀버스 예매를 놓치고 말았다. 버스 표가 풀리기 10분 전 알람을 맞춰두는 건 잊지 않았다. 그 덕에 조용한 사무실에 가득 울려 퍼지는 알람이 사람들을 깨웠지만, 민망함만 남고 목표한 바는 얻지 못했다. 시간대도 딱 맞고 편안한 셔틀을 놓치고 나니 허탈한 표정을 짓던 그 사람.
 
하지만 동행하기로 한 친구는 몇 대 없는 고속버스 시간표를 한참 찾아보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출발하는 차표를 용케 구해냈다. 세 사람은 버스 맨 뒷자리, 대체 어린 시절 무서운 친구들은 왜 이 자리를 좋아했나 궁금해지는 그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귓가의 음악 소리가 섞여 들었고, 버스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렸다.

낯선 무주의 땅을 밟았을 때, 어느덧 시간은 다섯시. 주위를 부지런히 둘러보며 등나무 운동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커다란 운동장엔 각기 다른 돗자리가 가득해 알록달록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들도 질 수 없어 서둘러 어깨에 매고 메고 온 돗자리를 꺼냈다. 마침 이번 영화제의 테마 색과 같은 보랏빛이었다. 그런 작은 우연들에 한참 웃고 즐거워했다. 그 웃음소리가 그리워 먼 길을 달려온 거일지도 몰랐다.
 
 

Scene#3. 등나무 운동자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첫날 저녁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버스를 타고 오며 보았던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볶음밥까지 잊지 않고 싹싹 긁어먹고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오니 딱이었다. 10CM가 특별 공연을 준비한 시간이었다. 그는 오래전을 떠올린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날이다.

한 건물의 옥상에서 10CM가 공연을 한다는 소식에 달려갔던 저녁. 옥상엔 잔디가 빼곡히 나 있었고, 공연하는 이가 서있는 단에서부터 시작해 공연을 관람하는 이들의 객석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가수가 관객들에게 했던 말이 들렸다. 관객 여러분은 보일지 모르겠지만 완만하게 높아져가는 잔디밭 속 얼굴들, 그 너머로 해가 서서히 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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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처럼 낮게 깔린 운동장, 그 운동장을 감싸 앉은 등나무 벤치들과 산의 형태를 보며 가수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유명한 곡만 부르는 대신, 그날에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이어 나갔다. 그가 편안해 보여서 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다 같이 따라 부르자는 말엔 큰 호응이 없었지만, 내년에도 오겠다는 말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그 속에서 분명 무주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닐까 생각에 잠긴 친구들.

내가 사는 곳, 익숙한 운동장과 체육관이 축제의 빛으로 물들고, 좋아하는 영화인과 가수,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잠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꿈을 꾸는 것만 같을까 생각하며 돗자리에 눕는 그였다.

공연을 보고 나니 배가 고파진 세 사람. 피자와 맥주를 들고 돌아온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키드’가 시작할 시간. 어두워진 산골을 뒤로하고 운동장 스크린에선 영화가 시작되었다. 담백한 흑백 무성 영화였는데 특별한 점이 있었다. 선우정아의 음성과 염신혜의 피아노 연주가 더해진 것. 스크린 곁에서 노래하는 그들이 있었다. 무주 산골 영화제는 이렇게 무성영화에 새로운 소리를 더하는 실험을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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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 찰리, 아이를 떼어 놓으려 해도 번번이 실패한 그는 아이와 함께 살게 된다. 자기 하나 먹고살기 힘든 떠돌이의 삶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 처음엔 짐이 되기만 했던 아이였지만, 빈곤한 일상 속에서도 의지하고 살아가며 점차 가까워지고, 그들을 갈라놓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였다.

흐린 날씨에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보이길 반복했다. 그는 그 모습이 신기하고 아름다워 스크린과 번갈아보며 바라보았다. 선우정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는 사람이 내는 소리와 악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Scene#4.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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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일찍 일어나 축제장으로 향하는 셔틀을 기다렸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나란히 서 있는 우비 셋. 다가오는 계절을 기다리며 예매해둔 ‘다 함께 여름!’을 보러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먼지가 조금 쌓여있는 듯한 쿰쿰한 공기와 이상할 정도로 높이 위치한 2층 공간. 오랜만에 느끼는 그 공간에 마음이 좀 시큰해진 그들이었다.

간의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사랑을 찾아 프랑스 시골로 떠난 남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영화였다. 어딘지 모르게 짜증 나는 면들이 있는 주인공들이었다. 고집을 부리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누군가의 누구를 사랑하거나.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도 갈피를 알 수 없이 변화하는 마음, 어설픈 사랑이 곧 여름 같아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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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니 출출해진 세 친구는 라면과 떡볶이, 김밥을 샀다. 4,500원짜리 라면은 당연히 분식집에서 끓여주는 느낌의 라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작은 컵라면, 그것도 평소엔 절대 고르지 않는 새우탕이 나왔다. 일단은 먹자, 외치며 뜨거운 물을 붓고 등나무 운동장으로 향했다. 비가 그치질 않았지만 등나무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빗방울이 토독토독 라면 국물에도, 김밥 위에도 떨어졌다. 아무렴 어때 외치며 맛보는데, 태어나 먹은 라면 중에 제일인 맛이었다. 어쩜 이리 시원하고 맛있지 신나게 먹으며 앞을 보니 비 내리는 운동장 저 너머 작은 천막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표와 박수소리, 빗방울이 나무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뒤로는 짙은 녹색 빛 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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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그 순간, 그는 하루쯤 비가 와야 진짜 축제라는 생각을 했다. 축제라면 햇빛이 가득 내리쬐는 무대와 손으로 해를 가리며 부채질을 하는 사람들, 그 열기가 떠오르는 법이지만. 비가 쏟아지는 틈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사람들, 계속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축제인 것 같았다.

두고두고 좋아하던 시가 떠올라 한참 바라보던 그 사람.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 소울 메이트, 이근화 中
 

 
Scene#5. 나란히 앉으면 시작되는 이야기


이어서 축제장을 더 둘러보기 위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굿즈샵을 구경하고, 이번 영화제에서 선정한 배우 전여빈의 영화와 삶을 바라보는 전시를 보았다. 다음으론 무주 산골 영화제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천천히 구경했다. 10년 동안 매해 조금씩 다른 각도로 무주와 영화를 담은 포스터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한참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GV를 보기 위해 실내로 들어섰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 사람. 끝내 두통은 나아지질 않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 친구들에게 먼저 나가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10주년 기념 전시를 보았던 장소 앞 소파에 누워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도 재미가 없어서 나왔으니 오늘은 이만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생각하는 그 사람. 기다려온 시간을 자신 때문에 급하게 마무리한 건 아닌지 미안해졌다. 그럼에도 비도 오고 지치니 같이 숙소에 가자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축제는 그곳에서 보여주는 영화와 음악, 그 모든 준비된 것들만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란히 앉아있다 보면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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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주 산골 영화제 여행기가 막을 내렸다. 상상했던 영화제와 꼭 똑같지만은 않았지만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반딧불이를 찾아 무주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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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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