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의 불완전함만이 모두를 구원할 거야 [만화]

글 입력 2022.06.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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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주인공이 자꾸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 아니꼬웠다. 스스로 수습할 힘도 없으면서 막무가내 같은 성격으로 주변 사람을 휘말리게 하거나,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들어 상황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걸 대체 왜 자꾸 하냐고 성내기 바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면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때는 주인공이 만화를 그리기 위한 욕받이처럼 보였달까. 요란한 언동도 눈엣가시였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주인공이 답답하게 군다는 이유로 싫어했다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주인공이 거의 모두에게 사랑받아서 싫었다. 단순하게 말해 열혈캐보다 햇살캐를 아니꼬워 된 것이다. 주인공은 단지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운이 따르며, 타인의 재능이나 노력을 쉽게 뛰어넘고, 사람을 모으고, 악인까지 감화시킨다.

 

가진 자만이 베풀 수 있다고 하던가. 삶을 기꺼이 누리는 그들의 인생에 그늘 따위 조금도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 솔직히 말해 슬픔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웠다. 누구에게든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 내가 전혀 될 수 없는 사람이라.


이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을 좋아하게 됐다. 전공 필수로 수강한 소설론 수업에서 주인공이 작품 내에서 하는 역할을 배운 뒤부터다.


 

'문제적 주인공이라는 표현에 담긴 '문제적'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이 표현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으로 표상되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고 갈등관계에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갈등은 우발적인 것이 아닌 근본적인 성격의 것으로서, 인간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타락했음을 깨닫고, 이 타락한 세계에 대하여 자신이 참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대비시킴으로써 발생한다.

 

'문제적'이라는 표현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소설 주인공이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 자체도, 비록 그 타락의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와 마찬가지로 타락했다는 점이다. (...) 이 두 가지 의미에 비추어서, 소설은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정의된다.'


- 루시엥 골드만의 소설론, 홍성호, 소설과 사상 1999년 가을호

 


이걸 불현듯 깨닫게 된 순간 주인공이라는 역할에 매료됐다. 무대 위에서 보기 좋게 반짝반짝 스포트라이트나 받는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실은 무대를 떠받들고 있는 우라노스였다니. 가장 주체적으로 보였던 인물이 누구보다 플롯에 예속되어 있었다니.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최근에 겨우 알아차렸다.

 

이야기가 쓰이고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불완전해야만 한다. 서사는 주인공의 빈틈을 채우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한 인간을 이야기 속의 인물로 만드는 것은 결함이다. 그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세계를 고민할 수 있다.


예전에는 되는 이야기에서 기어코 안 되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좋았다. 사람 살리라고 만들어놓은 루프물에서 결국 루프를 포기하고 연인의 죽음을 수긍하는 거. 그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그런 내용을 선호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제는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서라도 사람을 살려내는 플롯이 왜 재미있고 잘 팔리는지도 안다. 우리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을 해내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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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재밌게 보고 있는 만화 『도쿄 리벤저스』가 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연법칙도 거스르는 내용이다. 이 만화의 주인공 하나가키 타케미치는 액션 장르 만화의 등장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에 소질이 없다. 보통 주인공들이 느리게라도 싸움 실력이 상승하는 것에 비해, 타케미치의 주먹질은 늘 제자리 걸음이다. 무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없기 때문에 그는 작품의 가장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갈등을 늘 한 바퀴 에둘러 해결하고는 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만든 건 악수 한 번으로 12년 전 과거와 현대(지금)를 오갈 수 있는 타임리프 능력이다. 언뜻 전지전능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에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현대로 돌아오면 세계와 인물, 인물과 인물들은 또 다른 갈등을 빚고 있다. 바뀌지 않는 미래가 나오길 수 번, 이쯤되면 포기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타케미치는 좀처럼 현실에 좀처럼 안주하지 않는다. 무모하기 짝이 없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에서 미도리야가 올마이트에게 모두를 구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올마이트가 "분하지만 나도 인간이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인간은 구해줄 수 없어. 그러니 더욱 웃으며 서있어야지. ‘정의의 상징'이 사람들의, 히어로의, 악당들의 마음속에 늘 불을 밝힐 수 있도록."라고 대답한 게 인상 깊었다. 이렇듯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히어로조차 자신이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타케미치는 그럴 수 없다. 걔한테는 타임리프라는 매혹적이고 잔혹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타케미치가 원하는, 아니 이 세계가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를 도래시키기 위해 작가는 그에게 여전히, 혹은 아직도 기회를 준다. 다시 한 번 해보라고. 넌 할 수 있다고. 새로운 좌절을 맛보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가리킨다. 포기할 수도 없게.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타케미치는 계속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가능성 있는, 가망 있는 미래에 중독되는 게 당연하다. 기권하지 않는 한 링 밑으로 내려가는 게 허락되지 않은 싸움판에서 그는 K.O. 선언을 몇 번이나 당하든 일어나 보여야 한다. 그게 주인공의 역할이니까. 작가가 펜을 내려놓기 전까지, 독자가 표지를 덮어버리기 전까지 다리가 아무리 후들거려도 끝끝내 서있을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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