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그녀를 그리다 [도서]

글 입력 2022.06.0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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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랑하는 이를 보낼 때가 오려나. 그럴 때 이 시집이 내게 큰 위안이 되겠지. 박상천 시인은 그의 반쪽 와이프를 잃은 슬픔을 시에 녹아냈다. 그리움과 헛헛함을 담아낸 시들은 울컥울컥 마음을 징- 하고 울렸다.


 

햇볕


당신은 간혹 도마며 반찬 그릇들을 창가에 널어 말렸지요.

플라스틱 도만데, 세제로 빡빡 씻으면 됐지, 뭐, 햇볕에 말리기까지야

널어놓은 것들을 보며 난 그렇게 생각했지요.


어느 날, 김치를 썰었던 도마를 아무리 씻어도 그 흔적이 남아 깨끗해지지 않았어요.

문득 당신이 하던 일이 생각나서 도마를 창가에 두고 햇볕에 반나절을 말렸지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도마에 배어있던 김칫국물의 색깔이 바래는 거였어요.

김치 그릇에서 냄새도 가셨어요.

아, 다시 하얗게 돌아온 도마를 보며, 냄새가 가신 그릇을 보며

세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햇볕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는 걸 알았지요.


당신 없는 집안에서 난 그저 세제의 역할밖엔 할 수가 없어요.

햇볕을 쬐지 못한 집안 이곳저곳엔 계속해서 얼룩이 남아있네요.


딸의 마음이나 나의 마음속, 얼룩이 가시지 않듯.

 


어머니를 떠올렸다. 시를 보며 자식을 낳고 기른다는 건, 본인이 가진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은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차곡히 쌓인 지혜들은 방황하는 누군가의 삶을 굳게 잡아주지 않을까.


하얀 셔츠에 목 부분이 노랗게 바랬었다. 세탁 전 처리제를 발랐어도 나아지지 않는 셔츠를 보며 버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햇볕에 말려두셨다.

 

다음 날 다시 새하얘진 셔츠를 보며 눈이 동그래졌었다. 여름이 오면 음식이 잘 상하고, 아프면 가야 하는 병원 추천, 음식에 넣는 비법소스, 지나치는 꽃과 나무의 이름 등 당연한 것들은 가장 첫 번째로 부모님께 배웠다.


머리가 크면서부턴 이제 어른이 돼서 다 알만하다고 호언장담하던 때도 가끔 찾아왔지만, 새로운 환경과 처음 보는 환경엔 항상 부모님의 지혜가 필요했다. 회사생활을 이어오신 아버지의 촌철살인 한마디는 나의 생각을 넓혀주었고, 벽에 부딪혔을 땐 지름길을 일러준다는 걸 조금씩 깨닫는 요즘이다.


부모님의 지혜를 받아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간다. 아직도 여전히 모르지만,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 하고, 아버지의 행동을 따라 살아간다. 이런저런 사회의 일을 겪으며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씩 배우는 경험은, 미래의 나에게 햇볕이 되겠지.

 

 

마트에서 길을 잃다


당신과 함께 장을 보러 가던 마트에 이젠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따라오는 때도 있지만 혼자 가는 때가 더 많습니다.

혼자 장을 보노라면 예전과 달리, 당신 눈치 안 보고 사고픈 것을 사는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당신 뒤를 따라 카트를 밀고 다닐 때완 다르네요.


당신과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면 난 스스로 꽤 괜찮은 남편이라 생각했지요. 대단한 일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장을 보기 위해서는 일주일 메뉴도 미리 생각해야 하고, 집안 곳곳을 살펴보며 무엇이 떨어졌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일일이 메모를 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찬찬히 메모를 하고 장을 봤지만 돌아오면 또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젠 나 혼자 메모지를 손에 쥐고 거대한 마트 안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문득 앞서가던 당신이 보이지 않아 난 갑자기 멍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오른쪽으로 돌면 당신이 있을까, 물건을 고르고 있는 당신을 지나쳐 온 건 아닐까,

자꾸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유기농 야채 코너에도, 정육 코너에도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앞서가던 당신을 잃어버린 나는 길조차 잃어버려 자꾸만 마트 안을 헤매고 있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실적이어서 눈앞에 상황이 그려지는 시이다.

 

가끔 마트를 갈 때면 엄마 카드를 챙기고, 어머니가 싫어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초코, 초밥, 과자, 아이스크림 등 코너를 흘긋흘긋 보며, 흥미가 생기거나 흥미를 잃으면 곧장 엄마를 찾아 나선다. 자석이라도 있는 건지 그리 오래지 않아 직원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두 개 중에 고민을 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면 왠지 모르는 안도감이 든다.


내가 사는 다과에는 매번 찬성하는 아버지 옆으로, 일종의 허락이 필요한 어머니에겐, 이번까지만 살 거라는 말로 설득하거나 은근슬쩍 카트에 넣고 들키지 않기만을 바란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참 당연하다 생각하던 나를 멈칫하게 했던 시였다.

 

일상에서 오는 그리움과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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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살아진다


‘살다 보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 세우고 한참을 울던 시간도 있었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메어 한참을 멍하니 있는 때도 많았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터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시간도 많아졌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피어나는 꽃들조차 그렇게 싫더니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거지 같다 정말 거지 같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대해 속으로 욕을 하며 살았지만

그 시간들도 그렇게 지나가고 살다 보니 살아졌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이제 당신을 그리는 시는 이쯤에서 그만 두려 한다. 당신에 대한 시를 10년쯤 써왔으니 이제 그냥 멀리 있는 친구, 잘 지내려니 생각하며 살려고 한다.” 시인은 말한다. 살아진 시간에 담담히 고백하며 매듭을 짓는 시인이 그려진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무뎌지고, 사실만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때때로 질색하며 살던 과거의 어느 때를 지나, 이젠 시간아 제발 잘 흘러가라, 제발 해결해주라 생각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삼키며 삭히며 산 것이지 완전히 잊히지 않는 몇몇 기억은 여전하다.


진부하다 느끼며 바래진 기억만을 종종 생각하곤 하지만, 감정과 기억은 둘째하고 살아는 지더랬다. 깊게 해석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다. 그저 가타부타 말 없이 문장 그대로. 느낌 그대로. 살다 보면 살아진다.


도서 <그녀를 그리다>를 보며 그리운 누군가를 그리고 위안 받길 원하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일상 속 차곡차곡 쌓여있던 당연한 존재의 ‘난 자리’는 길고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살아가다가 간혹 바람이 불 때면 잔잔히 위로받고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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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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