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아하는 마음은 사소하지 않다 – 2022 서울국제도서전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6.0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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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담은 도서전


 

봄의 끝자락, 여름의 초입에 들어설 때면 몸도 마음도 붕 떠오른다. 막 푸른빛을 뿜기 시작한 풀숲, 햇빛에 물드는 강을 바라보면 마음에도 싱그러운 여름이 찾아온다. 이번 여름은 유독 눈부시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도 곁으로 찾아오는 계절에 더해 반가운 소식이 하루하루 들려와서다.

 

문밖을 나서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날들이 찾아오면서, 오래 그리워했던 행사와 축제가 다시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책이든, 자연이든, 축제는 좋아하는 것을 마음 놓고 실컷 좋아할 장소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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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축제는 많지만 대학생에겐 시험 기간 이라는 큰 벽이 있었다. 지금에야 돌아보면 대단한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닌데, 하루 정도 다녀와도 되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쩐지 시험 기간엔 그래서는 안된다는, 보이지 않는 약속이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도 그러한 이유로 미루고 미룰 수밖에 없던 행사였다. 처음으로 도서전에 가보았던 2019년, 휴학의 맛이란 이런 것이지 그때 그 기쁜 마음이 선명히 기억난다.


책이 좋은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서울국제도서전, 코로나로 오래 만나지 못했던 행사가 3년 만에 돌아왔다. 6월 1일부터 6월 5일까지 코엑스에서는 익숙한 이름의 출판사들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출판사까지 다양한 책방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책을 읽고, 쓰고, 기억하는 이야기를 담은 강연들과 소소한 기쁨을 주는 이벤트들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종이 너머의 세계를 만났다.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행사장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한가득인 부스가 눈에 띄었다. 부스를 따라 둥글게 줄이 길게 이어져서,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한참을 따라가야 알 수 있었다. 기대감에 상기된 표정들을 따라 걸으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신간 ‘작별인사’로 돌아온 김영하 작가의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새 책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영상으로, SNS로 많이 보았던 터라 오랜만에 만난 지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명한 베스트셀러들과 함께 ‘알쓸신잡’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그는, 말도 글도 사람을 자꾸만 궁금해지게 하는 무언가를 지닌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김영하 작가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책의 소중함을, 짧고 간단한 글이라도 계속해서 쓰는 중요성을 말해주어서 좋아한다. 작가의 글을 좋아하고, 작가의 생각과 가치관을 좋아해서, 짧게 사인을 하는 찰나에 그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좋았다. 

 

이번 도서전을 보면서 어떤 책을 구매할지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보았다. 평소에 사고 싶어 눈여겨보았던 책, 누군가 유명한 이의 추천을 받은 책, 즐겨보던 출판사의 책은 다음에 사자고 마음먹었다. 다양한 책이 한자리로 모이는 만큼, 우연한 만남이 기다려졌다. 조용히 펼친 책장에서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는 낯선 문장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 고른 책은 은행나무 출판사의 배반 인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혐오’였다. 익숙하게 자리 잡은 그 감정 혐오에 관한 이야기였다. 혐오의 기원부터, 다양한 형태, 이를테면 자기혐오부터 약자에 대한 혐오, 이 시대가 보이는 혐오의 양상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직도 세상에 혐오가 너무나 만연해서 나는 두렵다. 그 사실이 두렵고 무서워 모른 척 눈 감고 싶기도 하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무력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그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게 한다. 혐오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세상 가득히 퍼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매대에 시리즈 중 ‘혐오’만 새 책이 보이지 않아 직원분께 구매할 수 있는지 물었다. 참 신기하게도 ‘혐오’만 준비한 재고가 모두 소진되었다고 했다. ‘첫날 오후에 벌써?’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우면서도 혐오를 이해하고, 조금씩 지워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두 번째로 고른 건 마음산책 출판사의 책 들이었다. 처음 들어선 부스의 공간에서 오래된 안정감이 느껴졌다. 책장을 채운 책들과 매대에 가까이 마중 나온 책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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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소연 작가의 책들을 모아 전시해둔 작은 공간에 눈길이 갔다. 시를 좋아해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김소연 작가는 마음산책 출판사와 함께 ‘마음산책’,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을 만들었고, 이번 도서전에서는 신작 ‘어금니 깨물기’를 처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네 권의 책이 나란히 놓인 책장을 찬찬히 살피다가, ‘시옷의 세계’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저자 소개가 마음에 들어 손에 꼭 쥐었다. ‘시옷의 세계’는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낱말들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푸른색 표지와 책 중간중간 엿보이는 푸른색 글자들이 좋았다. 초 여름에 곁에 두고 싶은 책이었다.


 

시인.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집 읽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다가, 순도 100퍼센트 내 마음에 드는 시는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했던 도서관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쁜 걸음들 속에서 혼자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혼자가 아닌 곳에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 ‘시옷의 세계’, 김소연 작가 소개 글 中

 

 

책을 손에 쥐고 뒤편의 책장 앞을 서성이다 메리 올리버의 책을 만났다. 책의 뒤표지마다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가 그의 시를, 그의 시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빛이 담긴 표지가 아름답고 제목도, 안에 슬쩍 들여다본 시도 좋았던 시집 ‘천 개의 아침’을 골랐다. 큰 상을 받은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가는 책을 고르고 싶었다.


부스를 나와 선선히 걸었다. 이곳저곳 익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을 번갈아 드나들며 새 책, 다시 소개하는 책, 오래된 책들을 한없이 구경했다. 혼자 도서전을 걸으면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근처를 스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듣고 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했다. 끝없는 책의 세계를 구경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지만, 실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다고.


긴 줄을 한참 기다려 마주 선 작가 앞에서, 나의 이름이 아닌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사인을 부탁한 이야기, 두 번 접은 행사장 지도 위에 인쇄된 작은 출판사 이름들을 바라보며 빼놓은 곳은 없는지 연필로 체크하는 누군가의 손. 나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세상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좋아해 들뜬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 대상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된다



여러 책 지기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시간이었다. 열심히 작은 부스들을 구경하다 보면, 행사장 끝 편 특별한 이벤트 공간을 만나게 된다. 배달의 민족에서 우리 모두 작가가 되어보자고 외치는 팝업 부스였다. 도서전에 배달의 민족이라니? 의외의 조합이었지만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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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종이가 놓인 공간 앞에는 여러 개의 낱말이 있다. 치킨 대결, 맛집 추천 같은 음식과 관련된 낱말부터 어른, 위로, 습관, 평생 등 다양한 주제의 낱말로 이어진다. 그중 가장 마음이 가는 카드를 꺼내들고 기다리면 둥그런 원형 책상 앞에 앉게 된다.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 명의 작가 되어 카드에 담긴 질문에 나만의 답을 써보게 된다. 내가 고른 카드는 ‘어른’, 질문은 이러했다. 음식을 통해 나도 어른이 됐다 느낄 때가 있었나요? 어떤 음식과의 어떤 순간이었나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피자가 생각났다. 미술 학원에 다녀오면 부모님이 시켜주시던 피자,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먹던 피자들. 그리고 언제부턴가 피자보다 재첩국, 순댓국 같은 구수한 음식을 좋아했던 시간들. 음식은 맛만으로 먹는 게 아니라고, 편안하게 마주 앉은 상대와 식당의 적당한 소음, 뜨겁게 피어오르는 김과 향까지 함께 소화하는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글을 적어 전달하면 작은 ‘작가’ 뱃지와 책갈피를 선물 받을 수 있었고, 이어 다른 작가들이 질문에 답한 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볍게 들른 그곳에서 마음이 뭉클해지는 글들을 많이 만났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족과 함께 한 식사를 담은 글 앞에서는 나도 눈물이 났다. 철마다 놓칠 수 없는 별미는 나만 알고 싶은 법인데, 어떻게 먹으면 안 그래도 맛있는 제철 음식의 맛을 최대치로 느낄 수 있는지 그림과 함께 친절히 소개한 글 앞에선 웃음이 났다. 세상에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특별한 사연이 담긴 음식, 남들은 이해 못 해도 내게는 최애인 음식 취향, 다양한 주제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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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 앞에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고된 퇴근길 끝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는 냉면 한 그릇 앞에서 우리는 비슷하구나. 영영 모르고 지나칠 사람들 같아도, 우리는 비슷하고 다른 고민과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특별한 추억과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면, 그게 누구더라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는 특별한 사람, 평범한 사람에겐 없는 글 솜씨를 지닌 사람 같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오늘 하루의 기쁨과 잠들지 않는 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작가다. 배달의 민족이 전해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다양한 책이 주는 기쁨과 위안, 사람들의 에너지가 주는 따뜻함을 느낀 현장이었다. 그날 만난 책들부터 새롭게 출간 예정인 책들까지 또 다른 책들을 많이, 아주 많이 만나보고 싶어졌다. 내년엔 더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길 바라며,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에게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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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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