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정되는 평범함과 자율적이지 않은 평범함 [도서/문학]

임지은 작가, <연중무휴의 사랑>
글 입력 2022.06.03 14:2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평범함은 조정된다



나는 임씨 성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참 평범한 그 자신의 이름이 나에게는 탐이 났다. 내가 본 임가(家)의 이들은 성이 평범하지 않은 성씨 그 뒤에 따라붙은 두 글자가 평범한 축에 속했다. 반면 나는 ‘김이박’에 속하지만서도 동명이인을 찾으려면 구글을 열어야만 했다.


(내 기억으로는)임지은 작가는 그의 평범한 이름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그리고 김지은, 이지은, 박지은, …. 은 삶에서 무수하게 많이 마주쳤으나 ‘임’지은이 없는 탓에 시인 임지은과 <우리 둘이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라는 흥미로운 컨셉의 책을 출간했다. 우리의 이름들이 평범함과 특별함을 오간다. 석자혹은 그 외의 글자수를 가진 다른 이름들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한들, 어떤 이에게는 내가 그 이 인생에 최초의 ‘박나현’이기에 그 이후로 그가 악수를 건네게 될 모든 ‘박나현’의 인상을 좌우하게 되면서 특별함이 생성된다. 이름이 주는 느낌이라는 건 그렇게 형성이 되어버린 탓에 나에게 시인 임지은보다 작가 임지은이 특별한 것처럼, 심심하다고 생각한 모든 이름들이 그렇다.


게다가 작가 임지은이 더 내 눈에 들어온 이유가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사고하면서 탈코르셋이 자근하게 퍼질 때 묘한 불편감을 지나왔다는 점, 사회에서 꽤나 좋은 평가를 받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식단을 계속 관리하는 습관을 놓지 못하며 성형 광고에 눈길을 한 번씩 준다는 점 등 나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21년에 지구에 살고 있는(또는 한국에 살고 있는) 또래 여성들이라면 언어화되지 않은 생각들로 머릿속을 한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이야기들이 문장으로 엮여 있다. 그럼에도 이 작가는 동명의 시인과, 또는 필자를 포함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와 다른 사람이라고 매 단어마다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고백하고자 한다. 나와 작가의 구분점을 하나 더 만들고자 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도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많이 평범해지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떤 종류의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큰 소리로 농담을 던지곤 하지. 고등학생 때 쓰던 일기는 내가 혹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지고말았을 때 유류품으로 샅샅이 뒤적여질 것을 대비해 모든 사건을 빼고 그 날의 감정만 기록했다. 그런 사람이몇 년째 꾸준히 어딘가에 글을 퇴고하고 있다. 사후의 상상을 계속 더해보자면, 나에게 육신을 떠나기 전 1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디지털 노마드 인생의 모든 흔적들을 지우는 데에 소비할 거다. 그런 사람이 카카오톡의 모든 대화가 저장되는 톡서랍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꽤 역사깊은 어불성설의 기원(이라고 해봤자 채 30년도 되지 않은)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끊임없이 점잖은 사람을 보며 진중하다며 선호하고, 인간관계를 축소해 머리아픈 사건사고들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며나 역시도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잠에 들기 전 머릿속을 나다니기 때문이다. 다시 무리에 섞여야 하는 아침이 오면 사회성이 좋다는 것이 최고의 칭찬인냥 자랑스러우니까, 행복하니까.


칭찬은 항상 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발화자는 나에게 호감이 있을 것’이라는 현대 사회의판단 오류를 반복한다. 나에게 자신의 생일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관심의 수량이 모여 하루에 명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사회적 관계를 위한 간편기능이고 뭐고간에 저 이가나를 좋아한다는 착각마저도 나를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선물과 축하말이 무엇이든 크게 중요하지않다. 그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나도 단지 매일을 살아가는 동료 P, 친구 N에 불과하겠지. 그리고 생일인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며 1년을 손꼽아 기다리겠지.


생일 뿐이 아니라 생일 당사자의 모든 부분이 하나둘씩 보일 터다. 나와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외모 때문인가, 나이 때문인가, 성격 때문인가? 나만 저 이를 부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저 이도 나로부터, 그의 형제로부터, 절친으로부터, 스승으로부터 매 순간 경험하는 마이크로 단위의 부러움에 휩싸여 있다. 지나간 내 생일의 축하 연락을 부러워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자신의 생일에 절망하거나, 생일이 아님에도 사회성에 대한 칭찬을 받는 나를 부러워할 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착각이면 어떠랴, 어쨌든 끊임없이 실행한 비교 덕에 낮아진 내 자존감이 채워지게 되었는데. 그 다음은 다시는 이와 같은 결과를 도출하지 않기위해 오만한 내 생각과 행동거지를 검열하다가, 스스로 만든 행동 울타리에 질려 내빼고, 또 회피했다는 사실에 예민해지기를 반복하며 고점과 저점을 오간다. 그렇게 평범해지고 싶은 마음과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도 함께 오간다. 그래서 나의 평범함과 비범함도 오락가락 한다. 내가 나와 꽤 오래 산 탓에 어느 정도 사회적 모습의 제어가 가능하다.

 

 

 

자율적이지 않은 평범함


 

삶에 사고가 연속이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은 모두 평범함을 추구한다고 말해야겠다. 앞에서의 자율적으로 제어가 가능한 ‘평범함’의 경계가 있는 한편, 나의 비평범을 빌어서 나를 생존하게 하는 것들 또한 있다. 사실, 평범함이란 타인의 평가라는 점에서 이 쪽이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 “변화를 꾀하려는 언어가 분노 없이 다정하게만 발화된다면 변화는 커녕 누군가의 무능을 면하는데 그칠 것이다.” 

 

작가는 여자 셋이 사는 집에서 이 가구가 (건물)주님으로부터 당연한 권리를 찾을 때, 같은 건물의 다른 가구들보다 우선순위에서 얼마나 최후까지 밀려있는가를 경험했다. 타인의 생각 속 나의 위치를 가늠해야 하는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는 여성 집단은 그 외의 사람 기준으로 ‘예민’하지 않을 수 있는가? ‘떽떽’거리지 않을 수 있는가? 더 쉽게 말하자면, 여성이 떼인 돈을 되받기 쉬운가? 채무자를 찾아간다한들 폭력을 포함한 보복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접근할 수 있는가? 이런 위험요소들이 쌓여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인내하는 바람직한(!) 여성상을 추구하도록 조작했다. - 즉 화병에 쉽게 걸리는(히스테리를 가지고 있는)!


최근 있었던 모임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윌 스미스의 행동을 두고 잘잘못을 가리는 거수가 진행되었다. 이런 논의는 뻔하게 양분화된다. “그래도 폭력은 나쁜 거다.” –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와 같이. 그래, 모든 폭력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무수한 폭력들이 정당화될 수 있으니.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다못해 재판이라는 과정이 생긴 데에는 그러한 맥락을 고려하기 위함이다. 하다못해 살인자에게까지 초범이라던가 뭐라던가 하는 맥락을 설명할 시간을 주는 데 외려 사회가 그러지 못하나?


다시, 그럼 이 시상식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의 맥락이라함은? 1번, 다수가 누구인가? - 백인 위주의 시상식, 미국이라는 인종차별 대표 국가, 2번, 선제공격을 누가 했지? – 크리스록, 2-1번, 사건명을 어떻게 짓고 있지? – 윌스미스 폭행 사건. 3번, 터줏대감 크리스록을 윌스미스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법 제도는 물론이거니와 언론으로부터 보호막을 단단히 싸맨 사람은 크리스록이다. 윌스미스가 예민했다는 언급에 “상대방이 기분나쁜 것이라면 잘못한 것이 맞다.”라는 말을 언제까지 귀에 대고 외쳐주어야 하는지. “그래도 폭력은 심했다.”는 말에도 당신들이 가해자 편이라는 말을 언제까지 말해주어야 하는지 역시. 4번, 뉴스를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내가 모르는 맥락이 있을 것. 그래서 나는 이 거수회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평범하고 싶은 순간에 평범하고, 빛나고 싶은 순간에 빛나고 싶겠는가? 누군들 얼굴 붉힐 일로 특별함을 부여받고 싶겠는가? 특히 초기 페미니즘이 현재보다 더 과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언론도 사회도 법도 심지어 내 남편이나 아들까지도 여성의 말을 들을 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년동안 가정폭력을 참고산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면 이것은 온전한 아내의 잘못인가? 20년동안 도와달라고 한 번도 외치지 않았을까?


평범함을 평범함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과 평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네, 게다가 평범함을 거부하는 사람끼리 집합되어 있는 것이 사회이니 참 답이 없다 싶다가도 참 1차원적으로 구분했네, 싶다.

 

- “어떤 위치가 감정의 조건이 된다면 그야말로 모욕적이거나 시혜적인 태도가 아닐까. 어떤 위치를 이유로 툭하면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을 지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권력이 아닐까.”

 

나는 평범한 성을 가졌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기도 평범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말이 모두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행동에까지 도달한 갈등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게 의문을 던져 생각할 힘을 부여한다. 당신의 결론이, 행동이 작가와 다를 수는 있겠다. 그래도 최소한 필자처럼 고백하고 싶은 말들이 머리를 부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따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를 갈등하게 하는 이러한 에세이라면,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평범하고 싶지만, 평범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제의 나와 다르고 싶으니까.

 

 

131.jpg

 

 

[박나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