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다양한 질감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 우먼카인드: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

글 입력 2022.05.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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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날



작은 문 너머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점에 가보고 싶었다. SNS에서 우연히 본 짤막한 영상, 해 질녘 문 너머의 푸른 세계는 곧 나를 낯선 도시로 이끌었다. 부산 ‘손목서가’의 문을 열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음료를 만드는 달그락 소리가 들리는 작은 주방, 그 곁으로는 책들, 책 들이었다. 찬찬히 가로로 누운 책들, 책장의 책들을 살폈다. 서점 주인의 정성과 애정이 묻어나는 쪽지 속 추천의 말들을 머금어 보기도 했다.

 

손목서가를 둘러보면서 여성으로 사는 삶에 관한 책이 많다는 걸 알아챘다. 주인의 관심과 취향이 가득 묻어난 책을 읽는 게 아무래도 재미있어서 관련된 책을 골라 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우먼카인드’를 처음 만났다.


‘우먼카인드’를 소개하는 말은 이러하다.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잡지. 여성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동시대 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생각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선보인다. 그런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삶, 충만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한다. 요약하자면 삶을 말하는 잡지다. 여성으로 사는 삶, 여성이 바라보는 삶, 또 다른 여성의 삶.

 

 

우먼카인드19_표1.jpg



이번 19호의 주제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문을 열고 시작선에 섰는지, 나의 것과 주고받으며 읽는 시간.

 

 

삶이 한차례 바뀐 경험이 있는가? 스스로의 결심에 의해서든, 외적인 요인과 의도치 않은 동기 때문이든, 우리는 살다가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횟수로 삶의 변화를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하고, 어떤 이들은 ‘과거의 나와 많이 달라졌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의 범주에는 직업과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자세가 될 수도, 세상을 대하는 마인드의 변화가 될 수도, 그리고 발전적 혹은 부정적 변화 등 여러 갈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번 호 《우먼카인드》에서는 일생을 살면서 누구든 각자의 주기에 따라 이전과 이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주지하며, 각기 다른 사연과 경험을 담고 있는 새 출발의 단상들을 들어본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이전까지 해오던 공부와 직장, 주어진 일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 밤낮으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제는 그만 놓아주고,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 나는 이런 장면들이 그려진다.


‘우먼카인드’는 더 폭넓은 차원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는 직업, 나를 설명하는 이력서의 한 줄이 새로이 써지는 건 물론, 생각의 변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변화, 그 안에서 자연스레 변화하는 나를 말한다. 글의 초입, News From Nowhere 코너는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들려준다.


안토니아 케이스는 번아웃의 세대가 잃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한다.


 

에벌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신성한 공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개인의 시간’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유동적이고, 고르지 않으며, 강도가 다양하다. 우리는 보통 시계에 표시된 시간보다 더 풍부하고 질감이 다양하며 더 결속력 있는 시간을 경험한다. 그것이 우리가 긴장을 풀 때 경험하게 되는 시간이다.’

 

 

바쁘고 벅차게 사는 하루하루,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주마다 두 번 쉬는 날은 돌아오고, 출근이 있듯 퇴근이 찾아오는 법이지만, 과연 우리는 충분히 휴식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안토니아 케이스의 말대로 시간은 다 같은 시간이 아니다. 어떤 시간은 더 밀도가 높고, 부드럽거나 거칠다.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시간 속을 유영하기 위해 더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온몸의 힘을 덜어내는 순간이 중요해지기도 한다.


이어지는 글 ‘이어지는 단계’에서는 변화의 시간 속에 얻게 되는 새로움을 말한다.

 

 

출산, 이혼, 질병, 교육, 이사 혹은 이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새로운 짝, 새로운 친구, 금연 등 이러한 시간의 이정표는 종종 새로운 자아의 출현을 보여준다. (…) 연구에 따르면 시간의 이정표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를 구분하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 가령, 이혼 전의 나와 이혼 후의 나처럼 시간의 이정표는 이전과 이후 사이에 간격을 만든다.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 사이에는 인지적 혹은 심리적 거리가 존재한다. 또한 새로운 시작은 부정적 특성을 옛 자아에게 넘기고 새롭게 출현한 자아에게 긍정적 점수판을 넘긴다는 점에서 새로운 ‘마음 계정’을 열어준다.

 


나의 뜻이듯, 그렇지 않듯 변화는 찾아온다. 그리고 그 변화는 또한 좋든 싫든 나를 변화시킨다. 그럴 때마다 나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진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많이 나눠준 때에는 더 다양한 삶의 모양을 배울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몸이 아픈 다음에는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의 삶을 알아차렸다. 해결되지 않은 불편함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되짚어 보며, 나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서 본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


 

문예학과 중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편의점 사장님이 된 사람이 있다. 언뜻 변화란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돈과 명예가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이러한 지난날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드는 인터뷰였다.


편의점 사장님 박규옥 씨는 국어 강사로 오래 일을 하다 어린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다. 1년을 생각했던 중국에서 11년, 예상치 못한 긴 세월을 보내며 학문의 길에 들어선다. 어떻게 그곳에서 박사 과정까지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에 되돌아온 그의 답변이 마음에 남는다.


학문에 대한 오랜 꿈도, 열정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먼 타국에서 홀로 아이와 함께 살며 교민들에게 들었던 소문과 오해들, 이혼녀다 어떻다, 별것 없이 쉬러 온 사람이다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뾰족한 시선들이 싫어서, 자신을 더 있어 보이게 만들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학교로 향했다고 말했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증명해 보이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너희들이 의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결코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는 …… 그때부터 불도저처럼 공부했어요.”

 


어떤 대단한 말보다 이 말이 더 빛나게 느껴졌다. 부끄러울 수 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솔직함과 용기가 빛이 났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아무도 묻지 않아도, 우리는 종종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열과 성을 다해 하루하루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세상에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느낀다.


삶을 바꾸는 변화, 일상에 틈을 벌리는 변화는 멋진 다짐과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전투력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숨고 싶은 마음, 지우고 싶은 기억, 도망치고 싶은 날들, 모난 마음과 감정도 새롭게 변화하는 시작점이 되어준다는걸. 그걸 알고 나니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그 마음과 시간들도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중국 관련 리서치 사업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된다. 맡은 일을 열심히, 성실히 해내지만 자신이 점점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이 보기엔 멋지고 그럴듯한 강사도, 기업의 사장님도 그녀에겐 맞는 옷이 아니었다. 편의점 사장님이 되어 반복적으로 물건을 정리하고, 운영에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다고 느낀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길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 길이 겉보기에 대단하든 그렇지 않든, 지난날에 기울인 노력과 같은 선 상에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일, 모두가 그러한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밀려드는 ‘우먼카인드 19호: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그런 변화가 아닐지라도, 조금은 마음을 여유롭게 내려놓으면 찾아오는 마음의 변화들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그 변화의 끝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컬쳐리스트 명함.jpg

 

 

[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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