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찬란한 가야의 뒤편에 가려진 그녀들의 그림자 - 허왕후

글 입력 2022.05.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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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_허왕후.jpg

 

 

국경을 초월한 사랑, 공존과 화합의 역사,

베일에 가려진 2천 년 전 가야의 시작이 오페라로 부활한다.

 

김해시/김해문화재단이 제작한 창작오페라 <허왕후>가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다시 한 번 웅장한 무대를 선보인다. 창작 오페라 <허왕후>는 2000년 전, 가야사의 시작을 알리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사랑을 예술적으로 재조명한 오페라다. 철기와 각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가락국을 방문한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청년 김수로의 열성과 합리적인 자세에 반하고 이어 김수로는 활발한 해상무역과 수준 높은 제철기술, 민주적인 통치를 바탕으로 찬란한 철기문화 국가를 탄생시킨 왕이 된다.

 

대본 김숙영, 작곡 김주원이 역사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가야의 역사와 김수로왕, 허왕후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 그리고 사랑을 오페라에 담았으며, 우리말로 작곡된 허황옥 아리아 '해맑은 웃음 뒤에 강인함이' 와 김수로 아리아 '백성의 마음을 아는 왕이 되겠노라' 등의 시적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갖춘 아리아들을 통해 생생한 가야 시대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허왕후 (3)_ⓒ(재)김해문화재단.jpg

 

 

화창한 오후, 오페라 <허왕후> 공연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처음 감상하는 오페라 공연이라 무척 떨리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최근 한국사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허왕후를 알고 있었다. 허황옥, 하면 김수로! 금관가야를 연상해야 하는 상황. 재미있게도 아유타국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국가의 출신이었던 허왕후는 내 공부에도 긍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하지만 텍스트상으로 암기만 했을 뿐 나는 허황옥이라는 사람에 대해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공부가 끝난 뒤에도 그 지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던 와중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오페라 <허왕후>를 감상할 기회가 생겼고, 주저 없이 바로 향유를 결정했다. 단순 암기를 위한 인물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사람으로서 그녀를 알고 싶어졌기에.

 


허왕후 (2)_ⓒ(재)김해문화재단.jpg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야의 왕위가 확정되지 않은 시기, 분열로 인해 김수로와 이진아시의 갈등이 격화된다. 허황옥의 지혜로 인해 김수로는 여러 번 위기를 모면하고, 결국 석탈해의 음모를 저지하며 왕위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허황옥의 하녀 디얀시의 희생이 있었으며 그녀의 안타깝고 숭고한 희생에 사람들은 눈물짓는다.

 

전반적인 내용은 분열, 갈등, 희생, 그리고 진정한 왕의 탄생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김수로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 반면, 오페라 <허왕후>에서는 그의 연인 허황옥의 시점을 강조해 상황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김수로의 아내라는 소개로 한정되었던 허왕후의 성격, 인품, 사건을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줄거리를 구성한 점이 특히 인상 깊다.

 

 

허왕후 (4)_ⓒ(재)김해문화재단.jpg

 

 

공연을 보는 내내 정말 많은 출연진과 스태프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0명 이상이 참여한 작품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오페라 <허왕후>라는 작품, 이틀간의 공연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이 느껴져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지금부터 작품을 감상하며 중점적으로 보았던 다양한 연출적 요소와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국사 교과서의 단 몇 줄로 설명되었던 가야, 잊혀져 버린 찬란한 제국 가야, 그들의 거대하고도 위대한 비밀의 이야기가 2022년 5월, 관객의 눈과 귀에 펼쳐져 마음을 울리길 기원한다.” (오페라 <허왕후> 프로그램 북 연출 노트 中)

 

김숙영 연출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국사 교과서의 단 몇 줄로, 내게는 암기해야 할 텍스트의 일부분으로 소개되었던 가야는 공연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532년의 긴 역사를 지닌 국가임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고대사의 공백처럼 남겨진 나라. 나는 공연을 보며 연출적으로 가야의 예술과 기상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고 느꼈다. 음악, 미술, 검술, 춤 등으로 잠시 잊혔던 민족 문화의 가치를 표현해낸 것이다.

 

특히 연출에서 ‘고증’을 신경 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곳곳에 배치된 소품들이 가야의 예술을 실제로 관객에게 와닿게 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온전한 실화가 아니다. 그러나 고증에 기반을 둔 사실적 역사와 허구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가야를 먼지 속에서 끄집어내고, 찬란했던 그 역사와 예술을 다시금 소개했다는 점이 연출적으로 가장 돋보였던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허왕후 대표사진_ⓒ(재)김해문화재단.jpg

 

 

프로그램 북에 약 30개의 의상 스케치가 나와 있었다. 실제 공연에서는 인물들이 각자 다른 의상을 입고 있어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스케치를 보니 의상에서의 고증을 많이 고려했다고 느꼈다. 다만 무대 위에서는 단순히 화려한 의상보다 초라하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부족했던 기술력까지 반영한 디테일인지 궁금하다.

 

무대가 굉장히 넓고, 영상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지점이 독특했다. 무대를 보면 위의 타원형 공간에서 장면 전환에 따라 다른 영상이 나오는데, 연출적으로 매우 적절하게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허황옥이 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 등에서 무대 세트가 옆으로 갈라지며 나오는 디자인도 기억에 남는다. 다만 무대의 크기가 너무 큰 탓에 여러 세트와 인물에도 불구하고 조금 비어 보였던 경향이 있었다. 그때는 무대를 꽉 채우지 못했다는 느낌이 있어 아쉬웠다.

 

 

허왕후 (5)_ⓒ(재)김해문화재단.jpg

 

 

“우리 이제 비껴간 운명이라 어쩔 수 없다면 말 한마디, 미소 한 번만 진심으로 건네주오. 그 하나, 가슴 깊이 꽁꽁 묶어두었다가 나 홀로 숨어, 가끔 열어 볼 수 있도록. 그 하나로 나 평생 숨죽여 견딜 수 있으니. 미련한 나, 차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나. 그저 한마디 사랑했었다 말해주오.” (오페라 <허왕후>, NO. 19 웃음보다 울음이 더 많았던 날 중에 中)

 

오페라를 감상하며 박수갈채가 나왔던 장면이 있다. 허황옥의 하녀였던 디얀시가 석탈해에게 배신당했음을 알고 부르는 아리아이다. 그는 디얀시를 이용해 철기 제작법을 빼앗고 김수로를 음해했다. 이용당했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 느껴진 그 처절하고 아련한 감정이 내 마음을 울렸다. 하녀여서 멸시받았던 나날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처음 사랑을 하며 느낀 감정이 카타르시스를 전했다. 노래와 연기 모두 훌륭했던 최고의 장면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랑과 배신은 인간의 심장을 건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디얀시의 아리아 이후 석탈해는 그녀를 모욕하고, 결국 죽이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 희생 끝에 진실이 밝혀지고 김수로는 누명을 벗게 된다. 가야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긍정적인 결과이지만, 과연 디얀시 한 사람의 삶은 후회 없다 말할 수 있을까?평생 누군가의 수발을 들고, 첫사랑마저도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 찬란한 왕국의 수립이라는 빛에 가려 서서히 잊혀가는 그림자. 그 모습이 꼭 가야라는 국가와 닮았다. 작품에서 보여준 훌륭한 아리아와 연기에 다시 한번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허왕후 (7)_ⓒ(재)김해문화재단.jpg

 

 

오페라 <허왕후>는 김해 문화재단이 제작한 창작 오페라로, 각종 오페라 페스티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창작 오페라를 시도했다는 점 자체로 무척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막을 제공하여 전달력을 높이고,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활용해 풍부한 사운드를 자아낸 점 역시 좋았다.

 

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담긴 작품을 볼 수 있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처음 보는 오페라 공연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기대를 충만하게 채워준 공연이었다. 앞으로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더욱 많은 시도가 있게 되기를 기원하며 리뷰를 마치고 싶다.

 

 

 

변서연.jpg

 

 

[변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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