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두렵고도 영롱한, 우리들의 순수한 악몽 속으로 - 팀 버튼 특별전

“괴물들은 주위 인간들보다 훨씬 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글 입력 2022.05.2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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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문이 정직하게 늘어선 아파트 9층 복도. 나는 낡은 살구색 쿠션이 투박하게 박힌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하얀 벽이 은은히 빛나는 것을 보아 낮이었다. 하지만 내 앞은 까만 가루가 소복이 흩뿌려진 듯 새까맣다. 섬뜩했다. 이십 걸음 정도 뒤에는 온몸의 관절이 어설프게 박힌 태로 까만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 이마부터 눈까지 까만 그림자가 내려온 체 입이 없는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다만 지금 굉장히 무섭다는 건 확실했다. 일어서지 못하고 앉은 채로 의자를 끌면서 엉거주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나를 쫓아온다. 낡은 나무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얼굴이 가슴까지 툭 떨어진 괴물이 나를 쫓아온다. 나는 울고 있었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는 괴물 발자국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나무가 뽀득한 바닥을 긁는 소리만 귓가에 가득하고 모든 것이 아득해지다가 사라졌다.


팀 버튼의 세계, 특히 생명체라 겨우 불리우는 괴물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불현듯 이 악몽을 떠올렸다. 아마 5살이나 6살 때 꾸었던 것이다. 조금 더 - 혹은 내 기억보다 훨씬 더 - 순수한 어릴 적의 꿈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수 년이 지나도 선명해서 기분이 이상해지곤 한다. 그 이상한 기분은 단번에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을 준다. 그런 이도저도 아닌듯한 묘한 느낌은 다소 흐릿하기 마련인데, 팀 버튼의 작품을 보며 그 감정이 유독 선명해졌단 걸 한두 박자 늦게 깨달았다. 어설프게나마 표현해 보자면, 기괴하고 두려운 꿈속 장면이 되뇔수록 은근히 영롱한 환상이 되어가는 기묘하고 어렴풋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은 분명 악몽이었다. 그저 존재하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온통 신경이 쓰이는 괴물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곳. 자신의 꿈을 혹은 그 꿈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기억을 지어가는 곳. 환상적인 이야기. 꿈을 경유해서 숨어 있던 감정을 뒤틀린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끌어오는 몽환적인 순간. 그리고 나는 그곳에 머물면서 팀 버튼의 세계가 왜 이토록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지 알고 싶어졌다.

 

 

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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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두렵고도 영롱한, 우리들의 순수한 악몽 속으로

 


“창백한 얼굴에 빨간 곱슬머리의 사내, 쪽 진 머리에 컬러풀한 의상을 한 난쟁이들, 풍선껌을 먹고 보라색 공처럼 변한 소녀, 뼈만 남은 앙상한 몸매에 과장된 속눈썹과 큰 눈을 가진 신부, 온몸에 핀이 잔뜩 꽂힌 아기..." 하나같이 기괴하고 몽환적인 인물들은 판타지, 코미디, 호러가 뒤섞인 이른바 버트네스크(Burtonesque, 버튼 양식)를 대표하는 캐릭터들로 판타지 영화감독 팀 버튼에 의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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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전시 전경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이 열리고 있다. 4월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진행되는 전시는 지난 50년간 창조된 팀 버튼의 예술 세계를 폭넓게 조명한다. 그의 예술관을 형성한 유년 시절 작품부터 영화 제작을 위한 스케치와 캐릭터 모델,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새롭게 시작된 팀 버튼 월드 투어 전시의 첫 시작이자 국내에서는 10년 만에 열리는 그의 전시이다.


총 10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는 기대보다 더 알찼다. 팀 버튼의 세계관을 구석구석 정리한 도록이 있다면 그걸 전시로 하나하나 눈앞에 실현한 느낌이었다. 냅킨에 남긴 스케치부터 작품 속 괴물을 실감 나게 재현한 캐릭터 모델과 팀 버튼의 작업실까지. 그의 예술 세계를 헤아려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흔적들, 520여 개의 작품이 가득했다. 장르와 재료를 불문하고 팀 버튼이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현시킨 작품들의 다채로움과 그 수는 그를 자세히 모르던 나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생명체’ 정도로 겨우 불리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그 기괴함에 괴물이라 불리지만 아이들이라 부르고 싶은 마음에 글에서도 그리 표현하고자 한다). 한 편의 작품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과 사랑을 받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종이나 냅킨 위에 잠시나마 태어났던 아이들도 많았다. 팀 버튼 세계의 아이들은 단지 모나고 흉측한 괴물이 아니라 저마다 이야기와 세계를 가지고 있는 만큼, 가벼운 스케치로 보이는 아이들도 잠시나마 하나하나 자신만의 사연을 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이렇게 생각이 가닿으니 그의 예술 세계가 품은 상상과 꿈의 다채로움이 얼마나의 것인지 전시를 보며 좀 더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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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전시 전경

 

 

숨을 내뱉었을 뿐인데 흘러나온 악독한 공기에 산타 할아버지의 수염을 떨어뜨리고 만 유독 소년(Toxic Boy), 콘센트로 연결한 전기를 먹으면서 겨우 달그락거리며 살아가는 로봇 소년, 자기 몸에 매달린 것을 손으로 잡지 못한 채 애타게 갈구하는 괴물들, 겉으론 유순하지만 혼자 남은 세계에선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사랑하며 음침한 꿈을 꾸는 빈센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오해를 사고 미움을 받는 아이들. 이야기 밖에 선 제3자여서인지는 몰라도 당장 달려가서 어르고 달래주어야 할 것 같은 아이들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다.


유쾌하지 못한 상황에 눈살이 주름을 잡다가도 얽힌 이야기를 아니 마음 한 켠이 일렁이는 묘한 감정이 반복됐다. 아마 팀 버튼 작품에 마음이 머물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꿈속에선 단순히 ‘좋다’, ‘나쁘다’라 불릴 만한 구분이 솜사탕이 물에 녹듯 사라진다. 좋은 것이라 당연히 여긴 것이 낯설어지고, 그저 나쁘다고 느꼈던 것에 애정 어린 마음이 든다. 그렇게 팀 버튼의 세계에 계속 눈길이 간다. 두려움, 안쓰러움, 음침함, 측은함, 불쾌함. 하나만 있어도 다루기 벅찬 감정들이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팀 버튼의 아이들은 어쩌면 그 감정 자체로 존재하고 그 감정을 오롯이 받아내며 어떻게든 살아간다(때론 불행하고 허무한 결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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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전시 전경

 

 

어떻게든 고스란히 드러나는 불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순수하고 때론 순진한 몸짓들은 그 괴로운 느낌을 왠지 귀엽고 재간스러운 태로 마주하게 한다. 낯선 대로 친근하고, 서툴러서 보듬어 보려는 시선이 그들을 좇는다. 나는 그렇게 팀 버튼의 세계에 마음이 갔고, 어설프게나마 그들과 공감하고, 괴물들은 인간들보다 더 순수하다는 그의 말을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이해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서, 내가 가진 기억 중 팀 버튼의 세계와 닮은 것을 찾다가 내가 어린 시절에 꾸었던 악몽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릴 적에 식은땀을 흘리며 오롯이 꾸었던 두려움을. 그 기분과 감정을 수 년이 지난 지금에 선명히 마주하는 기묘한 경험을 하고 온 셈이다.



“난 항상 괴물이 좋았고, 괴물 영화를 정말 즐겨봤다. 한 번도 그들이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다. 보통 아이들은 동화 속 예쁜 그림을 더 좋아하지만, 난 사람들이 괴물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괴물들은 주위 인간들보다 훨씬 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 팀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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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출구에 설치되어 있는 벌룬 보이 조형물

 

 

나는 팀 버튼의 작품을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어릴 적 스크린을 통해 초콜릿 공장을 방문하고 이상한 나라에서 잠시 모험을 즐긴 것이 전부였던 어리숙한 손님. 그래서 이번에 그의 예술 세계를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그 악몽들을 오히려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마치 “어쩌나, 어쩌나”라고 외치며 달려가는 토끼를 보고도 잠시 당연하고 지루한 장면이라 여기고 말았던 앨리스처럼. 그게 당연한 순간이 아니라고 깨달은 나는 순식간에 그 묘한 마음을 따라 토끼굴에 훌쩍 들어가 이유를 찾고 찾아 어릴 적의 악몽을 그의 예술 세계와 함께 마주하고 만 것이다. 이 리뷰는 그런대로 또 다른 여정이 되었다. 잊고 있던 어릴 적의 감정을 새삼스레 꺼내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해 경계선을 맴도는 존재들에게 애정을 느껴보는 새로운 감정을 함께 덧붙이는 시간. 덕분에 내 어린 시절의 악몽들도 덩달아 조금 더 영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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