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게임은 예술이 아니다 - 라스트 데이 오브 준 [게임]

글 입력 2022.05.1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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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예술이다. 왜냐하면 나름의 미적 논리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써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게임은 ‘선택’이라는, 다른 예술 장르는 가지지 못한 게임만의 독특한 미학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보통 게임의 산업화(쉽게 말해 돈을 추구한다는 것)와 오락성이 거론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예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산업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또한 예술은 근본적으로 유희적인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즐겁기 위해, 혹은 즐기기 위해 예술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어째서 게임은 다른 예술 장르가 갖는 권위를 소유하지 못하는 걸까.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볼 작정이다. (참고로 이때 말하는 ‘권위’는 그저 우리가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절로 느끼는 일종의 경외심 등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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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첫 번째 이유는 게임의 역사가 짧다는 것에 있다. 영화와 한 번 비교해 보자. 최초의 영화는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는 <기차의 도착>이다. 한편 최초의 게임인 < PONG >은 1972년에 개발되었다(물론 그 이전에도 게임의 형태로 보이는 것들의 개발은 꾸준히 있었다). 이렇듯 영화는 130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반면, 게임의 역사는 50-70년 정도에 불과하다. 영화가 아닌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해도 게임의 역사는 확실히 짧다.

 

물론 역사의 길이가 예술의 깊이로 반드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길면 그만큼 유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가 길면 그만큼 해당 예술을 연구하고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의 권위를 획득하는 부분에 있어, 게임의 짧은 역사는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이후에 기술할 두 번째 이유와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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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두 번째 이유는 게임만의 예술 문법이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자기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 문학은 언어를, 음악은 음표를 기본 질료로 사용한다. 영화 역시 자기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문법은 카메라다. 영화의 시나리오가 소설과 달리 대사와 지문 등의 나름의 형식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시나리오는 이야기를 카메라로 옮기기 위한 밑 작업이기 때문이다. 각색도 마찬가지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 때 감독과 작가는 필연적으로 각색을 하는데, 이는 원작의 이야기를 영화에 적합한 문법으로 바꾸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문법은 타고 나는 게 아니다. 어떤 예술이 자기만의 문법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바로 이것이 역사가 짧은 예술이 불리한 이유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기차의 도착>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비교해 보자. 두 작품 모두 기차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둘 사이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기차의 도착>의 경우, 카메라를 고정해둔 채로 멀리서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여기엔 그 어떤 서사도, 카메라 쇼트를 바꾸는 등의 연출적인 기법도 없다. 그에 반해 <설국열차>는 다르다. ‘꼬리 칸의 혁명’이라는 서사, 매순간 바뀌는 카메라의 위치(쇼트), 배우들의 연기, 음악, 세트 디자인 등 다루고 있는 요소가 훨씬 더 풍부하다. 하다 못해 영화의 러닝타임도 훨씬 길다.

 

그러니까 영화라는 장르는 130년 동안 이만큼이나 발전해 온 것이다. 이는 영화의 초기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글로 쓰여진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다양한 촬영 기법과 편집 기술이 등장했는데 이는 영화라는 예술의 문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 반해 게임의 문법은 다소 희미하다. 일례로 몰입감이 대단한 어떤 게임을 두고 우리는 흔히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은 게임이 그 장점을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 빗대어 표현해야 할 만큼 종속되어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연출, 캐릭터 모션, 시나리오, 음악 등은 게임만의 예술성이라기보단 이미 존재하는 다른 예술 장르가 쌓아온 기초에 토대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컴퓨터(혹은 비디오) 그래픽이라는 형태로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게임은 자기만의 매력이 하나도 없는 예술일까? 그렇지 않다. 게임도 자기만의 매력이 있다. 이전에 말했듯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적극적인 인터랙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개발자는 게임의 환경만을 세팅할 뿐, 이를 실제로 완성시키는 건 캐릭터를 움직이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유저는 그것을 자신의 선택으로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이유와 연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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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마지막 이유는 비평의 부재다. 쉽게 말해 게임을 위한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비평은 매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술의 가치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예술이 지닌 권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게임에 이러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게임 비평의 경우, 방법론의 상당 부분을 영화 비평에서 가져오고 있는데 이는 좋은 게임을 발견하는 데 있어 유저와 비평가 사이에 심각한 괴리를 야기한다. 당연한 결과다. 게임과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긴 해도 엄연히 다른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으로 인해 벌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라스트 오브 어스2>다.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만약 이 작품이 게임이 아닌 영화였다면 논란이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라스트 오브 어스2>가 전작에 비해 기술적으로 뛰어난 건 분명 사실이다. 또한 복수가 아닌 용서의 서사를 통해 주인공 엘리의 성장과 함께 그녀를 시리즈의 메인 주인공으로 올려 세운 것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게이머에게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직접 플레이 했던 캐릭터와의 유대 관계였다(특히 게임의 인터랙션은 이러한 부분을 더욱 강화시킨다). 엘리의 성장만큼이나 조엘의 퇴장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라스트 오브 어스2>는 분명 실패했다. 결국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게임이라는 예술을. 이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물론 이는 개발자와 유저 모두의 몫이다. 앞서 말했듯 게임은 개발자와 유저가 함께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게임만이 지닌 예술성에 주목하는 것부터다. 인터랙션과 선택 말이다. 이전까지 게임 역사가(예술적인 측면에서) 형태를 갖추는 것에 집중했다면, 앞으로의 게임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 이야기가 유저에게 어떤 경험이 될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인터랙션과 선택은 그러한 고민을 해결해줄 좋은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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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제목 : 라스트 데이 오브 준

장르 : 어드벤처, 인디

개발자 : Ovosonico

출시 날짜 : 2017년 8월 31일

가격 : 21,900원 (스팀 기준)

 

 

그렇다면 이번엔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오늘 소개할 게임은 2017년에 Ovosonico가 개발한 <라스트 데이 오브 준>이다. 이 게임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장애까지 얻은 남자가 아내가 남긴 그림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려는 노력을 그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했던 게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게임이 좋은 이유에 대해 수십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중 이 게임의 인터랙션과 미학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우선 우리는 이 게임이 누구와 인터랙션을 만드는지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유저는 게임 속 주인공을 직접 조작하며 인터랙션을 만든다. 가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스쳐 지나가는 재미일 뿐 결코 메인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라스트 데이 오브 준>은 특이하게도 플레이 타임의 대부분을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조작한다. 물론 여기엔 게임의 설정상 주인공이 사고로 다리가 마비되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을은 마치 모두가 떠난 것처럼 고요하고 텅 비어있다(물론 시간대가 늦은 밤이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상당히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추정컨대 아내가 죽은 책임을 마을 사람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그때 아이가 도로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사냥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마을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선물을 주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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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게임의 구조는 굉장히 흥미롭다. 왜 하필 주인공은 자신이 직접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여 아내를 구하려고 하는 걸까. 그건 주인공의 거동이 불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이웃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내의 죽음에 기여했던 이웃들의 행동을 바꾼다면 아내가 다시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 유저와 주인공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고는 누구 한 사람의 원인이 아닌, 작은 우연들이 겹쳐 만든 불행이라는걸. 그래서 어떤 노력을 해도 미래를 바꿀 순 없다는 것을 말이다(실제로 어느 순간에 이르면 게임은 유저에게 메시지 하나를 조용히 건넨다.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유저와 주인공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게임의 두 번째 미학인 ‘선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껏 주인공이 해온 선택이 자신이 직접 내린 선택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어쨌거나 그 선택을 실현한 건 주인공이 빙의한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건 이웃들의 선택이다. 따라서 만약 그 선택이 아내를 구했다면, 그건 주인공이 아닌 이웃들이 그녀를 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게임의 매력과 가치는 종반부에 이르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비록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주인공에겐 여전히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다. 그건 바로 다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서 주인공은 기어코 자신의 바램을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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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스팀)

 

 

이 게임을 즐긴 많은 이들이 후기에서 슬픔과 감동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감정의 기저에는 아내를 향한 남편의 절절한 사랑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인터랙션과 선택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이 게임의 감동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것은  ㅎ저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감동이다. 늦었지만 비로소 자기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남자와 그 선택이 가져온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유저에게 아주 특별한 게임 경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점이 내가 게임만의 매력을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다. 앞서 말했듯 지난 50년이 게임에게 있어 예술적인 형태를 갖추는 시기였다면, 앞으로는 게임만의 목소리를 갖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게임만 가진 고유한 매력에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유저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지. 유저와 게임 사이에 어떤 인터랙션을 만들어낼지. 유저가 내린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할지.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우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예술이라는 그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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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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