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온 맘 다해 가벼운 노랫말 - 잔나비 '소곡집Ⅱ:초록을 거머쥔 우리는' [음악]

부르면 훨훨 날아가는 가벼운 말들. 이를테면 행복이라는 말이라든가.
글 입력 2022.05.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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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거, 쿨한 거 싫어요. 그래서 가장 뜨거울 우리들의 여름밤.


그룹사운드 잔나비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잔나비의 공식 계정 소개 문구를 보여준다. 쿨하지 못하면 미안해야 하는 세상에서 뜨거움을 노래하는 가수. 듣고 있노라면 그 뜨거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가수. 그래서 자꾸만 타올라 부끄러운 내 마음도 묻어갈 수 있는 가수. 그래서인지 잔나비는 한여름에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뜨겁지 않은 잔나비를 상상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잔나비의 진심은 뜨겁기 때문에 잘 전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완연한 착각이었다.

 

 

잔나비_소곡집_ll___초록을거머쥔우리는.jpg

 

 

5월 10일, 잔나비의 새 앨범 <소곡집 Ⅱ: 초록을 거머쥔 우리는>이 공개되었다. 2020년 가을 발매된 <잔나비 소곡집 Ⅰ> 이후 두 번째 소곡집이다. 타이틀곡 '초록을거머쥔우리는'을 포함하여 총 네 곡이 실려있으며 앨범 제목과 커버에서 느껴지듯 푸르른 녹음을 연상시키는 노래들이다.

 

앨범을 듣는 내내 봄바람이 느껴졌다. 낮잠, 볕, 오월, 꽃, 봄이 노랫말로 쓰였고 멜로디도 명랑하니 산뜻하다. 노래에 물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은 추운 3월도, 미친 듯 더운 8월도 아닌 딱 뽀송뽀송 5월 맞춤 노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껏 무겁고 뜨거웠던 잔나비의 노래와는 다소 다르게 느껴졌다.

 

이 다름의 의미는 노래를 함께 들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이번 앨범의 화자가 많이 괜찮아 보인다고 표현했다. 이전까지는 저 밑의 진심을 토해내며 사랑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며 노래했다면, 이번에는 그저 날씨가 좋고 기분이 좋아서 노래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듣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새 앨범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제가 그리던 집처럼 가볍고 산뜻한 앨범. 아무래도 좋은 앨범. 저 스스로를 위한 치유의 말들을 담아 가며, 축축 가라앉는 무거운 말들이 아닌 노래를 부르면 훨훨 날아가는 가벼운 말들. 이를테면 행복이라는 말이라든가.

 

하루의 끝에, 사랑의 뜨거운 눈물 끝에 도착하는 곳은 볼품없는 앙상함이 아닌 포근한 봄바람이 채워진 공간이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가요. 그저 이 편지가 닿았을 때 내 목소리를 들으며 당신이 웃고 있기를 바랍니다.

 


앨범 발매 후 몇 시간 뒤 SNS에 업로드된 잔나비 최정훈의 편지 일부분이다. 그는 실제로 가벼운 노래를 만들고자 했다. 지금껏 보여준 잔나비만의 뜨거운 온도가 아닌 산뜻하고 포근한 노래를, 부르면 훨훨 날아가는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 앨범의 화자는 '괜찮았던' 것이다.


날씨가 좋아 흥얼거리는 노래. 습기 없이 기분 좋은 노래. 그런 네 곡의 수록곡을 애정 하는 가사와 함께 소개한다.

 

 

 

1. 레이디버드


 

 

 

"행복에 겨운 노랠 좀 지어줘 어디서든 부를 수 있게"

때마침 햇살이 그 앨 비췄고 난 말없이 웃어줬지

 

 

약해빠진 우리

사랑이 우릴 지켜줄 거야

사랑은 나약해

우리가 그걸 지켜줄 거야

 

 

곡을 만든 잔나비의 최정훈은 이 곡을 '사진기를 들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죄다 찍어서 간직하고 싶은 날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행복에 겨워서 전부 남겨버리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런 날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런 마음은 절대로 사진기에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남기려고 할수록 달아난다는 것을.

 

그걸 아는 듯 이 곡의 화자는 사진을 남기기보다 노래를 부르기를 택한다. 대개 그런 순간은 낡은 풍경이나 함께 있는 사람의 표정, 함께 들은 노래에 깊게 저장된다. 풍경과 표정과 노래라는 이름의 사랑이 약해빠진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우리가 또 그 사랑을 지킬 거라고 화자는 묵묵히 노래한다.

 

행복에 겨워 사진기로 죄다 찍고 싶어지는 날이 찾아온다면, 사진기를 꺼내는 대신 이 노래를 틀겠노라 다짐한다. 약해빠진 나의 기억력을 이 노래가 지켜줄 것이므로.

 

 

 

2. 초록을거머쥔우리는


 

 

 

그 애의 몸짓은 계절을 묘사해요

자꾸만 나풀나풀대는데

단번에 봄인 걸 알았어요

 

 

푸르던 날들로 내몰린 젊은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해 본 사람들처럼

꼭 그렇게 웃어줬네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곡, '초록을거머쥔우리는'. 정규 3집 <환상의 나라>에 수록된 '밤의 공원'의 한 구절이었던 '초록을 거머쥔 우리는 여름으로'가 마음에 들어 한 번 더 사용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월 하늘엔 휘파람이 분대요'라는 서정적인 가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실제로 후반부에 휘파람을 연상시키는 플루트 소리가 삽입되어 귓가에 늦봄을 선사한다. 게다가 5월에 발매되었으니, 현실과 노래 속 시간적 배경이 동일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축복 같은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녹음綠陰'을 생각하면 여름이 먼저 떠오르지만, 초록빛 세상은 사실 꽃이 지는 늦봄부터 시작된다. 녹음이 시작되는 5월은 온 세상이 연녹색으로 푸르러지면서도 한여름의 꿉꿉한 습기가 없어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달이다. '초록을거머쥔우리는'은 그런 계절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잔나비의 노랫말이 아카시아 향과 함께 봄바람을 타고 오는 듯하다.

 

 

 

3. 여름가을겨울 봄.


 

 

 

단념, 그 일은 어려운 것도 아녜요

나는 아주 잘해서

이토록 무던한 내가 좋아질 때도 있어요.

 

 

왜 봄은 항상 계절의 처음에 있을까요? 우리는 왜 애써 피운 꽃을 떠나 보내야 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까요? 봄이 지나고 꽃이 지고 그것이 숙명이라면 나는 봄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이길 바래요. 꽃을 한바탕 피우고 박수 한 번 받고 그렇게 막이 내리는 거.

 

- 노래 소개 中

 

 

최정훈이 직접 적은 노래 소개를 보면 이 노래의 제목이 이해될 것이다. 봄이 사계절의 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노래. 듣고 있으면 봄을 타는 사람의 노랫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봄을 타는 이유 중에는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과정이 봄이라는 짧은 계절에 전부 담겨 있어 그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마음탓도 있다.

 

그러니 꽃이 폈다가 바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울적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노래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백 번을 반복하며 단념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리는 마음. 그리하여 어차피 저물 거라면 모든 계절의 시작이 아닌 끝이길 바라는 마음. 그렇게 이 곡은 떠나는 이들과 저물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그 모든 마음들을 위로한다.

 

 

 

4. 슬픔이여안녕


 

 

 

바람 불었고 눈 비 날렸고

한 계절 꽃도 피웠고 안녕 안녕

구름 하얗고 하늘 파랗고

한 시절 나는 자랐고 안녕 안녕

 

 

이 소곡집의 마지막 트랙 '슬픔이여안녕'은 제작자 최정훈의 마음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곡이다. 애절하고 슬픈 곡이 아닌 기분 좋고 산뜻한 노래를 쓰고 싶었다던 그의 마음가짐이 제목에서부터 그대로 느껴진다. 집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던 이번 앨범 중 유일하게 '집'이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들으며 정규 2집 <전설>의 수록곡 '꿈과 책과 힘과 벽'이 떠올랐다. '꿈과 책과 힘과 벽'에서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라며 슬퍼하던 소년은 이제 그 슬픔을 다 건너와 뒤돌아보며 '한 시절 나는 자랐고 안녕 안녕'이라며 슬픔과 성장통에게 인사를 한다. 답을 찾고 싶어 세상을 헤매던 소년은 이제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뜨겁게 꽃도 피우고 아프게 자라난 마음을 안고, 가볍고 산뜻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다고 말하던 잔나비가 이번에는 포근하고 산뜻한 봄바람을 노래한다. 뜨거워 홀라당 타버린 재 앞이 아닌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노래한다. 환절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잔나비의 변화가 반갑다.

 

잔나비의 진심은 뜨겁기 때문에 잘 전달된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진심은 가장 뜨거울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활활 타올라야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온 맘 다해 가벼울 수 있다. 진심을 다해 산뜻할 수도 있는 거다. 잔나비는 이번에도 온 마음을 담았다. 온 맘 다해 가벼운 잔나비의 휘파람을 타고 오월을 편안히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김지은 (1).jpg

 

 

[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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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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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잰
    • 슬픔이여 안녕 너무 너무 좋아요 계속 듣고 잇어요 글읽으며 또 트랙 다 들어야겟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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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샘
    • 글 잘 읽었어요.  모든 노래 다 좋지만, 저의 최애는 슬픔이여 안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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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원
    • 진솔하고 정성어린 잔나비 소곡집II 리뷰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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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정이
    • 정독하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잔나비는 정말 노래를 만들면서 진심을 꾹꾹 눌러담는 뮤지션이죠.  그래서 저같은 사람은 잔나비 노래를 사랑합니다.  매 앨범의 탄탄한 스토리텔링도 좋구요. 잔나비는 타고난 아티스트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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