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당신이 나를 알아본다면 [영화]

글 입력 2022.05.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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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능력있는 독설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좋아하는 캐릭터도 하우스나 셜록처럼 잘나고 독설을 술술 날리는 캐릭터였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생기면 뭐든 닮고 싶었던 것도 있고, 과거의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한 일이었다. 대놓고 내 욕을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 받아쳐야 한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도록 계속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된다. 머쓱한 얼굴을 보는 걸로 만족한다. 물론 입만 열만 독설을 하진 못했지만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연마해두는 건 손해 볼게 없었다. 독설가 캐릭터 컨셉을 잡으면 많은 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날카로운 말솜씨는 매력적인 데다가 어차피 인생이 혼자라면 독설을 한다고 잃을 것도 없다. 적어도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니 것도 괜찮고. 처음엔 멋모르고 당했을지 몰라도 기세란 걸 무시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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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멜빈도 그랬을까? 로맨스 소설을 쓸 때는 아름답고 멋진 문장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까칠하기 그지없다. 오줌 싸는 옆집 강아지가 꼴 보기 싫어 어르고 달래다 결국 오줌을 싸자 쓰레기통에 넣는 게 영화의 시작이다. 강아지를 갖다 버린 게 화가 나서 찾아온 이웃 사이먼에겐 게이라고 놀리는 걸 넘어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협박도 수준급이다.


그에겐 강박증도 있다. 문을 열고 닫을 땐 5-6번씩 고리를 왔다 갔다 하고, 같은 비누를 쌓아두고 쓰고, 길을 걸을 때 선은 밟지 않고, 식당에서도 앉던 곳만 앉아야 하며 플라스틱 식기를 고집한다. 강박증이 있는 건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크게 노력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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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유일하게 쩔쩔매는 대상이 단골 식당의 직원 캐롤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편이고 멜빈과도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이다. 멜빈에게 처음 화를 냈던 건 그녀가 무척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죽어, 당신도 죽고 당신 아들도 죽고. 맞는 말이긴 하다. 이런 식의 말이긴 했지만 태어난 지 6개월부터 앓아온 천식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이야기는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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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발견하기 몇 분 전


 

그러나 멜빈은 캐롤과 사이먼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출판사 직원의 남편이 의사라 부탁을 가장한 요구를 해서 좋은 의사에게서 캐롤의 아이가 진료를 받고 나을 수 있게 해주었다. 태어나서부터 계속 아팠다더니 의료보험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모양이다. 하루아침에 강도를 맞고 얼굴은 하비 덴트가 될 뻔하고, 파산한 사이먼이 부모님을 보러 가는 여행에 동참하고, 나중엔 자신의 방 한 칸을 내어주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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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세 가지를 질문하게 된다. 우선 이 이상한 괴리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따뜻하고 친절한 모습이 있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욕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화법이 그 괴리를 극대화해준다. '힘들어 보인다, 무슨 일 있냐'는 말을 '나이가 몇 살이냐? 50살처럼 보인다'고 얘기를 하는가 하면, 캐롤과 오붓한 분위기에선 사이먼과 가깝게 지내는 게 질투 난다는 말 대신 그녀가 사이먼과 잘까 봐 그랬다고 해서 산통을 깬다. 쌤통이다 이 사람아.


단순히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게 그도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는 표정이다. 그가 따뜻한 말을 하는 걸 어려워한다. 어느새 툭툭 뱉는 독설이 너무나 입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열렬한 팬이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느냔 말에 그냥 남자를 생각해서 이성과 책임감을 뺐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심이었다면 그가 쓴 60편이 넘는 로맨스 소설은 뭐고, 캐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건 대체 뭔가. 그는 그저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말을 했을 때 자신의 곁을 빨리 뜨고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독특한 사회화가 아닐 수 없다. 사람과 멀어지는 기술이라니.


그런데 이 괴리가 그렇게 이상한 일인 것만도 아니다. 늘 나쁜 사람도, 늘 좋은 사람도 없다. 비중은 다를 수 있지만 좋았다 나빴다 한다. 욱하다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잔인해지기도 한다. 대판 싸우고 흑역사도 만들고 이불도 차고 반성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혹은 정신건강에 좋은 관점대로,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그리고 그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상처받는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줄도 알면서도 나에겐 나쁜 사람이 되니까. 그 사람은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Melvin: I'm trying to keep emotion out of this, even though it's an important issue to me. And I have very strong feelings on the subject.


Carol: What subject? That I wasn't there to take crap from you and bring you eggs? Do you have any control over how creepy you allow yourself to get?


Melvin: Yes, I do, as a matter of fact. And to prove it, I have not gotten personal, and you have.

 

 

멜빈 역시 우리의 예상보다 그 간격이 크고, 자신이 아끼는 극소수에게만 무한한 관심을 보인다는 게 다를 뿐이다. 못돼처먹은 사람처럼 보이던 그의 친절한 모습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착하기만 해 보이던 캐롤과 사이먼도 저렇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 장면에서만큼은 적어도 악역은 캐롤과 사이먼이었다. 캐롤은 아이 때문에 일을 그만뒀을 때 찾아온 멜빈을 소름 끼치는 괴팍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멜빈에게서 의사를 소개받고 나선 대가를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한밤중에 찾아와 절대 당신과는 섹스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선언을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얘기해놓고 나니 참 머쓱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먼저 자 달라고 했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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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때문은 아닌걸로


 

Simon: Nothing worse than having to feel this way in front of you.


Melvin: Nellie, you're a disgrace to depression.


Simon: Rot in hell, Melvin.


Melvin: No need to stop being a lady. Quit worrying. You'll be back on your knees in no time.


Simon: Is this fun for you? Well, you lucky devil, it just keeps getting better and better, doesn't it?

I'm losing my apartment, Melvin, and Frank, he wants me to beg my parents who haven't called me for help, and I won't. And I don't want to paint anymore.

So, the life that I was trying for is over. The life that I had is gone, and I'm feeling so damn sorry for myself that it's difficult to breathe.

It's high times for you, isn't it, Melvin? The gay neighbour is terrified. Terrified.


Melvin: I was just trying to give you a boost.


Simon: Lucky you, you're here for rock bottom. You absolute horror of a human being.


Melvin: The one thing I'll do for you. I, might cheer you up.


Simon: Get out.


Melvin: You wanna know why that dog prefers me?

It's not affection. It's a trick. I keep bacon in my pocket.

 

 

사이먼은 자신이 불행해지자 찾아온 멜빈을 인간에 대한 공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심지어 멜빈은 사이먼의 강아지 버델을 산책시키고 돌아왔는데, 그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 앞에서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멜빈은 충분히 받아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캐롤에겐 나는 당신이 한 것처럼 인신공격은 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고, 사이먼에겐 그럼에도 위로를 주려고 그의 강아지 버델 이야기를 꺼냈다. 강아지는 내가 아니라 베이컨을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거라면서. 물론 강아지는 베이컨을 좋아하지만 그와 별개로 멜빈을 좋아한다는 게 들통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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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질문. 사이먼네 강아지 버델은 왜 그렇게 멜빈을 좋아했을까? 사이먼과 더 오랜 시간같이 있었는데 잠깐 같이 있었던 멜빈이 좋을게 뭐란 말인가. 사이먼이 보호자로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멜빈이 쏟은 마음이 더 깊게 느껴지긴 했다. 사이먼에게 버델은 안 보이면 찾고 싶은 존재였다. 오히려 그가 버델이 없으면 불안한 느낌이다. 평상시엔 그는 많은 친구들과 지내느라 버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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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멜빈은 본인 말대로 24시간 집에서 글을 쓰고, 때로 피아노를 치고, 같이 산책을 간다. 강아지에겐 간식보단 산책이고, 자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버델이 사이먼에게 돌아가고 나서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피아노를 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강아지는 그처럼 선을 밟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버델만은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버델은 그에게 인신공격을 하지도 않으니, 나쁜 말이 오고 갈게 없다. 강아지가 당신을 좋아한다면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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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vin: My doctor, a shrink that I used to go to all the time,

he says that in 50 or 60 percent of the cases, a pill really helps.

I hate pills. Very dangerous thing, pills.

Hate. I'm using the word "hate" here about pills. Hate.

My compliment is, that night when you came over and told me that you would never...


Carol: All right.


Melvin: Well, you were there. You...You know what you said.

Well, my compliment to you is, the next morning I started taking the pills.


Carol: I don't quite get how that's a compliment for me.


Melvin: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Carol: That's maybe the best compliment of my life.

 

 

마지막 질문으로 가기 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사이먼이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여행이다. 캐롤이 정말 다른 사람들을 변하게 만드는 사람이란 게 여기서 드러난다. 캐롤의 '당신과는 절대 안 자요' 발언은 의외로 멜빈에게 충격요법이 되었고, 그가 자신의 강박증을 벗어나고 싶게 만들었다. 애초에 사이먼을 위한 여행도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나라면 당장 휴가를 떠나겠다는 말에 시작했다. 그뿐인가, 멜빈은 캐롤이 자신을 더 좋은 남자,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 스트라이크 칭찬을 날렸다.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놓고 다시 이상한 말을 뱉어서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을 뿐. 캐롤은 그 길로 집에 들어와 사이먼의 뮤즈가 되었다. 여행 가는 길에는 사이먼과 부모님 사이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밤새 그림 그리게 만들 정도였으니 구세주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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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생겼다. 좋은 소식은 다시 사이먼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모님께 신세 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기로 했고, 캐롤 덕분에 다시 그림을 그릴 열정이 되살아났다. 멜빈이 방을 제공해 준 덕분에 다시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다. 나쁜 소식은 캐롤이 멜빈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선을 긋게 되었다는 점이다. 좋은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 속 뒤집어놓는 말까지 잘해서야, 이 사람을 더 알아가면 머리만 아프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여전히 멜빈은 이상하다. 하지만 달라졌다. 문을 열고 닫을 땐 대여섯 번씩 움직이지만 문을 잠그는 습관을 잊어버릴 때도 생겼다. 선을 밟지 않으면서 걷지만 캐롤과 함께 할 때는 선을 밟기도 한다. 혼자 있던 집엔 이웃집 사이먼과 강아지 버델이 함께 있다. 그는 어느새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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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멜빈이 캐롤을 아끼게 된 건 언제, 왜 때문일까? 이미 호감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출판사에 부탁을 해서 좋은 의사를 소개해 주고, 심지어 치료비도 내줬다. 굳이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어디 아픈지 물어봤다. 소름 끼친다고 했는데 아이가 아파서 택시를 타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택시도 타고 택시비도 냈다. 사이먼과 사이가 좋아 보이니까 못 견뎌하더니 기어코 '잤냐? 어젯밤 둘이 잤냐고?'를 시전하는 것까지.

 

 

Melvin: Hey, I've got a great compliment for you.


Carol: You... You know what. I...


Melvin: Ju-Ju-Ju-Ju-Ju... Just let me... let me talk. Just...

I might be the only person on the face of the Earth...

that knows you're the greatest woman on Earth.


I might be the only one...

Who appreciates how amazing you are in every single thing that you do.

And how you are with Spencer, Spence.

And in every single thought that you have...and how you say what you mean and how you almost always mean something...

that's all about being straight and good.

 

And I think most people miss that about you.

And I watch them,wondering how they can watch you bring their food...and clear their tables and never get that they just met the greatest woman alive.

And the fact that I get it...makes me feel good...about me.


Is that something that's bad for you to be around... for you?

 

Carol: No.

 


멜빈의 답은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이 솔직했다. 그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녀 역시 그에게 상처받았을 때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칭찬을 해서 만회해 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 칭찬이라는 기회를 빌려 그도 솔직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는 것만으로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왜 당신이 좋은지 물었을 때 당신이 정말 멋진 사람이라서라고 말했을 때 감동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나는 안다고 말하면. 멜빈이 책을 쓰면서 사랑이란 뭘까 문장을 고민했다면, 아마도 그 사랑은 상대방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지금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독설가가 되려던 야심찬 꿈은 사라진지 오래다. 10년이 훌쩍 넘은 친구들에게는 별안간 반지를 선물했다. 선물을 하고 싶었다. 지난 날의 우리를 기억하고,지금부터 앞으로의 우리를 기약하기 위해.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의 10년은 많이 쓸쓸했을 것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준비한 독설은 습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꽃혔을 수도 있다. 지난 기억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지만 변함없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준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옅어지진 못했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 않나,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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