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싸늘하지만 아름다운 계절 [사람]

겨울을 사유하다
글 입력 2022.04.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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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과 연락하던 도중, 드디어 몇 개월 만에 필름을 현상했다고 내게 말을 했다. 그 필름에는 그녀의 겨울과 봄이 담겨있었다. 36장의 많은 사진들 중에서, 나는 유독 한 사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싸늘하고 황망하지만 아름다운 겨울이 느껴졌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어떤 이가 나란히 그 속을 뚫고 가는 싸늘하고 아름다운 겨울이었다. 지금은 꽃비가 내리는 4월이지만, 나는 겨울을 얘기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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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습기 찬 밤공기가 충분히 차갑지 않다고 느꼈다.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했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한파가 필요했다.

 

 

특정한 계절에 대해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한강의 <작별>이 내겐 그렇다. 내가 정서적으로 불안했을 때 읽어서 그랬던 걸까, 최은영 작가의 <한지와 영주>와 한강 작가의 <작별>은 아직도 내겐 꽤 의미가 깊은 작품들이다. 이별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었다. 한창 이별에 대한 후유증을 온 몸으로 맞고 있던 내게 가슴이 더 짓눌리는 고통을 안겨주었던 소설들이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해보자면, 주인공이 눈사람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눈으로 만드는 그 눈사람이 맞다.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어느 차디 찬 겨울날의 밤에 잠시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사람이 된다. 눈사람은 기온이 따뜻해지면 녹는다. 그녀는 녹지 않기 위해 한파가 필요했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그녀는 점점 녹아 소멸한다. 소멸되가는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을 보며 나는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느꼈고, 동시에 너무나도 슬픈 감정도 읽어냈다.


나는 왜 슬펐던 걸까. 그 때 나는 왜 비참함을 느꼈던 걸까.

 

한때 나는 사람을 낙원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 사람을 낙원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언젠가 옮겨가기 마련이니까. 그 낙원이 날 떠났을 때,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 쓰게 된다. 마음을 다 써버린 사람은 연대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모든 것들을 홀몸으로 마주하게 된 나는 그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은 얼마나 강한 사람들인지. 그 당시의 내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줄까 무서워서 온 몸이 떨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기쁘고 슬픈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걸까? 또, 그걸 듣는 상대방은 어떻게 공감하고 위로를 해주는 걸까?

 

*

 

작년 가장 내가 비참했을 때, 나는 깊고 어두운 나의 내면을 마주했다. 늘 나는 조금 더 자라나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나를 늘 지켜줄 사람을 갖는다는 건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켜줄까. 새벽에 혼자 깨어날 때, 길을 혼자 걸을 때, 문득 코가 찡해질 때, 바람처럼 밀려와 나를 지켜주는 얼굴. 만날 수가 없어서 비록 혼잣말을 해야 한다 해도 초생달 같이 그려진 얼굴. 그러나 이 일방적인 마음은 상처였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는 정작 나를 지켜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젊은 날의 귀인이었다. 나와 멀어진 것에 밉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축복을 빌고 염원했다. 함께 커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스무살의 미성숙한 나를 세상밖으로 이끌어준.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고, 늘 가슴 한 켠엔 당신이 있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내기로 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몇 달 만에 굴 밖으로 나온 초식 짐승처럼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불쑥 그가 그녀의 짐을 받아 들었을 때인지,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그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었던 저녁부터 분명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전까지 없었던 무엇인가가 두 사람의 사이에 생겨난 이유를.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들이 연결하는 실체로서 존재하게 되고, 그 실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가 몸 어딘가에 더듬이처럼 생겨난 까닭을.

 

지난 가을 그 실에 대해 그녀가 처음으로 말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녀가 알기로 사랑이란 것은 감정인데, 강렬하게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뜨거워졌는가 싶으면 환멸 속에서 식는 무엇인데, 이 실과 접지의 느낌은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오히려 더 진지한 고백으로 받아들일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아이가 첫 단어를 생각하는 사이 그녀는 장갑을 벗고 자신의 눈시울 아래를 만져보았다. 좀 전에 아이를 안으로 눈물이 고였던 자리가 음푹 패어 있었다. 왼쪽 가슴 아래 고였던 더운 물은 늑골 아래까지 흥건하게 흘렀다. 자신의 몸이 반으로 꺾인다면 그 자리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왼쪽 늑골 바로 아래에서, 절반으로 꺾이며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을수도 있다고 그녀는 고쳐 생각했다. 그 자리가 바깥에서부터 다시 얼어붙어준다면, 어쩌면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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