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은 영혼과 만난 세계

정창조 外 6인 저 《유언을 만난 세계》
글 입력 2022.04.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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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은 자유의 척도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이동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지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자유롭게 다니는 것은 곧 권력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권력을 가지지 못해 차별받는 자는 담장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원칙이었다. 대중교통을 단지 일상을 활주하는 삶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가 있는 반면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죽음을 체험하는 기분’을 느끼는 이가 있다. 이동의 격차는 여전히 권력의 유무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인간의 삶과 죽음을 가른다. 휠체어 이용자는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에 탑승할 때 차량과 승강장 사이에 바퀴가 끼어 몸이 튕겨 나가거나 그보다 심한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차량과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권고 수준을 훨씬 웃도는 수치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바퀴 빠짐 방지, 2022년까지 엘리베이터 100% 설치, 2025년까지 저상버스 100% 도입….모두 국가가 약속했으나 오래도록 해결이 요원하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 이후로도 21년간 수많은 죽음과 투쟁을 지나온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불합리한 시스템으로 인해 시민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책임지고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하는 정치인이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가르고 장애인을 시민 범주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현재의 형국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국가가 비장애인과의 차별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해달라는 당연한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아 시민을 변방으로 몰아세운 역사가 유구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요청을 사회가 묵살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것은 ‘우리’라는 집단에 포함되지 않아 애도되지도 않는 죽음이 된다. 그렇게 삶을 위한 죽음과 투쟁마저 변방으로 내몰아질 때 또 다른 삶이 스러져간다. 남겨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의 삶을 지우는 이들에 맞서 죽음이 사라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잊지 않고 끈질기게 애도하는 것이다. 죽음으로써 삶을 부르짖었던 이들이 온몸으로 외친 유언을 이 세상에 뼈저리게 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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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언론 비마이너가 기획하고 일곱 명의 활동가들이 저술한 《유언을 만난 세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해방운동 열사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를 기록하여 운동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듣는 자’가 있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 남는(61p)‘ 유언을 기록함으로써 열사들의 목소리를 지금 여기의 세계에 불러들이고 끝내 존재하게 하는 시도이다. 열사가 직접 작성한 유서, 입으로 전한 유언, 삶 속에서 치열하게 실천한 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남은 유언은 실제 사료와 동료 활동가의 회고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문자화되어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가 권력에 의해 제멋대로 그어지는 현재를 직시하고 과거에 비추어 나아가야 할 미래를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상상하게 하는 효력을 발한다.

 

 

 

가려진 역사를 발굴하다


 

이 책은 여덟 열사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파동에 주목하는 데 앞서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추적하여 숭고하고 추상적인 위인의 형상보다도 지금도 함께하고 있는 듯한 동지의 얼굴을 드러낸다. 장애인의 삶이 아닌 ‘장애인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이해(259p)’하는 사람들 앞에 열사들을 박제된 영웅이 아닌 ‘평온한’ 시대에 거침없이 균열을 가하는 ‘악령’으로 불러들이는 책은, 폭력적인 세상에 결코 순응하지 않았던 이들의 날카로운 투쟁을 입체적으로 기록하여 그 영혼이 바로 여기에서 살아 숨 쉬게 한다. 이들은 장애인이 배제되는 세상과 쉴 새 없이 싸워왔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쓰인 역사에 가려졌던 장애해방운동의 역사와 계보를 열사 개개인의 삶을 기반으로 발굴하는 것은 그들이 일궈낸 변화와 진보가 얼마나 많은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가치와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나아가 지금의 투쟁이 갖는 의미를 실제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열사들의 삶을 통해 재해석되는 현대사는 그동안의 역사가 철저히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서술되어왔음을 알게 한다. 역사를 이루는 국가의 원대한 계획과 목표에 장애인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치로 삼은 세계화와 성장주의 정책은 장애인의 생계 수단인 노점 생활을 가로막았고, 정부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최저생계비는 현실화 문제에 관한 논의가 부실하여 생계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정부의 공으로 평가되는 제도들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에 무관심했고 그것은 장애인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정책을 통폐합하고 예산을 감액하는 결정 하나하나에 장애인의 삶은 크게 흔들렸고 또한 가려졌다. 열사들은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뿐 아니라 후세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정책과도 싸워야 했다. 지난한 투쟁의 근거는 열사들의 삶 그 자체였다.

 

‘사람’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는 사회에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열사들의 요구는 지엽적인 정책의 변화와 개선에만 머물 수 없었다. 세상을 뒤흔들고 바꿔나가야 했다. 각자의 삶 속에서 벌어진 투쟁의 형태는 다양했다. 정태수 열사는 장애인 학교를 설립하여 운동가를 양성했고, 최옥란 열사는 턱없이 적은 기초생활수급비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반납하며 최초로 기초생활수급자 제도의 허점을 비판하는 운동을 개진했다. 장애인을 몰아내는 길 위에서 그들은 시위하고 농성했다.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던 열사들은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해 힘을 모으고 연합하여 담론을 활성화했다. 당사자의 맥락에서 묘사되는 미시사는 열사들의 삶을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폭력에 아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삶의 최전선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싸우기를 택했던 일상의 얼굴로 선명하게 기록한다. 이는 투쟁이 얼마나 너른 세상에 걸쳐, 깊은 상처를 새기며 이루어졌는지 실감케 한다.

 

 

 

사라지지 않은 흔적


 

책은 열사들의 삶을 섬세하게 쓸어내린 다음 그들의 죽음과 죽음 이후를 살핀다. 투쟁의 연속이었던 삶의 연장 선상에서 그들의 영혼을 애도하는 것은 곧 그들의 유언을 실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가 천천히 사각지대로 내몬 이들의 죽음은 지극히 사회적이었고, 남은 이들은 죽음의 파동을 다시 사회에 퍼져 나가게 했다. 분신으로 장애인 인권의 현실을 알린 최정환 열사의 죽음을 기점으로 장애해방운동을 시작한 박흥수 열사, 시장에게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 김순석 열사의 모조관을 들고 정치인들 앞에서 위령제를 연 사람들, 시신을 빼앗으려고 하는 공권력으로부터 끝까지 지켜내려고 했던 동료들은 장애인의 죽음을 축소하고 뭉뚱그리는 움직임에 맞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열사들은 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유언은 남은 이들과 함께 현재의 맥락에서 다시 이야기되어 죽음마저 퇴거하려는 세상에 끊임없이 머문다.

 

저마다의 유언을 품은 그들의 죽음은 이 사회가 얼마나 안전하며 개인이 사회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묻는다. 장애해방운동의 선두에 있었던 박흥수 열사를 탄광의 위험성을 먼저 알려주는 카나리아에 빗대듯이, 사회의 낭떠러지에서 생사를 걸고 투쟁한 그들의 흔적은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며 지금도 내몰아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더는 생사를 걸지 않아도 되는 세상,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만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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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와 열사가 함께하고, 열사가 떠나면 다른 열사가 운동을 이어받고, 유언을 남기면 남은 이들이 유언을 실현하면서 촘촘히 엮어온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은 장애인운동이 불현듯 등장했다는 오해를 반박하며 앞으로의 방향까지 힘 있게 제시한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움직임은 진보를 유예하려는 권력에 맞서 현재에 필연적으로 도래해야 하는 진보의 수준을 짚어준다. 그것은 여전히 누군가의 삶과 죽음의 문제와 직결되어있기 때문에 멈춰질 수 없다. 상처의 기억을 품고 있는 역사는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힘을 가지기에 잊히지 않고 드러날수록 더 많은 삶을 강인하게 끌어안은 채 나아가게 한다. 지금 필요한 '발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역사를 현재에 불러들임으로써 상처를 낸 원인을 바로잡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향해야 할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책은 서두에서 장애인이 애도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했다. 지금을 사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상황을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열사들의 빈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유언을 만난 후에는 유언과 이야기해야 한다. 그들이 건네는 질문에 답변하며 그 안에 담긴 소망을 상상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질문하며 그들의 삶에서 오늘의 숙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를 함께 지나는 이들과는 유언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하며 그것이 모두의 경험 세계를 뒤흔드는 균열이 되도록 담론을 확장해야 한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시도가 될 것이다. 여전히 폭력이 거센 오늘이지만, 세계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에 머물고 있고,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아 현재와의 대화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참고 자료


 

‘휠체어엔 14㎝ '절벽'…가깝고도 먼 열차-승강장 사이’, JTBC 뉴스, 2022. 4. 14.

윤홍집, "휠체어 타고 지하철 오르기?…죽음을 체험하는 기분", 파이낸셜뉴스, 2019. 07. 13.

이정규, ‘버스 타는 데 2분, 사방에선 경적이’, 한겨레21,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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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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