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증기를 보았다 - 뮤지컬 '스메르쟈코프' [공연]

사라져가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글 입력 2022.04.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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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살고 싶어지는 이 순간”이라는 홍보 문구만 보고 문화초대를 신청해 버렸다. 엄청난 긍정의 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스메르쟈코프’는 러시아의 대문호라 칭해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요 등장인물인 까라마조프가의 네 형제 중 막내의 이름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분량이 너무 방대해 머릿속의 ‘언젠가 읽을 책 목록’에만 추가해놓고 계속 미뤄두었던 책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원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는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기반으로 제작된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핀오프 극이었다. 그 말인즉슨, 원작을 각색한 것에 또 한 번의 각색을 거쳤다는 뜻이다.

 

 

[스메르쟈코프] 메인포스터.jpg

 

 

옛날부터 나는 어떤 작품이든간에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상태로 감상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그래서 보도 자료는 물론이요, 작품을 보기 직전까지 팜플렛조차 읽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심지어는 어떤 시리즈물을 중간부터 볼 바에야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정도였다. 처음부터 감상해야만 온전히 알 수 있는 서사의 흐름, 그리고 무엇보다 복선 등 자잘하게 연계된 지점들을 발견해내는 성취감이 좋았다.


2016년~2017년에는 소위 뮤지컬 애호가를 뜻하는 ‘뮤덕’으로 불릴 만큼 뮤지컬을 꽤 많이 보러 다녔었다. 게다가 같은 극을 여러 번 감상하기 위해 수중에 생기는 돈이라면 밥 먹을 돈까지 전부 표값에 쏟아 부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도 없어서 관극을 그만 둔 지 오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당시의 내가 볼 뮤지컬을 고르는 방식은 주로 관심 있는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여부가 우선이었지, 뮤지컬이 어떤 내용인지는 딱히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용을 모르는 채로 본다 해도 극을 따라가는 데에는 충분했기에 별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뮤지컬을 본 이후 몰랐던 작품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원작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도 나름의 쏠쏠한 재미였다.


이렇듯 아무리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채로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지만, 어째 이번만큼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공연을 앞두고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마침 직전까지 같이 작업을 하던 친구가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본 적이 있다고 해서, 급히 전작 뮤지컬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다.

 

요약하자면,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무책임하고 방탕한 호색한인 아버지 ‘표도르’ 아래에서 거칠게 자란 첫째 ‘드미트리’, 명석한 수재이자 이성적인 무신론자인 둘째 ‘이반’, 박애주의자이자 수도사인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이자 하인 취급을 받는 막내 ‘스메르쟈코프’로 구성된 까라마조프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로 가장 동기가 뚜렷해 보이던 드미트리가 지목되지만, 진범은 이반의 이론을 추종한 스메르쟈코프였고 자백 이후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극장에 들어서니 장송곡 같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막이 오르고, 세 명의 인물이 일제히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관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죽은 스메르쟈코프를 제외한 까라마조프가의 나머지 세 형제들인 줄 알았다. 적어도 캐스팅 보드를 봤다면 극이 시작하자마자 눈치챘겠지만, 공연 시작 시간에 간신히 맞춰 착석하기에 바빴던 나는 그 인물들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각각 누구인지 파악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2개 이상의 넘버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모두 스메르쟈코프라는 동일 인물로서 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메르쟈코프1.jpg

 

 

본격적인 이야기는 묘지에서 시작된다. 시점은 스메르쟈코프의 자살 이후였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스메르쟈코프의 대사는 마치 그를 태초의 순수한 영혼으로 묘사하는 듯했다. 극은 액자식 구성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의 인생을 복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이니만큼 부와 계급, 종교에 대한 풍자를 운운하는 대사가 극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과 악마’, ‘선과 악’에 따른 이분법이 팽배하는 삶에 대해, 스메르쟈코프는 무지의 상태이기에 가능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너무나 살고 싶어지는 이 순간”이라는 문구만 보고 뮤지컬을 보러 간 나도 나지만,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난 광기로 가득 찬 극이었다. 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존재조차 의심하는 스메르쟈코프의 발작이 연속된 단편으로 엮여있었다.

 

스메르쟈코프를 밑도 끝도 없이 질타하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시대상을 근거로 한 명백한 멸시가 느껴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모순을 지적하고 의문을 가지는 스메르쟈코프는 혼란을 일으키는 악 그 자체였다. 스메르쟈코프라는 이름은 ‘수증기’라는 뜻이다. 수증기는 사라져가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스메르쟈코프가 가져오는 혼란은 그들에게 수증기처럼 스며들어 마치 발작이 옮은 듯한 광경을 이루기도 했다.


나는 소극장 뮤지컬만의 연출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소품 몇 개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연기와 몸짓으로 오감을 입힌 디테일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뮤지컬 〈스메르쟈코프〉의 경우에는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의 천과 붉은 장미를 다양한 물성으로 활용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수증기, ‘스메르쟈코프’라는 의미와 잘 어우러지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회전하는 무대와 천사상은 위치와 조명에 따라 각각 다른 상징적 의미로 기능하며 극을 관통하는 ‘선과 악’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메르쟈코프2.jpg

 

 

스메르쟈코프에게 부여된 서사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에게 있어 결핍은 남들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것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발작의 원인인 듯했다. 계속해서 서술되는 스메르쟈코프의 비참한 과거들은 그에게 면죄부라도 주려는 것인지, 감상이 여간 난해한 일이 아니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외침이 단순히 ‘헛소리’로 판명되기보다는, 한번쯤 다뤄졌어야 할 의제였으리라 짐작해본다.

 

극은 첫 넘버의 멜로디와 가사를 반복하며 수미상관을 이루고 끝을 맺는다. 아무것도 몰랐던 극 초반의 스메르쟈코프와 달리, 수많은 고민 끝에 내가 “당신들의 발작을 대신하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주장하는 스메르쟈코프에게서 엄청난 절규의 감정이 느껴졌다. 여전히 살아 죄에 매인 형제들의 고백이 지나가고, 최후의 발작으로 단말마를 마친 스메르쟈코프는 회전하는 무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이 극은 이전 극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마저 듣지 못한 스메르쟈코프의 마지막 변명이 될 것이다. 커튼콜 이후 망자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관객을 바라보며 시작점으로 귀환하는 무대는 죽으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던 밀알을 연상케 해, 마치 그의 고민이 관객에게 남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사실상 새로운 서사가 진행되었다기보다는 그만의 단편 속 철학에 주목하는 극임을 인지하고 감상했기에, 스핀오프다운 적당한 마무리라고 여겨졌다.

 

이 리뷰는 오로지 스핀오프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로만 만난 ‘스메르쟈코프’에 대한 글이고, 따라서 극에서 표현된 것만으로 ‘스메르쟈코프’라는 인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역시나 한계가 있었다. 극을 다 보고 나서야 유튜브에 공개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넘버를 조금씩 찾아보았는데, 익숙한 멜로디 라인을 발견하고는 이 극을 먼저 보고 〈스메르쟈코프〉를 봤다면 짜릿함을 느꼈을 것 같다는 점에서 일면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래도 모르는 채로 본 것 치고는 이만큼의 인상을 받고, 원작의 ‘스메르쟈코프’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감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정은.jpeg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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