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호하고 낯선 언어를 통해 들추어지는 사회의 부조리함 - 스메르쟈코프

뮤지컬 <스메르쟈코프> 리뷰
글 입력 2022.04.1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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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핀오프 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원작으로 한다. 이 뮤지컬은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를 죽인 뒤 자살하고 난 이후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은 왜 사라져야만 하는가와 더불어,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말이다. 여기서 극은 대과거, 과거, 현재에 속한 스메르쟈코프를 각각 세 명의 배우에게 맡겨 개인을 해체된 방식으로 등장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갖춘다.

 

해당 극이 불친절하고 난해하다는 평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작의 대략적 줄거리는 찾아보았으나 직접 감상하지는 못했기에, 곧바로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탓도 있겠다. 그러나 각 넘버와 대사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극이 시종일관 모호한 언어로 전개되는 방식은 오히려 의도적인 것처럼 다가왔다. 스메르쟈코프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말하기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더군다나 해당 극은 스메르쟈코프가 죽은 이후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비선형적인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무질서함과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려면 모호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극의 불가해함이 역설적으로 이러한 지점에서 이해되기도 했다.

 

지금부터 극에 내포된 메시지나 이미지, 메타포를 낱낱이 파헤쳐보려 한다. 극 안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다층적이라 필자의 언어로 담아내기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긴 하지만 말이다. 리뷰하기에 앞서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는 필자의 기억에 의존해 대략적인 흐름을 분석한 것이므로, 극중 대사나 넘버의 가사와 완전히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안해주셨으면 좋겠다.

 

 

[스메르쟈코프] 메인포스터.jpg



 

사회의 뿌리깊은 불평등을 가시화하다



우선 스메르쟈코프는 누구인가. 그는 스메르쟈코프는 까라마조프 가문의 하인이자, 아버지 표도르의 사생아다. 스메르쟈코프가 속한 사회에는 온갖 불평등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극의 초반부, 스메르쟈코프는 무덤지기로 등장한다. 무덤 관리인은 그에게 무덤 속 보석을 파서 본인에게 갖다 바칠 것을 요구하는데, 여기서 가장 처음으로 사회의 불공정한 체계가 드러난다. 스메르쟈코프에게 처음으로 배당된 일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한 여자를 묻으라는 거였다. 그러나 여자는 단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이름조차 지워져 있었음은 물론, 시체도 돈이 된다는 이유로 후에 들추어져 무덤 관리인에 의해 팔리기까지 한다.

 

여기서 스메르쟈코프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가질 수 있고, 그리하여 기억될 수 있음'에도 위 여자는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탄스럽고 애처로이 여긴 바 있다. 나아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가 흔적일지도 모르는 '무덤'에조차 쉬이 묻히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깊이 분노했다. 그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됐으니 말이다. 이는 대개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행각이라는 점에서, 사회에서 계층을 나누는 인식 체계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어디 이뿐인가.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에 의해 요리를 배울 것을 강요받아 요리학원에 다닐 때 역시 이렇게 뿌리 깊은 불평등을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요리 학원의 선생님은 스메르쟈코프에게, '레시피는 낮은 계급을 위한 게 아니라 귀족과 부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수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학생들 중 아무도 그러한 가르침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의구심을 갖지 ‘못 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들에게 불평등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팽배해 있어 의문을 갖기도 어려운 영역인 셈이다. 학생들은 그저 ‘송아지의 혓바닥을 구워 귀족들의 혓바닥을 만족시킨다’는 목적으로 끊임없이 레시피 연구에 몰두하며 사회의 불평등 구조 체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계승해냈다.

 

한편 스메르쟈코프는 이렇게 본인의 계급을 제고하기 위한 의도로 요리한다는 그 불순한 의도 자체에 구역질을 느낀다. 그가 사회 구조에 반기를 들고, 주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와 같이 겹겹이 쌓인 불만에서 출발했다.

 

 

 

이름을 찾거나, 헛소리를 하거나



스메르쟈코프는 끊임없이 본인의 이름을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되새기려 애쓴다. 앞서 말했듯 사회에 저항하고 자기 의지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던 논문을 집필한 대상을 찾으려는 것이나, 끊임없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여기서 논문은 사회문제들을 단번에 수면위로 올리고 가시화하기 위한 행위를 표상한다. 헛소리도 이와 유사하다. 이때 윗선들이 스메르쟈코프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만 치부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헛소리는 권력 여하에 따라 목소리가 돋보이기도 지워지기도 한다는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메타포인 셈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접근이다. 헛소리는 이 사회의 '체계적 언어 구조'에서 벗어나고 해체하려는, 보다 심층적인 시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법의 언어가 존재한다. 이는 인간이 만든 산물이므로 분명 허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혼란을 잠재우고 안전한 세상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며, 사람들을 심판하고 벌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법의 언어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 사회에는 이미 규정된 언어의 체계로는 도무지 형용하거나 형언할 수 없는 보다 넓은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스메르쟈코프의 “이 사회에는 헛소리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은 어떤 획일적인 틀로 귀결되지 않는, 너머의 것을 바라보는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셈이다.

 

이는 마치 시의 언어와도 같다. 난해하고 불규칙적이며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언어가 형용할 수 없는 불가해한 지점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 말이다. 대개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것이 정상으로 규정되는 이 세상에서 이는 다소 난해하고 이상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위와 같은 언어는 꼭 필요하다. 사회에서 올바른 것으로 상정되는 ‘이성적인 것’이 보여주지 못하는 지점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하여 스메르쟈코프가 '이상한', '쓸데없는' 말 따위로 치부되는 헛소리를 기꺼이 의식적으로 행해나가는 것은, 이 사회의 깊은 체계에 저항하고 자기 말하기를 실현하려는 몸부림에 해당하겠다.

 

 

 

'악역이 있어야 선한 역할이 빛난다'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한편 스메르쟈코프는 신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바 있다. 스메르쟈코프는 ‘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이미 기도하기 이전부터 어떤 소원을 빌 것인지도 알지 않겠냐’ 라는 물음을 던졌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미 우리의 고통을 알고 소원을 알 텐데 그것은 기도라는 수단을 거쳐야만 전달될 수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또 신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라면 불완전함이나 고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을 것 역시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사회와 인간들 사이에선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신은 전지전능하며 절대적이라는 어떤 대명제 자체를 뒤흔드는 셈이다.

 

위에서 스메르쟈코프가 늘어놓은 신의 존재에 대한 지적은 액면 그대로 세상에서 신으로 규정되는 이의 무심함이나 무력함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대개 신격화되는 권력가를 향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가 등장했을 때 권력을 쥔 누군가가 그를 가두라고 명했다는 사례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다.

 

예수가 나타났을 때 기존의 높은 지위를 갖고 목소리에 힘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필사적으로 그를 가두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고 한 바 있다. 신에 가까운, 절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의 등장은 본인의 입지를 흔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불평등 체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들고 일어서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예수의 목소리를 소거한 건 이를 방지하고 본인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던 셈이다. 이는 절대 권력이나 입지는 부나 권력 계층의 불순한 목적에 의해 계속해서 양산되고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스메르쟈코프는 이때 악이 있어야 선이 빛난다거나, 악마가 있어야 신이 돋보이는 것이냐는 철학적인 물음을 연쇄적으로 던졌다. 스메르쟈코프가 기꺼이 악이 되겠다고 자처한 것은 이러한 모순을 꼬집고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겠다. 더불어 사회의 이분법적 구도에 순응하지 않고 기꺼이 자율적으로 어떤 것을 행하겠다는 자유 의지의 표명으로도 읽힌다.

 

한편 여기서 ‘악행’으로 비치는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다음 항목에서 살피고자 한다.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를 살해한 행위에서 드러나는 상징성



아버지 표도르의 아들들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주색을 가까이하는 그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여 아버지를 줄곧 죽이고 싶다고 욕망해왔다. 다만 스메르쟈코프의 경우는 다소 달랐다. 그는 그저 형들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으로서 아버지를 죽였다. 이렇게 형들의 욕망을 대리 실현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스메르쟈코프에게는 선과 악, 위와 아래 같은 이분법적으로 구성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나 부조리한 구조 자체를 바꿀 힘은 없다. 사회에서 가장 밑에 해당하는 하인과 사생아의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개 ‘선’이나 ‘위’를 선점하려는 욕구로 그득한 이 세상에서 기꺼이 악을 자처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있을 테다. 그러니 아버지를 살인한 것은 어떤 발언을 할 기회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바깥에 놓인 존재'인 그가, 형들의 욕망을 대신함으로써 자기 말하기를 실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가 고통을 ‘살아있다는 증거’로 인식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고문 기술자처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자처하며, ‘어떤 커다란 생각을 완성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읽힌다. 어쩐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자신의 힘으로 나왔다는 구절과도 맞물리는 것만 같다. 밑바닥에 버려졌지만, 그 안에서 제힘으로 나오고자 발버둥 친, 부조리에 반기를 든 인물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고통을 느낌으로써 자기 삶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겠다.

 

그러나 스메르쟈코프는 그러한 행위를 감행했음에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기 어려웠다. 극에서 누군가 ‘타인의 것을 욕망한다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대상만 달리해 그 안에 매몰되는 상황이 반복될 것’임을 경고한 바 있듯 말이다.

 

스메르쟈코프가 “내 이름은 수증기란 뜻이야”라고 끊임없이 말한 것은 이에 대한 자조로 읽힌다. 수증기는 스메르쟈코프가 한 말처럼 차가워졌다가, 하늘로 올랐다가, 온갖 것을 안을 수도 있는 가변적 특성을 지녔다. 그러한 점에서 스메르쟈코프의 이름이 수증기로 비유되는 것은 온전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고’, 타인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식으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그의 방식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러한 스메르쟈코프에게 ‘이름’은 주어졌다고 해서 고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닌, 타인의 무시와 경멸 속에서 언제 휘발될지 모르는 수증기처럼 '쉽게 지워지는 무언가'다. 하여 극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수증기라는 말을 거듭하며 귀결되는 것은 한계를 언급함으로써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다시금 직시하게 만들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추예솔 (1).jpg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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