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당도할 내일은 어떤 모양새일까요? [영화]

독립 영화 <초행> 리뷰
글 입력 2022.04.1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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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뜨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일은 상상만 해도 꿈만 같다. 매일 밤 본가 앞에서 아쉬운 인사를 나눠야 하는 커플의 경우라면 더욱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매일같이 아쉽게 헤어져야만 하는 과정이 싫어 결혼을 택했다는 경우를 본 적도 있다. 그런데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관용어구에 가까운 말이 방증하듯, 결혼은 단지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성사하기는 어려울 만큼 복합적 문제들이 얽혀 있는 게 사실이다. 경제적인 부분이라든가 서로의 부모님을 뵙고 인척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 전부를 포함해 말이다. 그런데도 전통사회에서는 ‘연애의 끝은 결혼’이라는 고리타분하고도 낡은 방식에 따라 결혼 압박을 하는 경우가 잦다. 영화 <초행> 속,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지영과 수현 커플의 이야기다.

 

<초행>은 연애 7년 차 커플, 지영과 수현이 수현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위해 삼척으로 찾아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데서 시작한다. 그간 결혼을 크게 염두에 둔 적도 없었고, 당연히도 상대방의 부모님을 뵌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던 지영은 막막함과 난감함에 주저앉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리 예정일이 2주가 지났음에도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아 임신한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상황이다. 그간 계획 한 번 한 적 없던 난관에 부닥친 청춘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초행은 이렇듯 모든 것이 ‘초행길’인 위태롭고 불안한 청춘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초행>이 촬영된 방식에 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현장 즉흥성은 80%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흐름 정도만 시나리오에 있었다.”라고 한 바 있다. 해당 글은 영화에 등장한 대사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차용하는 식으로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감독의 촬영 방식을 참고했을 때, 필자의 해석은 어쩌면 감독의 본 의도와 온전히 결부되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물론 기획된 게 아닐지라도 대사에는 현 시대의 분위기가 은연중에 투영된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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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살라’는 기성세대의 목소리와 압박



지영이 본가에 방문했을 때 지영과 그의 부모님, 수현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였다. 불쑥 지영의 엄마가 질문을 건넸다. “너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한 번 생각해봤어?” 괜스레 손을 만지작거리며 가볍게 건넨 물음은 언뜻 대답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을 연출해냈다. 그러나 지영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을 보면 상황은 다르게 읽힌다. “엄마가 이러니까 우리가 본가에 못 오는 거잖아” 그러니까, 엄마의 결혼 압박은 이미 오래도록 이어져 온 셈이다.

 

앞선 대사에서 드러나듯 지영은 결혼에 뜻이 없다. 대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경제적 여건들이 있다고 하지만, 지영과 수현의 현재 상황은 그와 동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집에 먹을 거 있냐는 물음에 '계란밖에 없다'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고양이 영상을 보며 웃음 짓다가도 키우자는 말에는 “우리가?” 라는 자조적인 반응을 내비치듯 말이다. 더욱이 지영은 2년 동안 방송국에서 근무했지만, 곧 정규직으로 전환되느냐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느냐 하는 갈림길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엄마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는 어떤 방향으로든 정해진 답에 편승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진정으로 자식의 미래를 위함이 아닌, 당신의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엄마도 자식이라고는 달랑 너 하나밖에 없는데 좀 남 하는 대로 순서대로, 때 되면 시집 보내고, 아기 생기면 아기도 봐주고, 자랑도 좀 하고 싶고. 아니 무슨 이건 숨어 사는 것도 아니고... 네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막 지끈지끈해. 남들 만났을 때.”

 

위 대사는 자식을 그저 당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폭력적으로도, 자기중심적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결혼이나 자식 양육과 같은 수순을 밟는 것이 일종의 답처럼 주어졌던 기존의 낡은 방식을 떠올려본다. 엄마의 사고는 그를 답습하는 것이라는 점 역시도 주목해본다. 이렇게 접근했을 때, 해당 대목은 오히려 사회를 지배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힘이 세고 위험한지를 일깨워주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정상성과 보편성으로 진입하라는 압박



정상성과 보편성에 편입해야만 한다는 어떤 압박은 비단 결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술 입시 강사로 일하는 수현이 미술학원에서 한 형과 나눈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미술 학원에서는 무표정한 얼굴들만이 즐비한 수현의 자화상들이 빔프로젝터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은 수현에게 저게 무슨 표정이냐 묻는다. 다음에 이어질 수현의 답변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모르겠는데요.”

“네가 모르면 어떡해?”

“꼭 다른 사람이 그린 거 같은데요.”

 

형은 수현에게 그런 식으로는 대학원에 못 간다는 말과 함께, 그림을 잘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말로 포장하는 스킬도 중요하다는 조언을 건넸다. 그렇게 얼마 후에 있을 어떤 교수의 전시회에 같이 가 점수를 따자고 제안하지만, 수현은 ‘꼭 그렇게 해야 되냐’라고 반문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수현의 삶은 본인의 것이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개척해나가야 할 테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 대학원을 가고 그림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등 어떤 획일적인 틀에 들어맞아야 한다는 압박은 기이하고 괴상하게 다가온다. 특히 교수님을 뵈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려주겠다는 말에서는 정점을 찍었다.

 

무조건 보편성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형 앞에서 수현은 결국 “나는 그런 거 못 하는데, 웅변학원이라도 다녀야 되나?” 하고 받아치기를 택한다. 자조가 뒤섞인 반응이었다. 뿌리 깊은 기성세대를 설득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더하여 그렇게 할 수조차 있을까 하는 의문이 뒤섞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본인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 어쩌면 그렇게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수가 어떤 것이 정상이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그 안에 소속돼야만 하나 싶은 혼란한 상황에 당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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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궤적을 밟고 싶지 않아



한편 지영은 수현에게 자신은 엄마와 아빠 중 누구를 닮았냐고 묻는다. 이후 엄마를 닮았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낙담한다. 지영 본인은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표명한다. 지영은 딸을 당신의 자랑거리를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엄마를 닮고 싶지 않은 걸 수도, 딸의 의견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당신의 의견만을 역설하는 엄마의 면면을 닮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혹은 가부장제하에 강요된 여성성을 수행해왔던 모습을 닮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혼을 하고 가정에 묶여 살아가는 어떤 전통성에 편승하는 엄마의 계보를 잇고 싶지 않아 한다는 점이다. 다음의 대화를 주목하길 바란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되기 싫어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럼 너는 그걸 아니까 그렇게 안 살면 되지”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봐”

“원래 다들 그런 거랑 싸우면서 사는 거지”

“싸워야 하나?”

 

여기서 “싸워야 하나?”라는 질문은 정말로 갈등상태에 놓였음을 시사한다. 보편적인 것과 독립적인 길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구조에 대한 의문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그러한 성향의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그것은 그 안에 귀속된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애초에 그렇게 소속돼야만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짐으로써 다른 방도를 찾아 나섰다.

 

지영과 마찬가지로, 수현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현은 부모님 중 누구를 닮았냐는 지영의 물음에 “외탁했어”라고 답한 데서 그러했다. 수현의 아버지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언을 서슴지 않는 등 폭력적이고 수직적인 가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요컨대 수현은 가부장의 계보를 잇고 싶지 않아 하며, 기성세대의 경직된 사고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셈이다. 한편 다소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다음 파트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아버지의 모습들. 가부장적이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앞선 대화에서 보이는 수현의 ‘싸우면서 사는 거지’라는 말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는 다소 안일한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그런 방향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영과 둘이서도 빠듯했음에도 불구, 충동적으로 고양이를 분양받으려고 알아보는 장면이 오버랩 되는 대목이었다. 상황에 직접 개입해 책임지기보다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성향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는 지영과 함께 삼척으로 향할 때, 어릴 적 자신이 놀았던 바닷가에 최근 토막 난 시체가 떠내려왔다는 말을 하는 데서도 그랬다. 수현은 아래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지금 그런 데로 가고 있는 거야. 어때. 무섭지? 불길하지?”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위와 같은 말을 던진 것은 앞선 일들이 본인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판단될 때에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심리는 현재 둘이 당면한 상황과도 결부시킬 수 있겠다.  둘 다 수현의 부모님을 뵙는 자리로 향한다는 점에서 초행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어쨌거나 수현보다 지영에게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자리이고, 그 점에서 무게는 각기 다를 것이다.


이는 임신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지영이 홀로 두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지영이 화가 났을 때 달래고자 해당 주제를 꺼낸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물론 지영과 수현 둘 다 ‘무섭다’라는 감정을 내비쳤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그러나 임신은 여성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한단 점에서 봤을 때 그 두려움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위와 같은 수현의 태도는 문제가 직접적으로 자신과 연결돼 있지 않을 때 한 발을 빼는 식으로 대처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읽힌다.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을지라도 잠시나마 책임을 회피하고 유보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언뜻 지영 아버지의 모습과도 겹쳐 보이기도 한다. 지영의 아버지는 지영의 엄마가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그러지 말라고 말린 바 있다. 그러나 수현에게 부모님의 직업이나 현 경제 상황에 관해 묻는 등 호구 조사를 이어가거나, 지영에게 슬쩍 수현의 부모님은 뵙고 왔냐는 식의 물음을 건네는 데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비쳤다. 이때 지영의 엄마가 건넨 말이 의미심장하다.

 

“아니 당신도 뭐라고 얘기 좀 해봐 당신은 손님이야? 이렇게 중요한 얘기가 어딨어. 꼭 무슨 일만 생기면 딴청이야 딴청은. 나만 악역이야 맨날.”

 

요컨대 아버지는 가정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데서는 일정 거리를 둔 채 결정적 책임은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수현 아버지와 지영 아버지, 그리고 수현을 포함한 각기 달라 보이지만 두 가지 부류로 재현됐다. 가부장적이거나, 평소엔 유해보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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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과 연대하는 수현의 엄마



한편 기성세대에 속함에도 일방적이고 고정적인 시선 속에서 벗어나 지영과 연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수현의 엄마였다. 수현의 엄마는 결혼이란 주제를 두고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

 

“결혼이라는 게 참 그래. 한 사람이랑 자다 일어나서 밥 먹고 치우고 다시 자고 다시 일어나고 밥 먹고 이걸 수십 년 동안 반복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도 지겨운데 웬수 같은 사람이랑 한다고 생각하면... 그러니까 한 번 같이 살아보고 결정해요. 그래도 늦지 않으니까.”

 

지영 엄마의 발언과는 상반된 발언이라는 점에서 낯설었다. 그러나 그 점이 반가워서 주목하게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현의 엄마에게 있어 배우자는 시종일관 수직적인 태도로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대상이며, 아들들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하에 자라왔다. 그리하여 어쩌면 아버지의 궤적을 밟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남성이 세 명 모여있는 집안에서 홀로 기성세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어떤 여성성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견디며 살아온 이 어머니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신물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게 수동성을 요구하는 사회의 잘못된 주입과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삶에 회의를 느낀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위 조언은 지영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진 지영의 물음이 인상적이다.

 

“어머님 그런데요, 살아봤는데도 모르겠으면 어떡해요?”

 

이는 지영과 수현을 단번에 현실의 딜레마로 끌어들였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 속에서



사실 주변의 압박대로 결혼을 한다고 해도 곧 안정의 길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 신혼부부 이야기를 담은 영화 <두 번째 겨울>에서의 신혼부부 정희와 현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잠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개 신혼 2년차라고 하면 대개 알콩달콩하고 깨가 쏟아지는 관계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정호와 현호가 그리는 풍경은 다소 달랐다. 오히려 서로 마주 보지 않고,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만을 바라볼 때가 잦았다. 영화를 볼 당시, 철학자 강신주가 한 강연 프로그램인 '최강 1교시'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겁니다. 앞만을 바라보면 그게 사랑인가? 그냥 같이 가는 거지.”

 

물론 이 발언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이를 지표로 둘의 사랑의 깊이를 논하고 싶기도 않다. 오히려 정희는 현 생활이 변변치 않음에도 현호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진심 어린 말을 건넬 정도로 그 마음이 굳건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둘의 시선이 서로가 아닌 앞만을 향한다는 사실은 무시하기 어려운 장면임에는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이 딱 한 장면 있는데, 그게 바로 현호가 배우라는 꿈을 유보한 채, 백화점에 출근하기로 한 날 정희가 현호의 넥타이를 매주는 장면에서였다. 이들은 막막한 현실에서 한없이 고민에 빠졌다가도,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일의 수행을 위해서 무언가를 도모할 때야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던 거다. 마치 영화 내에서 둘의 골치를 아프게 하는 고장 난 난방과도 같았다. 난방은 고쳐도 고쳐도 제 역할을 하지 않아 부부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대로 작동되는 무언가였다. 잘 됐다가도 언제 다시 꺼질지 모르고, 또 언제 다시 잘 될지 모르는 이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투영하는 매개였다.

 

영화 중간에 정희가 무표정하게 서서 침대를 쳐다보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자기 모습을 마주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내내 집에 머물러 그래픽 작업을 했던 정희였다. 하여 그 정지된 모습은 불과 몇 분 전의 정희 같기도, 혹은 잠시 뒤 침대에 걸터앉아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미래의 정희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둘 다 해당할 수도 있었다. 요컨대 크게 바뀌지 않고 고정적인 자리에 머무르며 반복되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희 자신이었던 셈이다.

 

잠시 이들의 자리에 <초행>의 ‘수현과 지영’을 앉혀 본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결속되었을지라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한, 정희와 현호의 자리는 계속해서 대상을 달리해 대물림될지도 모른다. 그 뒤를 수현과 지영이 이을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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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 번째 겨울> 스틸 컷

 

 

 

우리는 우리 자체로 행복할 수 없을까?



지영과 수현은 난관에 놓일 때마다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함구하고 모르겠다고 일관한다.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다. 말 그대로, 둘은 아무것도 모른다. 본인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방향이 맞을지, 나아가 본인들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지. 수현의 고장 난 GPS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방황 중인 셈이다.

 

그러나 때로는 모르는 상태 그 자체가 답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둘이 원하는 건 지영이 화가 난 순간 수현이 달래기 위해 꺼내든, 현재를 가장 직관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카메라’처럼 단지 현재를 쫓고 즐기는 게 다일지 모른다. 수현과 지영 커플이 그저 함께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7년간 행복했듯 말이다.

 

그러나 보편성으로의 진입을 원하는 사회의 압박에 의해 둘은 잠시 주춤했다. 이건 영화 내에서 운전하다가 자꾸만 길을 잃고 방향성을 잃는 장면에서 시사되는 바다. 지영은 그럴 때마다 수현에게 방향을 제안한다. 이때 ‘갑자기 시간이 늘어났다’고 불만을 내비치자 수현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고장 난 거 아니야?” 이는 길을 알려준 지영이나,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중인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외부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쯤에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본다. 수현의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장면에서 차가 막히고, 둘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갈팡질팡하던 둘은 광화문 광장으로 향한다. 이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반대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또 자신들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렇게 걸으니까 이제 사람들이 반대로 가는 거 같지 않아?”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그대로 직진해간다. 이후 한 번 더 방향을 돌려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결국 어느 쪽도 답이 아니라는 것, 어떤 명확한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내 길이라는 메시지를 제공하는 셈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어쨌거나 해당 장면을 통해 삶이 어떤 일방향을 향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발언을 일거에 반박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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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초행>이라는 제목의 함의를 헤아려본다. 초행은 말 그대로 처음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영화의 내용과는 무관한, <초행> 관련 인터뷰에서 진행한 감독의 개인적인 말을 떠올려본다. 감독은 영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촬영 후 결혼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며, 9년간의 연애 과정을 지나온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가 결혼으로 귀결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지영과 수현은 최종적으로 어떤 길을 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저 이들이 길을 걷는 둘을 사진처럼 정지 화면으로 담아냄으로써,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포착했다. 물론 수현과 지영은 '우리 둘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과 사회적 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감독의 실제 일화가 표방하듯 이전에 고려하지 않았던 부분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더라도, 그것 역시 답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고 멈추고 싶을 만큼 고되지만, 둘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방향이 어디가 됐든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아간다는 사실 자체에 희망을 걸어보아도 괜찮을까.

 

흔들리는 듯한 연출로 영화를 표현해냈다는 감독의 말이 생각난다. 이는 현장감을 높인 동시에 현실성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 아닐까 싶다. 비단 이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주했을 아니, 마주하게 될지 모를 이야기라는 점을 시사한 것도 같다. 나 역시 당도할 길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아간다는 사실에 족하며 지금까지처럼 더디게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여기서 영화는 당신에게도 묻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내일은 어떤 모양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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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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