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쉼표가 있어야 음악이 만들어지듯이 [문화 전반]

나만의 레퍼런스를 찾는 휴식기
글 입력 2022.04.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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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휴학 생활을 하고 있다. 무조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덜컥 결정한 일이다. 덩그러니 주어진 약 7개월의 빈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기간을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고민만 하다 2개월이 흘렀다.


2개월은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합리화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이 정도 쉬었으면 슬슬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인생 긴데 겨우 이만큼도 못 쉬나?’  ‘그래도 지금 쉬기만 하면 나중에도 평생 쉬게 되는 거 아니야?’


결론 없이 꼬리에 꼬리만 무는 질문 세례는 제대로 된 휴식을 주지도 못하고 마땅한 결과물을 내놓지도 못했다. 이런 자책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간임에도 무의식중에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을 정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여러 조언과 오랜 숙고를 거쳐 결론을 내렸다.


 

이 기간은 나만의 레퍼런스를 찾는 시간이야. 휴식도 생산성도 다 나의 기준으로.

 


2개월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으니 남은 5개월도 그럴 것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사회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고 내 인생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최대한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기간에조차 나를 보듬는 법을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 무너질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기에 이 휴학을 나를 보호하는 기간으로 명명했다. 이 동안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나를 살리는 행위를 부지런히 발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막막했다. 시작마저도 뭘 하면 좋을지 타인이라 할 수 있는 유튜브를 통해 알아보고 있으니 말이다. 일상을 살다 보면 선택의 순간이 수없이 많이, 빠르게 지나간다. 웬만하면 자신의 속도보다는 빠른 일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선 아무래도 효율성을 추구하게 된다. 미리 경험해본 사람의 의견을 듣고 비슷한 고민에 대한 타인의 확실한 조언을 따르고, 이는 굳은 습관이 된다.

 

타인의 기준이 현재 나의 상태와 맞아떨어져 도움이 되는 때도 분명히 있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도 많다. 그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독소를 채우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감당해야 하는 건 오롯이 나인데, 모든 순간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건 왠지 억울해 보인다. 독소를 의식적으로 빼내고, 매 순간 매 선택에서 나의 결도 느끼며 이를 조화롭게 충만히 채워내야 건강할 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하지만, 나는 현재 나의 선택을 의식적으로 믿고, 선택하고, 경험하고, 기억하기로 했다. 나만의 확실한 레퍼런스를 만들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보다 나에게 부지런히 시간을 쏟는 일은 어렵다. 나만의 온전한 기준을 토대로 행동하고 상태를 기록하고 더 관심을 두려는 확실한 의식이 필요하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말이다.


가령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컨디션이 안 좋다면 일을 마저 진행하거나, 온전히 쉬거나, 어느 정도 틀을 잡아 놓고 쉬는 등의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 모두 시도해보는 것이다. 일을 전부 끝내면 마음이 편안할 수도, 에너지가 급격히 감소해 컨디션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온전히 쉰다면 좋은 컨디션으로 일을 더 효율적으로 끝낼 수도, 계속되는 죄책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정이 꼬일 수도 있다.

 

*


소비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유행하는 먹거리나 옷에 큰 흥미는 없지만, 왠지 사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 한번 해보면 된다. 그 후 소비하는 것에서 생각보다 큰 행복을 느끼지는 않는 걸 알 수 있거나, 어떤 품목에서 더 행복이나 죄책감을 느끼는지, 어떤 가격대에서 적절한 감정을 갖는지 의식적으로 질문하고 느끼고 기억하며 알아보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분명 후회는 남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선택지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밥 먹는 것, 방을 꾸미는 것, 어디를 가는 것, 쉬는 것 등 모든 선택지에서 이를 수행하면 어렴풋하게 선택의 경향이 보이고 틀이 짜이기 시작한다. 그 후엔 다가오는 선택지에서 나에게 적합할 가능성이 큰 걸 고르거나, 주체적으로 선택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를 다시 레퍼런스 삼아 반복해보면 된다. 물론 나의 상태는 고정적이지 않으므로 경향성 안에서 계속해서 변해가는 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경우, 의식적인 경험이 늘어갈수록 점점 새로운 걸 추구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스스로 굉장히 정적이고 틀을 벗어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형적이기보다는 조금의 변주를 주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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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예로 방의 구조가 지긋해서 오래된 책장의 뒷면을 제거하고 가로로 눕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냈다. 구석에 들어가 있는 침대를 밀어 방 가운데에 위치 시켰다. 고정적인 책상을 이동할 수 있는 원형 테이블로 바꿔 기분에 따라 위치를 달리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밥을 먹는다.

 

꿀꿀한 기분을 달래려 마냥 걷다가 햇빛을 받고 바람을 맞으며 걷고 눕는 것에서 어느 때보다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을 기억하여 최근엔 기분이 조금이라도 먹먹해지면 우선 돗자리를 들고 나가서 아무 데나 새로운 곳을 찾아 눕는다. 이런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와 고요히 누워 있는 것도 생각보다 에너지를 충전해준다는 것도 알았다.


‘난 뭘 하고 싶을까?’ 휴학을 결심한 후 가장 먼저 맞닥트린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취미가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뭘 좋아하냐고 물으면 항상 딱히 특별한 게 없다고 대답했다. 뭔가 천편일률적이고 흔해 보이는, 들었을 때 김이 빠질 것 같은 것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만큼은 나도 확실한 취향과 그 씨앗이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레퍼런스 찾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독서를 하며 인터뷰라는 형식에 푹 빠지게 됐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서로를 존중하며 이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편안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사람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들의 또 다른 언어와 생각을 마주하는 것도 아주 재밌다. 최근엔 김하나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 정적으로 살았던 나는 생각보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방을 대대적으로 꾸미면서 벽에 페인트칠하고 쓰레기와 가구를 수십 번 나르고 난 후 흘린 땀이 찝찝하지 않았을 때 알았다. 그 후로 반신반의하며 아침에 팔굽혀펴기와 짧은 조깅을 시도해봤는데 굉장히 좋았다. 온전히 나의 몸과 풍경에만 집중하는 그 시간이 굉장히 활기찼다. 내가 나를 이렇게 모르고 있었나 할 정도로.


운동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임을 알았으니 이젠 산책에서 변형하여 스케이트보드를 타보려고 한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아직 할 줄 모르는 수영을 배워볼까도 한다. 5개월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거란 느낌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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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자니 완전히 자유로운 새 한 마리로 다시 태어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나는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할 미래를 고민하고 준비하지도 않고 있다. 'work'와 'life'의 비율이 후자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최근 공허함을 크게 느끼고 있다. 일이 주는 일종의 활력과 책임감이 꼭 필요하다는 걸 이렇게 실감하게 된다.

 

또한 아직도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해 다른 사람의 말에 완전히 의지하게 되기도 하고 감정의 폭이 엄청나게 변동하기도 한다. 이 행위들은 결국 삶의 어려움 자체를 방지하는 것보단, 그것이 닥쳤을 때 나를 달래줄 것을 발견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항상 나답게 살지 못한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정형화된 사회의 흐름 속에서 나답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나답게 사는 것만이 성공한 것도 아닐 수 있고, 닮고 싶은 타인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도달하고 싶은 곳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이를 이분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고, 나다움마저도 강박이 된다면 나를 해치게 될 수 있다. 무엇이 됐든,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작은 부분이라도 나다움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온전히 내 기준에 따라 행하며 스며드는 그 순간을. 오롯이 나에게만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순간이 결국 삶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라 믿는다.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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