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회색인간

검은색과 흰색 중간이 아니라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서 회색인간
글 입력 2022.03.3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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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회색인간입니다.



20년을 넘어가는 세월을 살면서 자기소개서를 참 많이 썼다. 가장 처음은 대학에 진학할 때, 두 번째는 대학 동아리에 들어갈 때, 세 번째는 대외활동을 위해, 네 번째는 인턴을 위해. 그리고 내 앞에는 '취업을 위해'라는 커다란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면 가장 먼저 열어보게 되는 것이 지원하고자 하는 곳의 공식 사이트였다. 그리고 그 공식사이트의 제일 첫 번째에 위치한 그들의 소개 글. 강조하는 것이나 중복되는 것에 동그라미를 치면, 그것이 바로 내 성격이자 특기, 장점이 됐다.


그럼 거짓말이잖아 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성질이 조금씩 있었다. 그걸 조금 극대화하긴 했지만.


그렇다. 그런 것들이 모두 내게 있었다. 물론 그게 남들에 비하면 아주 조금이라는 게 문제였다. 극대화하지 않고는 자기소개서에 쓰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검은색도 조금, 흰색도 조금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나였다. 회색인간.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회색이라는 속성도 닮아갔는지 흑백논리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싫어했다.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질 때문에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인 회색인간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저것도 다



회색인간은 무엇을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면 꽤 곤란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다른 색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본질은 검은색과 흰색이다. 결론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했다. 어떤 영화 장르는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장르는 안 가려요 하는 게 내 대답이었고, 어떤 뮤지컬 배우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면 뮤지컬 배우는 다 좋아해요 하는 게 내 답이었다. 기묘하게 박애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다 관심이 갔다. 어렸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조금 커서는 운동이 좋았고, 또 조금 커서는 영화, 다음은 뮤지컬이 좋았다. 물론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집에 꽂힌 책들은 장르가 아주 제각각이다. 드로잉, 스페인어, 시나리오, 심리학 등등. 처음 온 사람이 내 책장을 봤다면 이게 뭔 조합이지 싶어질 정도이다.


이렇게 되면서 뭐든 조금씩 잘했다. 하고자 하면 아주 기본적인 것을 할 수 있을 정도. 말하자면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혹은 이런 것도 알아요? 하는 반응이 나오면 성공적이지만, 이거밖에 못해? 하는 반응이 나오면 아주 절망적이었다.


사실 첫 번째 인턴을 했던 회사가 딱 그랬다. 이거 할 줄 알아? 하면 기본적인 건 할 줄 알아요라고 답했고, 기본 이상을 하지 못하면 할 줄 안다며 왜 이걸 못해 하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참 답답했다. 다시 한번 기본밖에 못 한다고요! 하는 말을 던져주고 싶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던 게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린 나이였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아이가 의지를 갖고 휴학하면서까지 인턴을 했는데 죄송합니다를 달고 살며, 죄책감에 혼자 울었다. 이게 기점이 됐는지, 뭐든 조금씩 잘하는 것은 콤플렉스가 됐다.


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회색인 아이는 검은색은 조금 더 섞는다고 해서, 흰색을 조금 더 섞는다고 해서 검은색이나 흰색이 되지 못했다. 그저 조금 어두운 회색, 조금 밝은 회색이었다. 처음 맞이한 사회생활이 쓰다며 미친 듯이 공부하긴 했지만, 뭐든 조금씩 잘하는 회색의 성질을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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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하자면 약간 부족한 멀티플레이어



많은 것을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생각 하나로 광고와 홍보를 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어쩌면 이게 소위 말하는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가지 않는 이상 광고나 홍보 기획서를 써야 하는 대상은 다양했고, 기획서를 쓰는 과정에서 해야 하는 것도 다양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대개 내가 조금씩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예습하면 수업을 듣는 것이 수월하듯이, 조금 알고 있다면 기획서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매우 편리하다. 또한, 기획서가 A4용지에 글을 쭉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PPT와 포토샵을 이용하는 것이었기에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이 참 유용했다. 더욱이 내가 하는 것은 기획일 뿐, 완벽한 포토샵 작업을 하는 것과 완벽한 영상 작업을 하는 게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러프한 콘티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학과에 처음 들어가서는 참 편리하고 좋았다. 물론, 이건 위에 말했던 첫 번째 사회생활 이전이었다. 휴학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처음과 달리 다분히 학문적이었다. 외우고, 쓰고, 시험 보고. 실기 위주로 돌아간다는 과에서 나만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고는 나 자신이 싫어진 마당에 다시 인턴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친구가 한다는 이야기에 덩달아 공고에 나와 있는 곳만 깔짝거렸다. 그러다 한 회사 관련 인터뷰에 '멀티플레이어'라는 단어를 보게 됐다. 솔직히 나 자신을 멀티플레이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멀티플레이어는 뭐든 잘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뭐든 '조금씩' 잘하는 내가 해당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뭐에 홀렸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면접을 보러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그 단에 하나에 홀렸던 것인지, 취업을 위한 결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운 좋게 면접에 붙고는 첫 인턴을 했던 기억에 겁이 먼저 났던 것 같다. 그런데 다니면 다닐수록 이런 것도 알아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하는 말에 곱아들었던 어깨가 쭉 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채찍보다 당근이 더 체칠에 맞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좋게 말하면 약간 부족한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렇기에 나아지는 중인 멀티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세상에 날 때부터 완성형인 인간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인간인 나에게는 나아지는 중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세상에 즐비한 검은색이나 흰색 둘 중 하나로 가지 않고, 회색의 노선을 꾸준히 밟으며, 내 길은 내가 개척해 나가는 느낌이었으니까.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인간


 

처음에는 회색인간이라는 사실이 싫어서 자기혐오가 오기도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어째서인지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처럼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 번째 인턴에서 딱 맞는 회사를 찾아갔듯이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 길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작은 섬이 처량하면 내가 그 섬을 잘 꾸려 살면 될 일이 아닌가.

 

이도 저도 아니라는 말이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회색인간인 나로서는 이렇게 반가운 말일 수가 없다.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인간. 어째서인지 Only One처럼 보이지 않는가. 세상에 나 말고도 많은 회색인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과거의 나처럼 상처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가까운 길을 빙 돌아온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다.

 

검은색과 흰색에서 태어난 회색이라도 검은색과 흰색 둘 중 하나에 섞일 필요 없다. 우리는 본디 회색이니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 섞여서 태어난 우리이니만큼 조금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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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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