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와 겨울을 지낸 단상들

겨우내 덩치가 불어난 메모장, 그 해방 일지
글 입력 2022.04.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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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쓴 시간이 1년을 꽉 채웠다.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에디터에 지원하고, 마침내 아트인사이트의 일원이 되어 써 내려갔던 첫 글이 생생하다.

 

일상생활 중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 책이나 영화를 보다가 궁금해지는 게 있을 때, 혹은 누군가와 대화 중에 인상 깊은 순간이 있을 때. 나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짧게라도 꼭 기록해 놓는 편이다. 그리고는 나중에 혼자 보는 일기든, 블로그든 내가 쉬어가고 싶은 공간에 그 이야기를 풀어내곤 한다.

 

아트인사이트에서 에디터와 컬처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나의 메모장은 점점 덩치를 불려 갔다. 혼자 또는 친구와 보는 공간만이 아니라 모두가 볼 수 있는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써야 했고, 꾸며내지 않고 내 생각이 녹아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꾸준한 메모는 필수사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어딘가에 해방되지 못하고 스마트폰 안에만 꽁꽁 갇혀 있는 놈들이 생긴다. 함께 풀려날 친구가 마땅치 않거나, 풀려나기엔 아직 빈약하고 부족한 상태이거나, 너무 오래 머물러서 어쩌면 그 자리에 딱 붙어 버린 것들이다. 오늘은 특별사면이다.

 

 

 

다시 만난 이웃집 토토로


 

지난 3월, <이웃집 토토로>를 정말 오랜만에 찾아본 날이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중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내가 애정을 많이 쏟는 작품에 속하지는 못했다. 다른 작품들보다 러닝타임이 짧기도 하고, 어린 시절 본 귀여운 애니메이션, 정도의 감상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생각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찾아내는 데 지쳐 있었으며 절대로 영화를 보며 공부하고, 고민하거나 생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몇 주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마주하고 갑작스레 내 마음을 건드렸던 <이웃집 토토로>의 장면과 OST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떠올랐고, 그렇게 그날 오후의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 시작부터 새로운 생각과 감정들이 밀려왔다. 그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먼저, 내 기억과 달리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의 분량은 생각보다 적은 편이라는 것. 영화는 '메이'라는 동생을 가졌고, 이웃집에 사는 토토로를 만난 한 소녀, '사츠키'의 이야기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때문에 영화의 제목이 사츠키, 메이의 관점에서 '이웃집' 토토로,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리고 어른이라는 나이가 되어 보니, 조금은 얄밉고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동생 '메이'가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것. 언니 사츠키는 학교에 가고, 아빠는 밀린 일에 치여 바쁜 평일 오후. 메이가 앞마당에서 홀로 놀다가 아빠의 책상에 하나둘 작고 예쁜 노란색 꽃잎을 가져다 놓는 장면은 나만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그날은 메이가 토토로를 처음으로 만나는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작업물 더미에 파묻힌 아빠가 주변에서 들리는 사부작사부작 소리에 고개를 잠시 돌렸을 때 정갈하게 놓인 들꽃 여섯 송이. 그 순간은 메이의 아빠에게도, 그리고 지켜보는 나에게도 어쩐지 숨통이 트이고, 여유로운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투병 중인 엄마의 병원 근처 시골로 이사를 온 사츠키 가족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분명 가볍게 지나갈 영화의 오프닝 부분이었는데, 오래된 시골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가족의 모습이 참 편안해 보였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라는 한 문장의 로망이 내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현실은 아파트로 올라오는 길에서조차 지친 발걸음이 버거운 일상이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토토로가 사는 이웃집'에 자꾸만 들르고 싶어지나 보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하루


 

아침 해와 함께 출근하고, 깜깜하게 어둠이 내린 시간 퇴근하기까지 참 많은 혐오를 마주한다. 우연히 들어간 SNS에서, 회사 안 TV 속에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퇴근길 함께하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피곤이 온몸을 짓누른다. 돌아보면 수군거리는 말소리와 자극적이고 센 단어들이 서로 다른 주파수로 윙윙거릴뿐인 하루.

 

친구들이 서로 뒷담화를 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남 욕하는 시간이 조금 불편했다. 지금 나는 내가 남 욕은 절대 하지 않는 선한 사람이라고 교만한 체하는 것도, 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필요하고 악한 행동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완벽하지 못한 나의 부분 중 하나다. 심지어 내가 누군가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전적으로 피해를 봤을 때, 그래서 친구와 이야기하며 잔뜩 화를 분출하고 난 다음에도 기분은 같다. 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하더라도, 어쨌든 '안 좋은 이야기'는 대화 후 뒤돌아선 나의 기분을 '안 좋게 한다'.

 

그래서 노력해보려고 한다. 세상의 수많은 취향과 생각을 존중하기. 모든 취향과 생각을 이해할 순 없어도 존중해보려고 하기. 굳이 차이를 좁히려고 나서지 않기. 섣불리 평가하려고 하지 않기.

 

정말 우리는 안 그래도, 말 그대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하루를 살고 있지 않은가. 나와 거리가 먼 것들을 굳이 혐오하고, 예측하고, 평가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틀린 생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깊은 생각, 혹은 자신과 닿아 있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두 뼘씩 내 사람들과 멀어지고 반 뼘씩 새로운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난 내가 사랑하는 것,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이 더 궁금하다.

 

 

 

글과 말


 

말하는 시간보다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았던 때가 있었다. 입을 움직이는 것보다 손을 움직여서 기록하는 행위가 더 자연스러웠던 시간들. 안 좋은 점도 있었다. 지나치게 입을 닫게 된다는 점, 혹은 모든 걸 다 적어야 해서 메모장과 함께 머리가 복잡했던 것.

 

하지만 글 쓰는 시간을 잃어버린 요즘은 그 시간이 그립기도 하다. 내가 어떤 말실수를 했나 돌아보는 시간은 필요하지 않고 내 멋대로 쓴 글들을 다시 읽어 보고, 퇴고하던 시간. 혹은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써 내려가 문법이나 맥락이 죄다 엉망인 글을 아주 사적인 곳에 남기는 시간. 그때 나는 아주 복잡하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아주 '나다웠다'.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게도 그렇다.

 

혼자 앉아 글을 쓰는 시간보다 입을 열어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일하는 시간이 더 긴 하루를 살고 있다. 나쁘진 않다. 다만 그 두 시간이 적절하고 교묘하게 섞인 날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더 단편적인 것들


 

- 나는 몸이 힘든 것보다 비효율적인 상태를 버티는 게 더 힘들다. 그렇다고 나서서 체제를 개선하는 장군감은 못 된다.

 

- 비 오는 날을 아주 싫어한다. 날씨에 기분이 영향을 많이 받는 편. 날씨가 좋은 날 파란 하늘 아래 나의 '야호' 플레이리스트(또 다른 플레이리스트 'NIGHT'와 대비되는, 밝은 노래들이 모여 있는 플레이리스트다)를 들으며 걷다 보면 절로 발걸음은 리듬을 타고 고개를 까딱이게 된다. 햇살은 순간 내가 행복하다는 환상을 만들어 준다.

* 오늘 내게 가장 환상적이었던 노래는 레드벨벳의 'Feel My Rhythm'.

 

- 새로 시작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1-3화는 '한수'와 '은희'의 이야기. 참으로 처절하고 말 그대로 슬픈 이야기였다. 문득 '꿈은 잘 접히라고 양쪽 반절이 똑같이 생겼나보다'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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