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경계선 위의 목소리 -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

글 입력 2022.03.1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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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라는 개념과 디아스포라로서의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는 본래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현대에는 더 넓은 범위로 쓰인다. 다음은 서경식 작가의 『디아스포라의 눈』 중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디아스포라라는 개념과 디아스포라로서의 재일조선인의 입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꽤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대에는 좀 더 폭넓게,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 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그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언제나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이다. (...) 하지만 디아스포라에겐 이점도 있다. 그것은 머조리티(다수·주류)에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국가 시대에 머조리티란 ‘국민’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는 ‘국민’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디아스포라 기행



극의 초반에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으로 분한 주연 배우는 다양한 소리들을 들려준다.(앞으로 연극 속의 서경식은 ‘서경식’으로 표기하겠다) 비행기 소리, 마차 소리, 기차 소리, 뱃고동 소리. 모아놓고 보면 모두 이동 수단의 소리들이다. 그리고 ‘서경식’이 오른쪽 벽을 짚으면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시민들의 함성이 들린다.

 

시민들의 함성은 극의 시대 배경이자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서경식 작가의 개인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그의 두 형은 조부모님의 고향이 있는 한국을 조국이라 생각하여 한국의 대학에 공부를 하러 왔다. 그러나 당시 조국에 자리잡고 있던 독재 정권은 학생운동의 열기를 꺼트리고 정권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학생 간첩단 사건을 만들었다. 거기에 서경식의 두 형들이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휘말렸고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서경식은 형들을 위해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그의 모친은 형들이 풀려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조국에서 가족이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무슨 마음이 들었을지 짐작도 채 가지 않는다.

 

한편 이동 수단의 소리들은 각각의 디아스포라 인물들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본 연극의 영감이 된 원안이자 서경식 교수의 에세이집인 『디아스포라 기행』에 나오는 여러 디아스포라 인물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즉, 한국, 일본 혹은 제 3의 국가에서 만난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서경식 본인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이 드러나는 상황이 여러 편 엮여 있는 이야기가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이었다.

 

 


모어와 모국어: 그 경계선에 서 있는 디아스포라



극은 무대의 한가운데 바닥에 회전이 가능한 낮고 네모진 단상 하나, 무대 앞의 책상 하나, 무대 뒤의 벽면과 무대 옆의 또 다른 벽면을 활용한다. (다른 벽은 배우들이 이동하는 통로로 뚫려 있다) 맨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 주연인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의 배우는 더 많은 이들에게 공연이 전달되기 위해 공연 내내 수어 전문 통역사의 수어 진행이 있을 것임을 알렸다.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연극은 처음 봐서 매우 신선했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무대 공연에 소외되는 사람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극의 본격적인 시작은 무대 앞의 책상에서, 모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설명하며 펼쳐진다. 모국어는 익히 듣는 단어지만 모어란 단어는 생소했다. 나의 경우, 그리고 대다수 ‘국민’의 경우 모어와 모국어는 일치하여 모어와의 간극에 대해 고민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어란 부모로부터,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언어이다. 이를테면 태어나 자란 곳에서 처음 접한 언어가 모어가 될 확률이 높다. 한편 모국어란 한 국가가 국민에게 민족의 개념을 장려하며 사용하게 하는 언어이고, 국민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에게 모어란 일본어이고, 모국어란 한국어라 할 수 있다.

 

그의 경우 조부모의 고향인 한국에 가서 일본어를 사용한다면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써야지’라는 말을 듣는다. 아예 반대로 서투른 한국어를 쓸 경우 ‘재일교포가 열심히 하네’ 같이 상대가 뿌듯해하거나 연민하는 반응을 얻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서경식의 두 형들은 일본 공항에서 일부러 일본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어로 답을 했다. 자신들의 질문에 계속 한국어로 답하는 두 형제에게 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 물었고,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내 모국어의 권리를 위함입니다.”


모어와 모국어에 대해 설명하며 ‘서경식’은 화선지 위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붓과 먹으로 모어, 모국어를 각각 한문으로 썼다. 그러면 무대 뒤의 벽면에 바로 그 화선지 화면이 떴다. ‘서경식’이 설명을 끝낸 후 母語와 母國語의 사이에 긴 대각선을 그었다. 자신과 같은 재일조선인 혹은 디아스포라들은 늘 이 모어와 모국어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라며 대각선 위로 사람 하나를 그린다. 책상 앞에서 일어나 여전히 화선지 화면이 떠 있는 무대 뒤로 가 그 긴 대각선 위에 직접 몸을 얹듯이 벽에 몸을 기댄다. 이 설명을 처음에는 그의 모어인 일본어로 하고, 이어 모국어인 한국어로 다시 한번 얘기해 주었다. 나에게는 당연히 모국어이자 모어인 한국어가, 누군가에게는 경계가 되는 일임을 실감하게 해 주는 연출이었다.


무대는 잠시 이야기의 시공간이 바뀌는 연출을 간단히 하고 나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조선족 작가와 ‘서경식’의 대화를 보여준다. 그는 이미 자신의 개인어를 이용해 책을 썼지만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다시 공부 중이라고 했다. ‘서경식’은 그런 그에게 선생님의 언어는 선생님의 역사와 선생님의 개인사가 담긴 개인어이니 그것을 쓰셔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조선족 작가는 연변 억양이 섞인 말투로 반문한다.


“하지만 한국의 독자들이 받아들여 줄까요?”


답을 관객에게 넘긴 채로 한 막이 끝났다.

 

 


이동의 소리: 정주하되 정주하지 못하는



각각 이동수단의 소리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 혹은 여러 상황을 열고닫는 전환의 장치가 되어주었다. 해당 소리들은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처지를 보다 상상하기 쉽게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소리는 주인공 ‘서경식’이 기내에서 만난 중국인 노파의 이야기 속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작은 해프닝에서 ‘서경식’은 중국인 노파에게 경유지 다음 공항인 홍콩에서 내릴 것을 당부하며 그의 후손들의 디아스포라적인 계보를 상상해 본다. 미국에 사는 자식 부부를 만나기 위해 왔다가 돌아가는 길은 아닌지, 그들 가족의 모습은 어떠할지. 그러한 상상의 나래가 언어가 익숙지 않은 낯선 환경에 들렀다 굳세게 돌아오는 노파의 모습이 어떤 강렬한 인상으로 ‘서경식’에게 남았는지 짐작케 한다.

 

비행기 소리와 또 연관된 인물은 일본에서 엘리트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조선인 2세 케이였다. 택시 기사로 일하는 친척과 다르게 화이트칼라인 그는 회사 내에서 ‘조선인이라서’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괜히 시비 걸리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명백한 제약이 있으니 바로 해외여행의 부자유였다. 조선인들은 항상 자신이 조선임임을 증명하는 수첩을 갖고 다녀야 하며, 거기에 검지 지문을 날인해야 한다. 그러니 해외로 나갔다 오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제약이 있어 회사에서 해외 출장을 일임했을 때 케이는 등 뒤로 식을 땀을 흘릴 정도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이 다른 친구들은 하와이 여행도 갔다 왔다며 해외여행을 가자고 떼를 쓸 때 케이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른 가족과 달라.”

 

케이 역시 그의 직장의 특성 덕에 차별받지 않고 살고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명백한 차별과 제약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케이가 갖은 절차적 제약들을 해결하고 마침내 독일 출장을 떠났을 때,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아 바깥의 하늘과 멀어지는 땅을 바라볼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인형으로 표현된 케이는 오묘한 음악과 함께 몸이 두둥실 떠올라–배우들이 케이 인형을 잡고 연기를 펼쳤다-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 필자도 조금 울 뻔했었다.

 

그다음 소리 중에는 마차 소리도 있었다. 마차 소리와 함께 새로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본 오카야마의 조선인 부락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 택시 기사였다. (택시가 배경이지만 마차 소리를 깔아 놓은 점이 재미있었고 택시에 탄 배우들도 자동차 움직임보다는 달각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앉거나 서 있었다. 마차 소리여서 더 향수 짙은 느낌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서경식’이 일본인인 줄 알고 일본어로 말을 걸던 그는 이내 자기 승객이 재일교포인 것을 알고 자기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한다. 가난하고 엉망이었던 조선인 부락에서 고생하며 컸지만, 그곳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그것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때 친구들과 부르던 <빨간 잠자리>라는 일본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며 노래를 몇 소절 불러주기도 한다.

 

그가 일본의 시골 마을을 그토록 그리워하는 이유는, 일본에서도 차별받았지만 고국에 돌아와서도 마냥 한 나라의 따스한 품에 안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어가 서투른 채로 군대에 들어가 선임들에게 심하게 맞았다. 먹는 법, 인사하는 법, 몸 움직이는 법에 다 일본의 방식이 몸에 배어서 일본인 같다며 맞기도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본에 살았다는 이유로 차별과 고통을 당한 그로서는 어릴 적 기억이 남은 아름다운 자연의 그곳이 차라리 그립게 느껴지는 것이다. ‘서경식’도 나도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느껴질 즈음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이야기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뿌우-하고 울리는 뱃고동 소리. 이것은 배라는 이동 수단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한 장소를 상징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것은 항구의 소리다. 부산에서 부모 없이 발견된 조미희, 혹은 기무라 별, 혹은 나탈리 르무안은 일본에서 일본 아이를 원했던 벨기에 부부에게 입양된다. 일본 아이를 입양하기 어려웠던 데다가 한국 아이의 입양 비용이 더 저렴하기도 했던 것이다…. 벨기에 부모에게 나탈리 르무안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그는 고향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다가 어느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라오케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손님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를 추천받고 고향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후일 학술포럼으로 한국에 온 그는 부산을 고향, 즉 홈타운(hometown)이라고 기재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부산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정보다는 출생지이기 때문에 홈타운이라는 말을 택한 것이다. 출생지라는 말이 한국어로는 어색한 말이 아니지만 그가 쓰던 영어로 출생지, 즉 birthplace는 쓰기 어색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디에 있을 때 가장 안정되고, ‘at home’이라고 느끼는지 ‘서경식’은 나탈리 르무안에게 묻는다. 나탈리는 답한다.


“제게는 딱히 어디가 집이고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사방이 막힌 방. 지붕이 있는 곳. 그래서 날 안전하게 해 주는 곳. 거기에 있을 때가 at home이지요.”


케이가 일본에 정주하되 명백한 제약 속에 살고 있었다면, 한국인 택시 기사는 한국에 정주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인해 고달픔을 겪었고 기억 속의 일본 시골 마을을 그리워한다. 그들이 타의로 갖게 된 경계성-식민지배와 민족의 분단이라는 시대상으로 인한-은 그들이 어딘가에 터를 잡고 정주하되 온전히 정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이 메이저리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코 차별의 면죄부가 될 수 없음에도. 한편 나탈리 르무안은 딱히 자신의 고향을 상정해두지 않는다. 그가 마음 놓고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지붕이 있고 사방이 막힌 방이면 족하다. 그러나 방은 ‘어떤 장소에 머무르는’ 정주(停住)의 개념에 적합한 크기의 공간일지 모르나 ‘일정한 곳에 뿌리를 박듯 자리잡고 사는’ 의미로 정주(定住)할 차원의 공간은 아니다. 꼭 모두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이 연극에서 본 모습만으로는 나탈리 르무안 또한 정주하지 못하는 비주류인 것이다.


**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내내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어봐야 완성되는 공연인 것 같아서였다. 하나의 메인 줄거리가 있는 희곡이나 소설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집을 원안으로 삼아 책 한 권을 편집하고 엮어 만든 공연이라 생각하면 극을 만들기가 난해했을 것 같다.

 

오브제와 현장 촬영을 사용하고, 무대의 좁은 공간을 회전 단상으로 커버하는 연출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배우들, 특히 주연 배우의 대사는 거의 내내 선언문을 읽듯이 목소리를 높여 내지르는 발성을 ‘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대사를 그렇게 처리하다 보니 우선 청각적으로 피로했다. 소외된 목소리에 스피커를 대주는 의도였다 하더라도 계속 강조만 거듭되면 외려 강조가 아니게 되듯이, 조금 더 대사 처리에서 섬세한 볼륨과 톤 조절이 있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의 프로그램 북에는 ‘서울기담’ 관계자들이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를 정하고 스터디를 하고 그 과정에서 익힌 감각을 정리한 흔적이 연표처럼 나와 있다. 자그마치 1년을 훌쩍 넘긴 준비 기간 동안 많은 생각과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데에는 연출가의 글에 실린 걱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디아스포라 기행>의 연출가는 혹 타인의 목소리,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이 재구성해 전함으로써 또 한 겹의 왜곡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다고 한다. 적어도 이 공연을 관람한 필자에게 서경식 교수의 책을 찾아 읽게 만들고,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디아스포라들의 목소리를 유의 깊게 듣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의를 가진 공연이라 생각한다.

 

집에 와서 도서 구독 서비스에 서경식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에세이집 『디아스포라 기행』은 이 서비스 내에 없었지만 마침 디아스포라의 눈이라는 책이 있었다. 이 리뷰를 쓰는 지금 나는 이 책을 중반 정도 읽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인상 깊었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공감(共感)이란, 서양에선 compassion[共苦]이라고 하듯 소통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고통에 지나치게 공감하면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계에서 공감의 스위치를 끄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발적 둔감성 때문에 어리석은 짓이나 참사가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타자의 소리’를 들으려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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