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망하지 마십시오 [공연]

연극 '보도지침'
글 입력 2022.03.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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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소속 연극동아리인 해방이화 인문극회가 제 73기 정기공연으로 연극 '보도지침'을 올렸다. '보도지침'은 1986년 전두환 정권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월간 '말'지에 보도지침을 폭로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극이다.

 

답하라, 이 모든 진실들을 감추기 위해 아침마다 신문사로 팩스를 보내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 모든 진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한다.

 

연극은 주혁과 정희의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아침마다 신문사로 오는 지시사항을 보도지침이라 명명하고 584건의 보도지침을 모아 월간 '독백'의 특집호로 발간한다. 국가적 보안 누설을 이유로 재판이 열리고 주혁과 정희는 피고인, 원경은 검사, 승옥은 변호사, 원달은 재판장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모두 한국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선배이자 현재 교수인 원달이 창립한 연극동아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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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 정희, 원경, 승옥은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할 때까지만 해도 사이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금서인 '갈릴레이의 생애'를 공연으로 올리고 경찰에 잡혀가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대대로 부자인 집에서 살아온 원경은 경찰에 잡히고도 아버지의 연줄을 통해 쉽게 풀려난다. 다른 이들도 교수인 원달의 방문으로 풀려나지만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재판 내내 반대의 위치에서 서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몰라서 묻나?

 

원경의 질문은 '좋은 학교, 좋은 학과를 나와서 잘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부와 명예를 뭐 하러 외면해? 왜 이렇게 살고 있냐고? 정말 몰라서 물어?'라고, 반대로 주혁, 정희, 승옥의 질문은 '우리가 함께 연극하며 느낀 것들을 잊었어? 말을 못하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을 같이 경험해놓고도 정말 몰라서 물어?'라고 들린다. 이들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원달이다. 그는 한때 열렬한 사회 운동가였지만 지금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학생들을 말린다. 학생들이 경찰에 잡히고 난 후 그냥 계속 침묵하기를 바랐다고, 자신은 이제 멈춰버렸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제 다들 어디로 갈 건가.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각자 검사, 피고인, 변호사의 자리로 걸어간다.

 

이 상황에서 누가 무조건적 옳고 그르다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가진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에 더 취약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적은 자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도 무언가 바꾸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연극 '보도지침'은 대립하는 상황을 보고 있는 관객이자 재판의 청중인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이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실제로 억압적인 상황에 닥친다면 몸을 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고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이들은 그 후 8년이 지나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세상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바뀐다. 멈추지 않는 세상 속에서 홀로 멈추거나 역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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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재판을, 토론을, 연극을 마칩니다.

 

연극 '보도지침'은 아름다운 결말을 그리지 않는다. 재판이 끝남과 동시에 연극도 끝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이 극의 의의가 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도지침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불과 40년도 채 되지 않았고 보도지침이 아닐 뿐 최근까지도 다양한 문화적 제재가 존재했다. 과거를 직시하며 정확하게 알고 인정할 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과거를 염두에 두고 행동할 수 있다.

 

세상은 이야기처럼 무언가 완전히 해결되고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의의가 담긴 연극 한 편, 이야기 하나를 온전하게 다 봤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위 대사처럼 단지 이야기가, 연극이, 재판이 끝난 것이다. 끝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계속해서 보고, 읽고, 듣고,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고민의 과정에서 절망하지는 말자. 분명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바꾼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승옥의 독백으로 글을 마친다.

 

이토록 강력하고 아름다운 지침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우리는 그 어떤 아름답지 못한 지침에도 길을 잃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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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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