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악의 범상함 - 더 배트맨 [영화]

그러나 영웅은 만인의 영웅일 수 없다.
글 입력 2022.03.14 14: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스틸컷1.jpg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을 다녀왔다. 팝콘 튀기는 냄새와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종종 그리웠으나, 주말에 바깥으로 나와보기란 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하던 것, 먹던 것, 가던 곳 등, 삶을 루틴하게 지내는 나로서는 그렇다. 그럼에도 배트맨의 신작 소식은 관성을 깨보이기에 충분하고, 그 정도로 나는 박쥐 사내 연작을 좋아한다.


나는 배트맨을 히어로물의 일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를 어디까지나 주류 히어로물들과 동일 선상에 둘 수 없다는 정도로 바꾸어 이야기해보면,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지 않을까? 선악의 대결구도를 위해 히어로와 빌런을 설정해두고, 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다루는 것이 히어로물이라고 말해보자면, 주류 히어로물은 단순한 파워게임으로 비치기도 한다. 강력한 빌런, 그에 비례해서 강해지는, 강해질 수가 있는 히어로.


그 옛날 조커가 'You complete me.'라며 배트맨에게 건네본 이 비뚤어진 사랑 고백이 시사하듯, 영웅과 빌런은 서로의 존재의의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뿐 아니라, 서사의 서스펜스를 위하여 둘의 파워는 절묘하게 밸런스가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즉, 영화 바깥에서 히어로 간의 파워게임이 일어날수록, 영화 안쪽의 히어로가 더욱 강력하고도 우월한 능력을 뽐내기 위해서, 악은 더더욱 거대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인공이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고, 수십 톤의 바위 덩이를 맨손으로 들어 올릴만한 배경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가 행성과 우주의 파괴까지 멀리 갈 줄이야.

 

 


1. 시리즈 검토



다크나이트 시리즈 안에서 조커는 배트맨이 자신을 완성시킨다고 하였으나, 반대로 스크린 바깥의 관점에서는 조커에 의해 배트맨과 영화 다크나이트는 완성된다. 결국 히어로와 히어로물을 위해 빌런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관계성이다. 한편 배트맨 시리즈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그 주제의식이 히어로의 탈인간성 및 우월함, 그리고 위대함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그를 위한 선악 양분지계의 무대 위 파워게임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배트맨 시리즈의 즐거움이자, 나로 하여금 배트맨을 주류 히어로물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요소이다.



[크기변환]다크나이트 스틸컷2.jpg

그냥 오토바이로 바꿔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멋있을 뿐.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전작이라고 칭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묘사되는 히어로적 요소들은 비교적(다른 히어로물과 비교해서) 현실적이었다. 그 행태야 어느 갑부의 복수라는 명목하에 행해지는 신개념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다소 맹랑한 모습들이겠지만, 여하간 돈이 많다면 배트카, 배트윙, 배트바이크 등의 탈것들과 고오급 방탄수트 정도는 실제로 있을법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이야기해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기에 히어로물의 탈을 써야 했을 테다.


배트맨은 약한 영웅, 즉 인간으로서의 영웅을 그렸다. 그렇기에 배트카건, 배트윙이건 히어로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소품들은 그저 관객의 눈 호강을 위한 소모품으로 기꺼이 전락한다. 그것은 히어로의 파워 인플레를 부추기지도 않을뿐더러, 악의 척결이라는 중대한 서사적 제재를 해결하는데 필수불가결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소품, 그와 조커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에 이런 것들은 하등 중요치 않다.


배트맨은 보다 현실적이므로, 보다 인간적이며, 필연적으로 약한 영웅이다. 슈퍼맨으로 상징되는 영웅의 탈인간성, 고귀함과 명예, 그리고 웅장한 대흉근은 배트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요소이다. 어떤 책임과 의무를 진 채로 불의에 맞서는 한 인간을 그렸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유약함을 기꺼이 드러낸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거듭해서 배트맨을 몰락시켰고, 그 결과 그는 경찰에게도 핍박받는 신세, 박쥐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는 Freak,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의 자경단으로 전락한다. 참으로 성공적인 몰락이다.



[크기변환]스틸컷2.jpg


 

 

2. 더 배트맨



더 배트맨은 다크나이트의 세계관을 옴니버스식으로 계승한다. 여전히 악이 창궐하는 아캄시티와 특유의 으스스한 지하철, 도시의 상징인 웨인 가문, 그리고 복수에 골몰하는 브루스 웨인과 박쥐의 형상들… 그러나 크리스찬 베일의 그것보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더욱 유약해져 있었다. 보다 더욱 인간적인 배트맨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패틴슨의 모습과 연기 속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 위에는 고독하되 단단했던 크리스찬 베일의 광대뼈가 투사된다. 초췌하고 퀭한 몰골, 살집 없이 움푹 들어간 눈에 검은 칠을 한 채 등장한 '더 배트맨'은 유약하게 표상된다.


그러나 첫 시리즈인 점을 감안하고 보아도, '더 배트맨'에게는 아직 핍진성이 부족하다. '왜 박쥐여야 했는가?'하는 물음에 패틴슨은 아직 답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배트맨의 세계관과 주제의식을 계승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공백. 전작에서 등장했던 '라스 알 굴', 자경단 활동의 까닭인 복수의 동기, 박쥐상징의 탄생배경 등은 생략돼있다. 조금 더 초췌해진 귀공자가 소심하되 끈질기게 복수를 되읊으며, 하필 박쥐분장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작보다 약해진, 그로써 더욱더 인간에 가까워진 배트맨이 형성되고 있다. 이것은 배트맨의 상징인 마스크에서도 드러난다. 매끈한 강철 소재에 깔끔한 매트블랙 빛깔을 띠고 있던 배트마스크는 헤진 가죽소재로 대체되었다. 혹여 주인공이 기절해있더라도 쉽게 벗길 수 없게끔 착 달라붙은 전작의 마스크와 달리, 너덜너덜한 채 곧 벗겨질 것 같은 '더 배트맨'의 마스크는 이 두 옴니버스 세계관의 차이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실제로 패틴슨이 기절한 동안 가면은 벗겨질 뻔 하기도 했다.

 

 

다크나이트 스틸컷.jpg

탐스럽게 매끈한 다크나이트의 배트 마스크

 

 

배트 마스크는 배트맨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시리즈 전체의 아이덴티티이고, 캐릭터에 박쥐의 비유성을 부여하는 핵심 매개인 것이다. 전작이 차갑고도 단단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본작은 쉽게 헤지고 쉽게 벗겨지며, 단단히 들러붙어 있지 않은 속성, 즉 인간의 한계성과 내면의 허술함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더없이 인간적인 속성, 이것, 마스크는 주인공의 마음과 신념에 대한 비유이다.


배트맨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이능력도 아니고, 천재적인 두뇌도 아니고, 그의 자본도 아니다. 그것은 동기유인인 복수를 향한 집념과 내적 신념인 불살주의不殺主義가 결합해 생겨나는 딜레마에 대한 내적 투쟁, 그리고 혼돈의 사회상과 가치관인 정의가 대결하며 발생하는 외적 투쟁, 그 사이에서 탄생하는 숭고함이다. 흔들리는 정신을 안고 혼돈과 대결하는 중에 위버멘쉬로서의 숭고미가 발하는 것, 배트맨의 영웅성은 그의 대결의지, 즉 신념에 토대를 둔다.


이 신념의 속성을 마스크는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차갑고 단단한 마스크와 다 헤진 채 너덜거리는 마스크로써. 전자가 비교적 초인적이라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범상하기에 더욱 커다란 극성을 야기할 단초가 되어준다. 한편, 이러한 범상함으로의 전락은 비단 주인공뿐 아니라 빌런에서도 드러난다. 히어로와 빌런이라는 두 양립 항이 이렇듯 보다 범상해짐으로써, 극성은 줄어들 수도 있겠으나 현실성이 더해져 간다.



[크기변환]스틸컷4.jpg


 

 

3. '더 배트맨'과 '조커(2019)'



극성, '극적인 성질'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극적'이라는 것은 연극이 유도할 수 있는 고조되는 감정, 연극이기에 연출 가능한 장면과 그 앞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고조의 감정을 가리킨다. 이는 '현실적'의 대립 항이다. '더 배트맨'을 보고 나온 길에서 일부 관객들의 평가를 훔쳐 듣는다. 기대한 내용이 아니었다며, 밋밋했노라고 말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극성은 줄어들고 그만큼의 현실성을 성취하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가 아직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까닭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배트맨을 계승한, 히어로물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본 영화에 대해 완전한 현실성을 논해보자면, 즉 현실 사회를 대입해보기에는 자경단 활동과 배트마스크가 방해된다. 어디까지나 다른 히어로물에 비하여 더 현실적일 뿐, 애초 히어로물을 제재로 현실성을 논해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조커(2019)의 성취는 다시금 돋보인다.


여하간 전작 및 다른 히어로물에 비해, 더욱 범상한 주인공과 보다 범상한 빌런이 야기하는 갈등, 이제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서 형성되는 탈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일뿐인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일상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법한 선악의 대결, 내가 읽은 '더 배트맨'의 서사적 맥락은 이렇다.



[크기변환]조커 스틸컷.jpg

조커(2019) 스틸컷 中



영화 '조커'에서 성공적으로 대두된 악의 범상함, 조커의 빌런은 사회적 멸시 속에서 뒤틀려버린 소외 계층의 화신이고, 그러한 이들의 연대와 지지 속에서 힘을 얻었다. 그를 빌런으로 만드는 것은 위의 배트맨이 그러했듯, 이능도 아니고 두뇌도 아닌 것, 오직 내적 동기인 막대한 분노와 광기 자체였다. 달리 말해, 대단한 능력이 없어도, 범상한 누구나가 빌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소외된 한 인간의 광기와 분노가 연대를 통해 거대한 사회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조커가 여기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날카로웠다.


'더 배트맨'의 빌런 또한 위와 유사하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고, 아무런 케어도 받지 못한 채 고아원에서 자라난 소외계층은 기득권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안고 다시 한번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거대한 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범행을 알리고, 텔레그렘을 통해서 범행을 공모한다. 숫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 어딘가 억눌린듯 뵈는 그들, 혼자서는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그들, 더 이상 빌런에게 카리스마는 필수요소가 아니다. 그들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었을 폭탄 제조와 테러계획을 세웠고,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대단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 더 배트맨의 빌런은 더 이상 1인이 아니고, 1인체제도 아니이다.


이제 빌런의 세계는 보스와 졸개들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성장소설에서처럼 작은 악들을 처치해나가며 마왕성까지 성장해나갈 수 없다. 악은 평범 속에 있고, 빌런은 무수한 범인凡人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 '보통의 악'은 악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음을 드러낸다. 또한, 누구나 악이 될 수 있으며, 초연결된 현대사회에서는 쉽사리 거대한 집체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무구해 보이는 이들 사이에 숨어 때를 도사리고 있는 작은 악들, 이것은 반드시 스크린 너머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더 배트맨'에서 한 번 더 곱씹게 되는 주제의식이다.

 


[크기변환]스틸컷3.jpg




4. 선악의 범상함, 그리고 영웅성



범상한 영웅과 범상한 빌런들의 이야기, 그러나 언제나 악은 가깝고 초인의 언덕은 멀리 있다. '빌런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영웅은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쓸 수 있겠다.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나면, 의식 속엔 악의 선명함과 선의 모호함이 대두되곤 한다. 이것, 선의 모호함은 나아가, 무엇이 선인가, 그리고 무엇이 영웅을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곳, 우리의 터전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보였고 이에, 나는 우리의 영웅, 우리의 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 영웅이 기행을 일삼는 어느 괴짜 부자, 배트맨이 되어줄 수는 없기에.


그래, 거기 악은 언제나 얼마든지 있다. 소외라는 고통 속에서 태동한 범상한 악이 연대를 통해 거대해지면, 적인 우리는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피 흘린 이들의 진영은 다시금 일어나 복수라는 정당한 악을 행할 테고 말이다. 복수와 피의 연쇄라는 문제는 비단 다른 예시를 빌려 올 필요도 없을 만큼, 지금에 보편적인 논의가 되어 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이 유명한 딜레마에 대해서,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의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웠다.


'더 배트맨'도 이 문제, 악에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선, 영웅과 영웅성에 대한 보편론의 주장을 펼치지는 못했다.(이 보편적 주장이란, '영웅은 ~해야 한다'로 위시되는 주제의식을 말한다.) 이 딜레마에 대한 과감하고도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소극적으로, '복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라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무난한 서사를 맺는다. 그러나 배트맨이 희망의 전도사로서 맺어지기에는 서사적 맥락 및 근거는 빈약했다.



[크기변환]스틸컷5 (1).jpg



영화의 주장에 따르면 영웅이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누군가. 악이 날개를 펼쳐 사회적 혼란이 창궐하는 때에도 굳건히 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누군가. 참 모호한 이야기이다. 악에 비하여 선은 특정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호함이 아닌가 한다. 선악 모두 그 동기는 각 다르겠지만, 악행은 복수와 파괴로 모든 행위와 목적이 수렴하는 한편, 그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의 선행은 그 행위의 목적을 특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으로, 누군가를 조력하는 방법으로, 누군가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방법 등으로 각각이 펼친 선행에는, 동기가 제각 다른 만큼으로 제각 다른 목적이 발생한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의義일 수도, 배트맨이 그러했듯 복수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을 포괄적인 개념인 '인류애'로 묶어서 볼 수 있을까? 아직의 내게는 이 엉성한 가설에 대한 충분한 근거 및 확증이 없다.


이렇듯 악에 대항하는 선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특정하기가 어렵고, 위기 상황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가 여기서는 선행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 제각각의 선행이 모두 희망의 전도로 묶일 수 있을까? 결과론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어쨌든 두려움 속에 나약해지는 사람들을 제각기의 방법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일 테니 말이다. 다만, 모든 이들을 동시에 일으키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고로 이들은 각자만의 작은 영웅들이 된다.


그렇기에 영웅은 만인의 영웅일 수 없다. 그들의 영웅성이 개인적인 사랑일 수도, 의일 수도, 복수의 결과일 수도 있기에, 각각의 동기 및 행위를 동의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영웅으로 비치고 인정받을 테다. 그래서 배트맨은 누군가만의 영웅, 누군가에게는 괴짜,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서 입체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빌런이 보다 범상하게 그 위상이 추락하였되, 연대함으로써 충분한 영향력을 배태하게 되듯, 영웅도 마찬가지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악이 평범해지는 만큼 선, 아니 영웅성도 평범해진다. 드디어 이것은 스크린 바깥의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을 만큼 지상에 가까워진다.


**


영화가 그러했듯, 나 또한 이 논제에 대해 하나의 과감하고도 분명한 주장을 펼치기에는 실패한다. 우격다짐식으로나마 주장을 던져보기 위해서는 아마 A4 용지가 10장 정도는 더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실패하겠지만 말이다.


가볍게 다루어보기로 한 이번 오피니언도 대차게 실패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길어졌는지 다 모르겠으나, 그만큼 선악에 대한 논증, 영웅과 영웅성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어려운 성질의 것이 아닐까. 이 파편화된 영웅의 초상, 악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쉬이 규합되는 반면, 그 반대 진영은 그렇지 않은 것만 같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영웅, 초인으로서의 영웅의 필요가 여기서 배태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영화 조커가 악의 범상함, 군중 속에 도사리는 보통의 악을 날카롭게 드러냈다면, 본작은 범상해져 가는 영웅, 보통의 영웅을 등장시킨다. 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지도 멋들어지게 그려내지도 못했지만, 이러한 논의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차기작에서는 더욱더 정제된 영웅, 더욱 보통의 영웅이 도래하기를 바라며, 리뷰 겸 오피니언을 마친다.



[크기변환]스틸컷6.jpg

 

 

[서상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02923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3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