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르누이의 최후는 행복했으리라 [도서]

글 입력 2022.03.08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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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그르누이의 무취(無臭) 인생 따라가기. 삼회독 후, 그르누이의 최후에서 그는 행복했으리라 짐작했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태어나자마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주변 모든 냄새를 맡아보겠다는 듯 우악스럽게도 코를 벌름벌름하지만, 어미에게 버려진다. 냄새에 초인적으로 예민한 코를 가진 그르누이는 세상 모든 냄새를 기억하고 머릿속으로 조합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체취만 빼고. 이 세상 모든 냄새를 맡고 분석하고 기억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체취는 없는 남자, 그르누이.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를 매혹할 향수를 제조하려 25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재료로 삼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전작 <비둘기>나 <좀머 씨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이다. 전작은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책이었다면, <향수>는 책에 완전히 빠져드는 데에 몇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읽을 때마다 생각이 새롭게 정립되고, 그르누이에게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책의 장르는'피카레스크'이다. 악인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장르를 칭한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지상 최고의 향을 만들기 위해 25명의 아름다운 여성을 살해하여 향수의 재료로 쓴다. 객관적으로 살인자요, 악인이다. 분명 악인인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약간의 동정심을 느낀다.

 

태어나자마자 '혐오스럽다'라며 버려지고, 체취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평생을 무관심과 혐오 속에 살아온 주인공이 살인을 시작하기 전까지,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리라.

 

주인공 그르누이의 생을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그의 최후는 행복했으리라 짐작한다. 일평생을 무관심 속에 살아온 그르누이가 가장 갈망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남들과 같이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지 않았을까? 25명의 아름다운 여성을 살해하고 그로부터 얻은 체취를 가지고 모두를 매혹할 향수를 기어코 만들어낸 그는, 그의 최후에서 그 향수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향에 매혹되어 짐승처럼 달려든 모든 이에게 뜯겨 죽는다.

 

먼저 찾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에게 모든 사람이, 마치 탐스러운 열매를 본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그가 일평생 갈망했던존재에 대한 인정과 타인으로부터의 사랑따위의 것들이 한순간에 이뤄지는 순간이다. 그는 '죽을 만큼' 행복했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그르누이의 인생 전반에 자리 잡은 모순적 결핍을 채운 가장 화려한 최후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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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향기' 또는 '체취'는 존재의 증명이다. 타인과의 연결고리, 타인에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이 세상 모든 이가 가진 그것을 나 홀로 갖지 못했을 때의 단절감을 생각해보라. 그르누이에게 세상은 불러도 대답 없는 곳이자 한없이 차가운 곳이었을 것이다.

 

책은 총 4장으로, 그르누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다룬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르누이가 보고 느꼈을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시각화되었다. 모든 장면이 이미지로 그려졌다. 색에 대한 묘사 역시 인상적이었다.

 

텍스트를 읽으면 그 향기가 내 코를 스치는 듯한 섬세한 묘사가 쓰인다. 아주 부드럽고 섬세해서, 만지면 바스러질 듯한 묘사다. 세상 모든 향기를 세분화하고 기억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가진 주인공이 느꼈을 세상의 향을 표현해내는 작가, 작가의 섬세한 표현을 우리나라 말로 섬세하게 번역한 역자의 역량에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읽을 때마다 감회가 달라지는 책 중 하나다. 그르누이의 무취(無臭)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최후를 함께하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김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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