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트로이메라이

글 입력 2022.03.0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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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Träumerei, 원곡 로베르트 슈만)

 

 

어떤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버릇이 들기 전에.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햇빛이 쪼뼛하게 들이치는 골목 사이를 내달리던 시절에 먼 나라의 음악을 듣고 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양 볼 위로 죽죽 그어져 내리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로베르트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그 둘로 색칠된 계절이 있었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 신발을 발끝 위로 벗겨질 듯하게 걸쳐 놓고 달랑거리길 좋아하던 아홉 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노래.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동네를 배경으로 힘껏 발을 굴러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무대에 올라타고 나면, 그 속도로 인해 생긴 바람이 볼 위로 나부꼈다. 삐죽하게 솟은 첨탑. 발갛게 불이 켜지기 시작한 십자가와 하나둘씩 누렇게 물드는 창문들. 취사를 알리는 전기밥솥의 축축한 냄새가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불러 젖히는 어머니들의 목소리. 오토바이의 주황색 배기음. 전깃줄을 포르르 떠나던 까만 새들의 날갯짓. 쿨럭거리는 수위 아저씨의 비질이 싸하게 가짜 빗소리를 만들어내면 조금만 더 늦게 집에 들어가고 싶어서 특별한 까닭 없이 아파트를 한 바퀴 더 돌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순간을 더 길게 늘이기 위해 페르마타(Fermata). 모퉁이를 돌아 흘러가는 선율처럼. 발걸음은 고양이처럼 사뿐히. 건반 같은 보도블록을 가로지르며 솔-라-시 플랫-레. 온갖 색채가 뒤섞인 어린 날의 향기로운 폴리포니(Polyphony).

 

그린 것 같이 평화롭던 때. 실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완벽해서 환상 같던.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초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그러나 어린 나는 그 정경(情景)이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신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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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에 다시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면서 파랗고 노란 정경을 품고 사는 키이우(Kyiv)의 어린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다른 재질이지만 동일한 악보를 가지고 있는 (어른)아이들에 대하여. 푸른 자유와 금빛으로 넘실대는 에너지를 강탈당한 작은 삶들을 더듬거리며 상상한다.

 

따뜻한 평화가 폐허가 된 광장의 돌길 위로 내동댕이쳐져 식어가는 모습을 브라운관 너머로 지켜보면서 나는 열병에 시달린다. 파괴당한 기억을 애통해 하듯, 부드럽던 슈만의 선율은 어느새 그리움으로 바뀌어 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그리움. 다시 만나는 날을 기약해야만 하는 그리움. 강제로 안겨진 그리움. 평화를 평화로 인식하지 못했던, 사랑스럽게 천진하던 시절이 가슴 안에서 바스러진다. 공교롭게도 키이우에서 태어난 늙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나를 자꾸 밀어 떨어트린다.

 

그렇게 영혼은 어느새 유라시아를 내달려 수선스러운 기차역 한가운데로.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은 소녀의 젖은 얼굴 위로. 버려지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어린 개의 눈망울 앞으로. 돌아서는 아버지의 군복 위 셔츠 주머니 안으로. 종탑 아래서 손을 맞대어 조용히 기도하는 노인의 주름진 손 틈 사이로. 떨어진다.

 

그렇게 나는 어린이가 되었다가 청년이 되었다가 다시 노인이 되는 짧은 주기를 무수히 겪는다. 마음은 쪼개지는 셈여림에 맞춰 밀물과 썰물을 반복한다. 어디선가 꺼져가고 있을 생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어떤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영영 모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유독 짧게 느껴지는 곡을 원망하며 일상을 도둑질 당했으나 강인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지켜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고향에 돌아와 꿈을 연주하는 호로비츠의 선율을 뒤로 한 채로, 인사를 나눌 일 없는 이들의 안녕을 빈다. 그들이 잃어버린 악보를 되찾기를 바라면서 지혈하듯 자판을 누른다. 파랗고 노란 트로이메라이. 아주 긴 리타르단도(Ritardando)가 있어 영원히 끝이 오지 않을.

 

*


*페르마타(Fermata): 늘임표, 음표 길이의 2-3배 늘여서 연주하는 것.

*폴리포니(Polyphony): 독립된 선율을 가지는 둘 이상의 성부로 이루어진 음악. 또는 그런 형식.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는 폴리포니적 형식으로 곡이 전개된다.

*리타르단도(Ritardando): 점점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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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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