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은 열린 문, '연애 빠진 로맨스' [영화]

글 입력 2022.03.0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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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욕구나 욕망을 혼자 해소하는 게 가능할까? 혼자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건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인정받고 싶고, 마음 편히 기대고 싶고,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 인정하고 칭찬하고, 내가 나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엔 혼자인 게 난처하고 초라한 날도 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상황이야 불쑥 생기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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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빠진 로맨스>. 사랑 앞에서는 호구인 함자영과 박우리도 그래서 만났다. 데이트 어플에서 사지육신에 멘탈이 멀쩡한 사람을 만난 성공기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사이비 종교도 없고, 알고 보니 임자가 있다든가, 못 미더운 부분은 없었으니까. 자영은 오래 사랑했던 애인이 곧 결혼한다는 이야기에 이것 봐라 하는 것처럼 새출발하고 싶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직장 동료는 약혼남도 있다면서 자기 힘들 때만 불쑥 찾아오고, 팔자에도 없는 섹스 칼럼을 맡아서 당장 함초롱바탕체 11포인트로 3천 자를 써야 한다. 서로에겐 결국 서로가 일종의 소재로 필요했다. 장르는 로맨스고, 로맨스에는 상대방이 필요하니까. 혼자 하는 사랑은 이미 해봤으니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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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영에게 말하지 않은 건 예상보다 큰일이 됐다. 데이트 어플에서 설날 대낮에 원나잇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가 생각보다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에 소주를 먹고 모텔에 갔다가 나왔다는 게 다라니. 김 빠지긴 하지만 웹툰에서도, 웹소설에서도 댓글이 난리다. 작가님 컷이나 내용이 잘릴 건 같다고 다시 확인해달라고. 드러내 놓고 잘 쓰는 것도 재능이지만 탄식을 자아내는 생략도 좋다. 다들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각자 왜 그렇게 제 몫을 톡톡히 했는지. 그게 문제였다. 자영은 매력적이었고 둘은 케미가 좋았고, 우리는 섹스 없는 섹스 칼럼을 썼다. 결과는 50만 조회수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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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친구 삼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참 좋았다. 모두가 술을 마실 때 혼자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했던 말을 또 하고, 울고, 웃고, 눈이 풀린 만큼 발음도 풀리는 그 상황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헛소리만 난무하는 그 사이에 사람들은 이성이나 두려움으로 닫아두었던 경계를 풀고 진심을 말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더 좋은 건 적당한 핑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놈의 술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면 더 좋고, 어지간한 바보 같은 실수는 술이 감싸준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술 때문이라고 한다면 등짝을 칠 일이겠지만 술자리는 그렇다. 결국은 경계가 사라졌을 때 사달이 나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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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의 대화로 둘은 서로의 호구스러움을 이해하게 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자영이 꾼 꿈. 그녀와 하는 게 더 좋다는 얼굴 없는 남자의 말 한마디. 자영은 헤어지고도 그가 좋아서 파트너로 3년. 내 몸이 더 좋다면서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가있던 사람이 꿈에 나왔다. 그의 결혼식을 파토를 내지는 못했지만 우리 덕분에 축의금 리스트를 훔쳐오는 소심한 복수를 하고는 마음이 후련해졌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만큼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일이 있을까. 나와 만날 수 없는 걸 알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데, 나보다 먼저 행복해진다니. 아마 그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헤어지고도 나를 흔들어 놓는 게, 알면서도 흔들리는 게. 나를 상대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게. 이성이 돌아오면 그런 사람과 헤어진 게 조상신이 도왔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심사가 묘하게 뒤틀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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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늘 알면서도 당했다. 약혼남과 뭔가만 틀어지면 조용히 그를 찾아와 기대고, 울고, 몸으로 위로도 받는 그녀를 밀어내지도 못했고, 따지지도 않았다. 자영 말대로 용기가 없다. 그런 사이라도 좋았는지도 모른다. 자영을 만나고 칼럼을 쓰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녀와 조금씩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사랑 없는 연극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이 로맨스에선 적어도 우리와 자영은 '따까리 조연'은 아니었다. 둘이 서로에게 주인공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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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심장이 뛰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놀이공원에서 자영은 우리가 둘을 소재로 칼럼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 즐거운 곳에서 불행이 찾아와야 제맛이니까. 대관람차에서 직접 얘기하기도 전에 그것도 핸드폰에 뜬 알람으로. 차라리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했다면, 오히려 뮤즈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처음 평양냉면을 먹을 때 사실 나도 데이트 어플은 처음인데 섹스 칼럼을 써야 해서 나왔다고,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겠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라는 답변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둘의 다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대로 숨기고 썼다지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얼굴이 안 보인다고 또 오만가지 댓글을 달아놨다. 웹툰에 나온 캐릭터들이 독자들이 댓글로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멘탈이 멀쩡했을까? 트루먼쇼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놀이공원 이후의 현실은 암담했다. 자영은 우리와 대화를 하고 인터넷에 녹취록을 올렸다. 우리는 신상이 털리고, 쓰던 칼럼은 망했고, 회사를 나왔다. 우리의 칼럼과 자영의 녹취록에는 정황상 상대방이 누구라는 자료가 뚜렷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서로 소송까지는 가지 않은 듯하다. 소송을 시작하면 칼럼의 주인공이 자영이라는 게 더 명확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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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그녀가 드디어 맨 정신에 오랜 마음의 빗장을 열었는데 그게 다 쇼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에 들린 이후로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섹스를 하다가 우리가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벌떡 일어난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게 전부 쇼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니까. 미리 이야기를 하든지, 들키지 말든지. 스스로는 감정 없는 연극이라고 했으면서 그가 정말 조금이라도 쇼를, 연기를 했을까 봐. 그리고 자신과 나눈 둘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버린 것도 원망스럽고.


자영이 우리를 두고 '얘랑도 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말한 건, 결국 나만 또 진심이었고 마음을 연 대가가 상처뿐이라는 말이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나? 어느 사랑이든 좋은 기억만 있었더라면 우리가 사랑에 주저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모르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그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걸 탓할 수 있을까. 사랑 앞에 사람 바보 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 모든 일이 한 해동안 일어난 일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시간은 지나 다시 새해 설날이 되었다. 자영은 또다시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둘이 처음 만났던 평양냉면 집에서 우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서 냉면에 낮술을 하고 있다. 평양냉면이 맛도 없다더니, 자영을 생각하면서 종종 왔단다. 설날에만 올 줄은 몰랐다면서, 연애만 안 해봤으니 연애하면서 다 갚을 수 있게 해 달란다. 그러게 단골집은 누굴 데려가면 마주치게 된다니까. 이 둘이 연애를 할 수 있을지, 만나다 헤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표정은 나쁘지 않고 같이 길을 걷고 있다. 연애인지, 로맨스인지, 장르나 내용이 뭔지는 둘만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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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단계나 순서라는 게 있을까. 밸런스 게임도 아니고 몸만 좋거나 마음만 좋거나, 특정한 면만 좋을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게 좋지 않으면 유지될 수도 없다. 사람은 열린 문이지만 그 문을 열기 전까지 달린 잠금장치는 제각각이다. 누가 더 쉽고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상처가 잠금장치일 가능성이 높다.


이전에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자영은 '내가 소설 쓰게 해 줄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우리가 그때의 자영의 표정을 잘 기억했으면 좋겠다. 진심이었니까.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도 다시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빙글빙글 돌려서. 소설이야 잘 쓰든지 말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자영과 헤어진 시간 동안 우리가 어쩌면 소설을 한 편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진심이었으면 하니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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