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사랑한 그 순간들. [사람]

글 입력 2022.03.0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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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한 책이 있다. 바로 ‘쉬운 천국’이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나에게 있어 쉬운 천국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일지 궁금했다. 때마침 휴일이었던 그날에는 떠올렸다. 내가 오롯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의 사랑하는 그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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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가족들과 영상 통화할 때

두 번째, 막냇동생의 뱃살을 백허그 하면서 만지기

세 번째, 밤에 연속으로 영화 3편 보기

네 번째, 주말 오후에 애정 하는 음악 들으며 정처 없이 걷기

다섯 번째, Pinterest에서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저장하기

여섯 번째, 아침에 일어나 그날의 기분을 결정할 음악 듣기

일곱 번째, 빗소리 듣기

여덟 번째, 밤에 휴대폰의 손전등 키고 에어팟 끼고 춤추기

아홉 번째,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하기

열 번째, 출근길의 지하철에 해 뜨는 모습 보기

 

열한 번째, 창문을 열어 한 번에 많은 바람을 만끽하기

열두 번째, 서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다리가 조금 아파질 때

열세 번째, 친한 친구들과 보내는 정적의 시간

열네 번째, 영화관에서 영화 오프닝을 볼 때

열다섯 번째, 취향인 새로운 노래를 발견했을 때

열여섯 번째, 동네 바다에 홀로 서있을 때

열일곱 번째, 온몸이 찌릿한 소맥의 첫 모금

열여덟 번째, 책 읽으면서 초콜릿 먹기

열아홉 번째, 할머니의 손 주름을 만질 때

스무 번째, 나의 눈만 살아 있는 어두운 새벽

 

- 내가 사랑한 그 순간들.

 

 

이 스무 개를 적으며 보낸 시간은 2시간 13분이다. 나를 순식간에 하늘 위로 올려줄 시간을 적는데 단 2시간 13분이 걸렸다. 뿌듯하다. 내가 아끼는 순간들을 글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오색 가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을 적는 순간에도 나는 스물한 번째의 사랑한 그 순간을 만났다. 하나씩 적으니 그때의 감정이 수채화처럼 옅은 색감으로 나에게 젖어들었다. 한 문장씩 읽어보면 알겠지만 휘양 찬란한 시간들이 아니다. 이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으며 어느 하루의 곳곳에 작게 피어있다.

 

스무 가지의 것들 중 한 가지만 하루에 존재한다면 그날은 또 내일을 살아가는,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된다. 한 번 더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할머니의 주름을 만지고 싶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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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묻는다.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느 이는 누가 봐도 손뼉 칠만한 멋진 수식어들로 문장을 꾸미겠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은은한 수식어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사실 작은 것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작은 것은 연약하고 미미하고 쉽게 즈려 밟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은 것이 어느 곳에나 숨 쉬는 이유가 있다. 바로 본질이기 때문이다. 원래 인생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따라서 작은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물리적인 크기와 상징적인 크기는 반비례한다.

 

나를 짧은 시간에 바꿔줄 작지만 큰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절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필요한 시간은 구체적인 수치는 없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읽으려 노력했던 사람은 짧게 걸릴 것이고 나를 내팽개치던 사람이라면 던져버렸던 거리만큼, 홀로 두었던 시간만큼 더 걸린다.

 

쉬운 방법이 있다. 내가 쉴 때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스무가지 모두가 내가 쉴 때 하는 행동들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나의 몸이 정적일 때 하는 모든 것들이다. 나는 이로 인해서 편안함을 얻고 고민의 해답을 얻기도 기분의 창문을 활짝 연 듯 상쾌하다.

 

누구는 게임에 로그인하는 그 순간일 수도 있고 이부자리에 누워 유튜브 어플을 눌러 알고리즘을 살펴보는 그 순간일 수도 있다. 유난히 한국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어떡해 생각할지에 많은 영향을 받지만 그 이유 때문에 이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휘양 찬란하게 멋스러운 수식어로 꾸밀 필요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임을 인지하며 그저 나에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언질 할 자격이 없다.

 

바람이 있다면 나의 스무 가지의 사랑스러운 장면을 제외하고 30개를 더 찾는 것이다. 분명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숨겨진 사랑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순간을 사랑하는지 또 그로 인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더 넓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벌써 셜록이 흥미진진한 사건을 만나 추리를 하듯 나의 삶의 이유를 한 조각씩 찾아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보려 한다. 기대가 된다. 아주 많이.

 

 

[황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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