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좋은 문화란 무엇인가? - 그 해답은 당신의 것

글 입력 2022.02.2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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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문화’에 좋음이나 나쁨, 옳거나 그름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적용하여 구분 짓는 것은 다소 위험한 접근법임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물론 문화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을 밝힘으로써 건강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칼럼을 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이 지면을 그렇게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나조차도 적확한 답변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에 의견을 보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특정 논제에 긍정적 속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문화’를 정의한다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대척점에 부정적 관념을 비추어 보게 된다. 그러나 긍정의 뒷면이 언제나 부정이라는 법은 없다.

 

좋은 문화가 무엇인지 논하려면, 나만의 해답이 있더라도 그것을 부러 드러내기보다는 상대를 향해 반문함으로써 다양한 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문화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겠다. 오히려 부가적인 문답을 통하여 본 주제에 관한 답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란 다음과 같다.

 

 

문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문화의 정의를 대강 파악했으니, ‘좋은 문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세 개의 문답을 시작해보겠다.

 

 

  

문화는 사회적 권위를 대변하는 지표로서 기능하는가?


 

문화는 행동 양식 혹은 생활 양식이다. 그리고 그 양식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산물인 언어, 풍습, 학문, 예술 또한 문화에 속한다. 누군가가 이러한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은 어쩌면 그가 가진 사회적 권위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명명한 ‘문화 자본’이라는 개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적용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타고난 집안 사정이나, 시장에서의 경제적 손익, 혹은 권력을 점하기 위한 경쟁에 따라 자본을 부여받을 수 있다. 자본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며, 누군가의 성취를 증명하는 훌륭한 트로피이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문화 또한 이러한 자본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자본의 정도가 확연한 가정환경을 나타내는 ‘금수저’나 ‘흙수저’ 등의 용어가 있듯이, 문화를 마음껏 누리는 것 또한 ‘문화 자본’이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에게 주어지는 혜택일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jpg

피에르 부르디외

 

 

예컨대 피아노 연주에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아이는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굴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문화 시장의 생산과 소비의 흐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행운아다. 맞춤형 생활 양식(문화의 일부)이 주어진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피아노가 있는 학원이나 학교 등에 가서 연주해야 한다. 또한, 훌륭한 교육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피아노를 잘 아는 지인에게 무료로 교육받는다면 이는 학문(문화의 산물) 접근성이 높은 환경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금전을 지급하여 교육받는 예도 있다.

 

모든 것은 ‘문화 자본’을 갖춘 아이만이 누릴 수 있다.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문화 자본을 아예 못 누리는 사람도 존재한다. 살면서 한 번도 피아노를 접하지 못할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재능을 발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문화 자본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문화 자본이란 언제나 화폐로 환산할 수 있는 자본의 개념이 아니므로, 순전히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문화? 예술? 그거 누리려면 잘 살아야 해’.

 

잘 사는 사람만이 문화 자본을 누린다는 뜻이다. 상술했던 예시에서 볼 수 있듯, 높은 사회적 지위와 소득을 갖춤으로써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넉넉한 문화 교육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저소득층 예술가 혹은 학자가 부단히 노력하여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이를 문화 자본으로 환산한 경우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 자본과 사회적 지위는 비례 관계인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문화 자본을 쉽게 획득할 수 있는가? 문화 자본이 없는 사람은 지위의 상승을 꿈꿀 수 없는 것인가?

 

 

 

문화는 세습되는가?



혈연에 따른 세습은 단순한 부의 축적만이 아닌 문화의 세습을 불러올 수도 있다. 삼성그룹을 이끌었던 고 이건희 회장이 사망한 뒤에 그가 보관했던 미술 작품 컬렉션(문화 자본)이 공개되고, 작품들이 지닌 상상 이상의 질적 및 양적 가치가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킨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는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문화가 얼마나 방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가 되었다. 만약 이건희 회장이 이것들을 유산으로 남겨두어 세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특정 장소에 장기간 보관할 수 있고, 유형 물건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으며 대중의 판단에 따라 금전적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미술품’은 현금과 매우 닮아있는 문화 자본이다.

 

미술은 자본주의와 가장 밀접한 예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그 작품들이 현금화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예술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력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혹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사망함으로써 문화 생산자의 대가 끊긴다면 문화 세습은 이루어질 수 없다. 예컨대, 이따금 국가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가 사람 그 자체인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특정 문화 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유일무이한 전문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우, 가수 또는 연주자도 마찬가지다. 그들만이 생산할 수 있는 문화 자본의 가치는 그들의 존재와 더불어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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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이후로, 그를 동경하는 이들이 아무리 그를 모방하려 해도 프레디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그가 문화 자체였기 때문이다. 세습할 수 없는 문화인 것이다. 하지만, 먼 훗날에 AI 기술이 발달하여 프레디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그러니 정답은 없다.

 

문화는 세습되는가? 세습되는 문화는 좋은 문화인가? 당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능력주의에 따른 문화 자본의 향유는 공정한가?


 

마지막 질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는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를 지적한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전체주의가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이라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 변화의 책임을 ‘능력이 부족한 개인’에게 몰아서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갑과 을의 관계, 사회적 다수자와 소수자의 관계, 차별과 혐오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능력주의가 누군가의 성과를 증명하고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수고로움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순기능을 가진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을 학업적 성과로써 제때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통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교육 또한 문화다. 단순히 미술, 음악, 체육 등을 포함하여 ‘예체능’으로 부르는 것뿐만이 문화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교육받는 학생의 재능(혹은 능력)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매듭지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특정 시기를 놓치면 자신의 능력을 쌓기에는 틀렸다고 보일 수 있다. 학생의 능력이 진로를 결정할 수도 없거니와,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책임이 오롯이 학생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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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가 미대를 나왔을까요?

 

 

나는 예술 계통의 종사자이기에 이러한 현실이 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예술이라는 문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 자본은 능력주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체육인들은 스스로 능력을 키울 수 없을 정도의 어린 나이부터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 몸을 다듬어야 한다. 부족한 실력이 개인의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어릴 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이 체육인, 더 나아가 예술인들이다.

 

혹자는 “일단 현실에 순응하고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한다.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으면 이런 판단을 내릴까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엘리트 교육이 잘 굴러가게 만드는 톱니바퀴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사회의 요직을 부여하고 이득을 부여하자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긍정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핵심은 ‘능력주의에 따른 문화 자본의 향유’다. 능력주의는 때에 따라 문화 자본을 고르게 분배할 수도 있다. 경쟁에서 승리하거나, 학위를 받거나, 작품을 출품하여 유명해짐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사람은 문화 자본을 제대로 누리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능력주의가 문화 자본을 누릴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 예술 학교는 시장 논리에 크게 좌우된다. 자본이 부족해 예술 학교의 학위를 얻지 못한 학생은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문화 자본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어릴 적 교육을 받지 못해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은 성장한 이후에 문화 자본을 누리고자 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이것 또한 정답은 없는 문제다. ‘능력주의를 타도하라’ 내지는 ‘능력주의가 옳거나 그르다’ 따위의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질문에서 ‘공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어떤 방식으로 이 공정성을 회복하거나 보완하여 키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

 

모든 문답이 끝났다. 짧은 글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의 기회를 제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자들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실 ‘좋은 문화’를 찾기 위한 여정은 이것보다 더욱 길고 험난해야 마땅하니, 문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계속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각자의 특별한 해답이 세상을 다채롭게 빛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이남기 컬처리스트.jpg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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