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저격하지 않을 영화

<영화 조찬클럽(The Breakfast Club)>
글 입력 2022.02.2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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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저격하지 않을 영화

<영화 조찬클럽(The Breakfast Club)>

 

 

"나는 누구인가?"

 

천 글자로 적어야 한다. 주말 아침 학교 도서관애서 써야하는 반성문은 따분해보이나 썩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고개를 돌리면 걸출한(베껴쓰기 좋은) 책들이 빽빽이 꽂혀있고 앞뒤로는 같이 벌을 받는 친구들도 앉아있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아홉 시간, 반성문을 쓰기에 꽤 넉넉해 보이는 환경이다.

 

영화 조찬클럽(The Breakfast Club)은 1985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다.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을 하지 않아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최고의 하이틴 영화로 꼽힌다. <나 홀로 집에> 시리즈를 찍은 존 휴스 감독의 영화로 당대 청춘 스타들을 대거 탄생시켰으며, 심지어 OST는 그해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다. 영화 평론가들이 호평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며 <범블비> <피치퍼펙트> <스파이더맨: 홈커밍> <레디 플레이어 원> 등의 오마주로 등장해 80년대 청춘물의 상징으로 불린다. 2015년 개봉 30주년을 기념해 430여개 극장에서 재상영이 되었고, 2016년 문화·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영화등기부 소장작으로 선정됐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하이틴 영화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요즘 이 영화를 다시 찾아서 튼 까닭은 취향을 저격하지 않아서다. 철 지난 패션이나 유머 코드는 말 할 것도 없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누구 한 명 취향을 저격하지 않는다. 범생이, 반항아, 공주병에 아웃사이더와 같은 극중 인물들은 특출난 매력보다 뚜렷한 문제가 있다는 공통점만 있다. 반하기 쉽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가 생각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래서 지금이다.

 

취향 저격이 일상이 되고 왠만하면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찾기 쉬운 시대. 한 번의 검색어로 연관 제품과 서비스를 볼 수 있고, 전에 봤던 영상과 닮은 콘텐츠가 '다음에 볼 영상' 자리를 빼곡하게 채우는 시대. 그래서 이따금 보지 않고도 지루해지고, 때로는 보기도 전에 식상해지는, 그래서 더 새롭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고 있는 시대, 영화는 담담히 말한다. "당신의 취향을 저격하지 않는 사람이 말할 수 있죠.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당신의 취향, 아니 당신이 누구인지 마저도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며.

 

“버논 선생님, 우리가 누구인지 에세이로 작성하라는 것은 말이 안되죠. 선생님은 이미 원하는 대로 우리를 보고 있으시죠. 가장 쉽고 편한 방법으로. 그렇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달라지는 건 자신이다


 

벌을 받기 위해 모여든 다섯 명은 공통점이라고는 없다. 각자가 불리는 별명만 봐도 그들의 배경과 상처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성적에 대한 과도한 압박으로 권총 자살을 시도한 브라이언, 세상을 승부로 여기는 아버지로 인해 약자를 괴롭히게 된 앤디, 부모의 잦은 다툼에 대한 불안을 사치로 억누르는 클레어. 그리고 가정 학대를 피해 일탈하게 된 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자 이상 행동으로 주위를 끄는 앨리슨. 그들은 서로 다르다. 마주칠 일도 없고, 그래서 이해 할 일도 없었다. 자신의 반성문을 쓰기 전 까지는.

 

맨 처음 다섯 명이 한 공간에 갇히고 나서, 서로에게 물어본 것은 어떤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지다. 사교와 운동, 물리나 수학과 같은 클럽으로 서로의 배경, 계급, 취향을 파악-단정하며 관계의 여지를 잘라버린다. 이 곳이 아니었으면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말미, 브라이언은 다시 묻는다. "우리가 월요일 아침에 서로에게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대답을 머뭇거린다. 인사조차 하기 어려울만큼 서로가 사는 세계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 경계가 깨져도 세계가 섞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임을 알기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모임. 그래서 ‘조찬’클럽이다. 배경과 취향이 같지 않은 클럽은 그 의미만큼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이 장소 밖에서 만날 일이 없다는 건, 의도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서로가 속해있다고 생각한 곳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그래서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꺼내놓을 때. 언제든. 내가 살던 일상에서 마주치지 않을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아진다면, 삶 곳곳에 그러한 순간들이 생긴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알게 될까.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는 것? 상처를 덧나게 하거나 낫게 하는 법? 혹은 상처인줄 알았더니 흔적이었던 것. 어쩌면 애초부터 상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까.

 

 

 

잘못의 정의가 달라지면, 모든 것이 변한다


 

"100만 달러를 얻을 수 있다면 어디까지 할래?" 자신의 상처를 터놓은 후 친밀해진 다섯 명이 둘러앉아 묻는다. 얻고 싶은 것을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대답을 주고 받으며, 다시 묻는다. "그런데 백만 달러는 누가 원하는 건데?" 누군가는 쟁취를, 누군가는 양보를, 누군가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하라고 배웠다. 서로의 소속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행동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 그들은 각자가 속한 집단의 기준이 그들의 결핍을 정의한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리더 혹은 군중이 되어야 하거나, 눈에 띄어야 하거나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도.

 

그들은 반성문을 쓰며 고백한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니 했다고 불리는지, 그래서 문제아가 되어온 과정을 깨닫는다. 그것은 때로는 잘못이 아니며, 잘못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나와 행복의 정의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한 심리학자는 '내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갖고 있지 않고도 행복한 사람을 만나볼 것'을 권한다. 세상에는 꽤 많다. 내가 바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살펴 봐야 할 이유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정의했던 도전, 성취, 여유, 행복의 기준이 바뀌면 달라지는 것은 나에 대한 정의다. 스스로를 설명하는 내용이 달라지면, 앞으로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선생님 우리도 오늘 오전 일곱시에는 서로를 그렇게 봤어요. 그러나 이제는 저희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어요.” 조찬클럽 일동

 

우리의 일상에 조찬클럽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가 될까? 이미 나의 주변에 나와 비슷한 환경, 소속, 사람만 있다면 조찬클럽을 찾아 나서는 것도 좋겠다.

 

가장 가깝게는 내가 검색하지 않았던 해시태그를 검색해보고, 관심없는 분야의 기사를 읽고, 보지 않을 주제의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생각과 취향이 있음에 꽤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될 테니까. 그리고 생각하던 것과 또 달라서, 그리고 비슷해서 또 다시 놀라게 될 테니까.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모자라다고 숨겨왔던 것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점점 우리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는다. 우연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이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다.

 

반성문을 쓴 후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던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힘껏 끌어안는다. 그렇게 영화는 여지를 남긴다. 어쩌면 조찬클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다음을 기대해도 된다는 것. 서로 알게 된 것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기에.

 

‘나는 누구인가.’ 조찬클럽은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를 정의할 수 없다고, 개성과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우리는 결코 한정지을 수 없다고. 지금껏 써오던 해시태그가 달라지고 연관검색어가 변하는 시간. <조찬클럽> 취향을 저격하지 않을, 영화다.

 

 

 

 

[김윤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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