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욕망 할 수 있는 자유 [영화]

글 입력 2022.02.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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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수업 시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Jacques Lacan(자크 라캉)’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욕망 이론’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이 비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이 비어있는 공간을 살아가는 동안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완벽하게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욕망의 미끄러짐’이라고 한다.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 즉 원하고 또 원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처음 듣고 내 머리속에 떠오른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엠마 보바리’이다. 그만큼 엠마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의 대명사이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단순히 물질적 욕망만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마담 보바리’가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고전인 만큼 많은 리메이크작들과 주인공 엠마를 향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1949년 개봉한 ‘마담 보바리’와 2014년 개봉한 마담 보바리 속의 엠마를 비교해보고 그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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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를 비교하기 전에 편의를 위하여 1949년작을 A, 2014년작을 B라고 칭하기로 하였다. 각각의 작품 속에서 엠마는 다른 인물이라고 다가올 정도로 다르게 그려진다. A에서의 엠마는 활발하고 적극적이지만, B의 엠마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여러가지 세부 설정에서 알 수 있다. ‘찰스’와의 신혼집을 대하는 엠마의 태도가 그 예시이다. A에서는 ‘잡지에 나오는 집’을 목표로 삼아 적극적으로 집을 꾸미지만 B에서는 부티크 상인의 설득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데서 그칠 뿐이다. 공통점은 집을 사치품으로 채워가면서도 공허함을 느끼고 대도시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사였던 찰스가 다리가 쓰지 못하는 하인의. 수술을 제안 받았을 때도, A의 엠마는 찰스의 명성을 높힐 기회라며 열심히 그를 설득한다. 그러나 B의 엠마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작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런 엠마의 태도는 아이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에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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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를 따는 엠마는 행복해보이지만, 그가 딴 사과는 바구니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마치 엠마가 꿈꾸는 삶이 ‘사과나무 아래서 오렌지 향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허황된 꿈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플로베르의 재판에서 사람들은 아이를 방치하고, 간통을 저지르는 타락하고 경멸스러운 여자라며 엠마를 비난한다. 그리고 영화 속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담 보바리’는 3대 불륜 소설 중 하나로 유명하고 몇몇 독자들은 엠마를 비난한다. 나 역시 엠마를 그저 ‘권태에 질려 간통을 하고 사치를 부리다 파멸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불륜에 대한 부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을 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마담 보바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에 대해 다루고 있다. 라캉의 욕망 이론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욕망한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향해 ‘나의 로망’이라고 말하는 아주 흔한 현상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진다. 엠마가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지 못하고 회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욕망이 잘못 만났을 때 일어난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엠마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파멸을 경고하고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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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에게 엠마의 존재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성의 신체 노출이 금기시되었던 시대에서 미니스커트를 입는 행동과 긴 머리나 화장, 마름 몸 같이 여성만을 향한 외모 코르셋이 만연한 현재에서 탈코르셋이 여권운동이듯이 엠마라는 캐릭터의 존재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은 정숙하고 조신해야 한다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대에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엠마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2세기가 지난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흔히 ‘속물적’이라고 표현되는 여성을 향한 혐오 발언이 문제의식 없이 사용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혐오 표현과 여성상이 미디어 콘텐츠에서 개그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 권력에 대한 갈망이나 노력이 남성에게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성에 대입해보면 ‘기가 세다’, ‘독하다’ 등의 말로 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마담 보바리’가 현재가지도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엠마가 원했던 세상이 도래할 때는 공교롭게도 ‘엠마’가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 ‘엠마’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순간 말이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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