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을 찾아서

영화 <캡틴 판타스틱> 속 캡틴 파헤치기!
글 입력 2022.02.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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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줄거리를 비롯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음을 밝힙니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을 본 건 재작년 겨울이었다.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에 ‘캡틴’이 들어가서. 나는 ‘캡틴’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다. 이것에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역할이 크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명대사는 어린 시절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캡틴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멋지고 슬프다니. 또 ‘캡틴’이라고 발음 자체도 왠지 터프하고, 듬직하다. 캡틴이라고 부르면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단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1] 이러한 이유로 <캡틴 판타스틱>은 줄거리도, 배우도, 감독도 확인하지 않고 단숨에 플레이 버튼을 클릭했다.

 

 

캡틴판타스틱 포스터.jpg

 

 

 

Hello, Captain



영화는 활로 쏴 죽인 야생 동물의 피를 얼굴에 바르며 생간을 베어물곤 아버지로부터 ‘남자가 되었다’며 비로소 성인임을 인정받는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첫 감상평은 이것이었다. ‘불편하고 껄끄럽다’. 야성적인 성인식을 보며 영화의 시대적 배경, 공간적 배경을 추측하는 것으로 머리가 팽팽해졌다.

 

<캡틴 판타스틱>은 숲 속에서 와이드 스쿨링(Wild Schooling)을 하는 가족을 그린다. 가장이자 이들의 ‘캡틴’ 벤은 아픈 아내 레슬리를 병원에 둔 채, 자식들을 숲 속에 데려와 홈스쿨링 하고 있다. 이들의 ‘와일드 스쿨링은 여타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단순히 학교의 교육과정을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아이들은 매일 버피테스트, 등산, 플랭크와 같은 체력 단련을 하며 칼과 화살 등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화상 치료법, 별자리를 읽고 방향 찾는 법 같은 다양한 실용기술까지 배운다. 아이들이 읽는 것은 만화책이 아니라 <총, 균, 쇠>, <우주의 구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책을 읽은 뒤 토론해야 함은 물론이고, 시험기간도 있다. 매일 이루어지는 체력단련으로 운동선수 못지 않은 체력을 가진 데다 양자역학까지 줄줄 읊는 지성까지 갖추게 한 벤의 와일드 스쿨링은 완벽하고 이상적이다. 영화는 시작 직후 10분 간 이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기타나 하모니카를 불던 가족들을 보던 렐리안은 아버지 벤을 노려보며 나무 판자를 내리친다. 가족들의 화합으로 연주되고 있던 조용하고 차분한 곡은 단숨에 흐트러졌다. 퍽퍽거리는 소리, 아버지에 도전하는 듯한 렌의 눈빛으로 평화롭던 분위기는 단숨에 싸해진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가족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도록 나름의 일정한 박자를 타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벤은 렐리안의 박자에 맞춰 다시 음악을 재개하고, 다른 형제들도 하나둘 새로운 리듬에 맞춰 연주하기 시작한다. 싸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그전에 연주하던 곡보다 더욱 경쾌하고 활발한 곡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초반에 나온 이 ‘캠프파이어’ 씬이 영화의 핵심 줄기이자 복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벤의 리듬에 맞춰서 화합하고 있던 가족들과 이것을 깨부순 렐리안. 인물의 성격을 가늠케 하는 장면이다. 분명 렐리안은 극 흐름 동안 아버지 벤과 여러 번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렐리안의 박자가 일정한 것은 분명 다른 가족들이 그의 리듬에 따라올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이며 기꺼이 그의 리듬에 맞추는 벤과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했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상적인 모양새로 보이는 이들에겐 어떤 균열이 생길까.

 

 


캡틴, 엉망진창인데요?


 

‘이상적’이고 ‘완벽한’ 벤과 그의 가족의 모습은 단 10분 만에 막을 내린다. 영화가 진행 되면서나는 점점 벤의 모습에 의아함을 품었다. 병원에 계신 엄마가 보고싶다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지금 병원에 있어야 돼’ 라고 일축한 벤. 아이들은 ‘건강한 사람이 죽으러 가는 데가 병원이라며?’, ‘미국은 교육수준 미달, 의료 과잉이라며?’, ‘의사협회는 거대 제약회사에 가랑이나 벌려주는 창녀라며?’ 잇따라 의문을 제기한다. 이 대목은 벤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미국의 교육과 의료 체계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하는 벤의 시각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학습되었는데, 아이들은 병원을 욕하면서도 병원에 레슬리를 입원시킨 벤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영화 시작 후 단 13분 만에 벤을 ‘캡틴’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캡틴은 ‘가랑이나 벌리는 창녀’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저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엉망진창 캡틴 벤의 모습은 영화에서도 끊임없이 드러난다.

 

벤과 아이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사건은 바로 레슬리의 자살이다. 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레슬리는 산후 우울증의 한 형태로 ‘양극성 정동장애’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결국 유언 몇 줄만 남긴 채 자살한다. 레슬리의 자살을 알리는 전화에 벤은 ‘어떻게?’ 라고 묻는다. 어떻게라니. ‘어떡해…’가 아닌 ‘어떻게?’라니. 담담하게 자살의 방법을 묻는 벤의 모습은 너무나 이성적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레슬리의 자살을 가감없이 전달하며 ‘(우리가) 달라지는 건 없어.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거다’ 라고 말하는 벤의 말은 꽤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벤은 레슬리의 언니, 하비의 집에 갔을 때도 죽음의 이유를 에둘러 말하는 하비의 노력이 무색하게 ‘손목을 그어 죽었어’라고 말하며 ‘진실’을 전달한다. 이에 분노한 하비의 ‘너무 어려서 이해하기 힘드니까 돌려 말하는 게 왜 거짓말이냐’는 말은 사실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과 닮아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게임 시키는 인스턴트를 먹이는 평범한 가정인 하비와 와일드 스쿨링을 고집하는 벤의 대척은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과 벤의 가치관 충돌지점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내 아이들에겐 거짓말 안 한다는 벤의 말은 자신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고결함, 아이들은 늘 진실만을 알고 있다는 만족감에서 비롯 됐을테지만, 굉장히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진실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와 시기는 반드시 존재하고, 진정한 어른은 이를 헤아려주는 다정한 배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모든지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며 덜컥 ‘엄마의 자살’이라는 힘든 사실을 말하곤, 이를 해석하고 삼키는 몫은 오롯이 아이들이 떠맡도록 던져둔 것은 ‘아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떳떳함을 우선순위에 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캡틴판타스틱 2.jpg

 

 

그렇다면 아이들은 벤의 믿음대로 엄마의 자살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다. 자살 소식을 들은 렐리안의 감정은 칼로 벽을 내리치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발현되었다. 이전부터 와일드 스쿨링 방식에 불만이 있었던 렐리안에게 ‘자살 소식’은 감정 기폭제가 되었고, 이는 영화 내내 렐리안과 벤이 부딪치는 이유로 작용한다. 아이들에겐 온전히 슬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엄마의 자살 소식을 들은 다음 날도 체력 훈련은 강행된다. 렐리안은 비 오는 날 감행된 암벽 타기 훈련을 하다가 손목을 다치기까지 한다.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피로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들만의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인가 싶다가도 그간 다소 강압적이었던 벤의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그저 캡틴이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2]

 

더욱 황당한 것은 ‘음식해방’ 이라는 임무 아래 행해진 마트 도둑질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도둑질을 시키냐는 장인 어른의 추궁에 벤은 도둑질 역시 훈련의 일부고, 엄마가 죽고나서 애들이 충격에 빠졌길래 기분 전환 겸 한 것이라고 답한다.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제거하려는 시도로 ‘도둑질’을 택한 그의 모습이 과연 옳은가? 도둑질을 함으로써 느끼는 배덕감과 그로부터 오는 묘한 환희가 이들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했을지언정 아버지로서, 그들의 선생님으로서 위치하는 벤이 이들에게 도둑질을 하도록 만든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게다가 제 아이들에겐 거짓말을 듣게 하기 싫다더니,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는 것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의 선택적 도덕성은 모순적이기만 하다.

 

도둑질한 케이크는 ‘노엄 촘스키의 날’을 기념하는 데 쓰인다. 노엄 촘스키의 탄생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행해지는 기념일. 미친 것도 아니고, 노엄 촘스키를 기념하냐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크리스마스나 기념하면 안 되냐’는 렐리안에게 벤은 ‘동화 속 허구의 요정을 찬양하자고? 인권과 지성을 고양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도주의자 대신? 그래, 토론해보자’ 라고 말한다. 이에 렐리안은 고개를 돌리며 ‘됐다’고 답한다. 벤은 ‘아니, 얘기해. 네 의견을 관철시켜. 우린 들을 준비가 돼 있어’라고 말하고, 결국 렐리안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한다. 이 일련의 대화를 자세히 보자. 사실 벤은 ‘들을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다. 허구의 요정을 찬양하자는 것이냐며 노골적으로 황당함을 내비춘 아버지를 상대로 렐리안은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렐리안이 속한 사회는 철저히 아버지에 의해 직조된 세계인데, 이것을 어린 아이가 부정하고, 이 ‘토론’을 통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까?

 

게다가 노엄 촘스키의 날 아이들이 받은 선물은 화살, 칼 등 실제 무기이다. 아이들은 굉장히 기뻐하며 감사함을 표한다. 아이들이 무기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은 벤이 좋은 선물을 준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어느 아이들이 칼과 화살을 받았다고 이토록 기뻐하겠는가? 아이들의 선호는 벤이 그려낸 ‘와일드 스쿨링’ 상황 속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생동물을 직접 잡아먹어야 하는 환경이니[3] 칼과 화살이 필요하고, 벤이 좋은 무기를 극찬하자 아이들도 자연스레 ‘무기’를 가장 좋은 선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캡틴 벤의 말과 행동, 가치관은 아이들의 사소한 취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취향 뿐만 아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습관 덕에 곧잘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는 아이들의 생각에도 벤의 가치관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4] 아이들이 읽고 학습하는 내용도 벤이 선정하고, 가르치는 것이니 아이들은 벤의 철학, ‘무정부주의, 반자본주의’에서 당연히 벗어나기 어렵다. 이쯤에서 되짚어봐야 하는 것은, 벤은 ‘과격하다’는 점이다. ‘의협은 가랑이나 벌리는 창녀다’와 같은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벤의 가치관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안 교육의 장점은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다양한 시각에서’ 학습시킨다는 것인데, 벤의 홈스쿨링에는 대안교육의 장점이 오히려 퇴색되지 않았나.

 

또한, 영화 초반, 1초 등장한 존재, ‘폴 포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들 사자의 오두막에는 ‘폴 포트’ 사진이 붙어있다.[5] 사진을 확인한 벤이 놀라자 사자는 태연하게 ‘폴 포트야’라고 답한다. 아주 잠시 언급됐지만, 폴 포트의 등장은 매우 중요하다. 벤과 폴 포트가 분명 겹쳐보이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벤이 교육 기관을 못 마땅해하고, 종교를 비웃으며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음식해방운동’ 타이틀 아래 도둑질을 하고, 문화 매체를 접하게 하지 않아 아이들이 미국의 자부심 ‘스타트렉’조차 모르는 상황은 분명 폴 포트가 이상국가를 외치며 자행했던 정책들과 닮아있다. 수많은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폴 포트와 벤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기에는 비약적인 면이 있지만, 폴포트와 벤이 겹쳐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6]

 

결국 캡틴의 ‘이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들은 전부 이해할 수 있다며 ‘진실’만을 말했던 것[7]은 아이들을 어떻게 만들었나. 벤의 말대로 아이들은 모두 ‘이해’했고, 그랬기 때문에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또한, 벤이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사회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레슬리의 장례식을 위해 간 도심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들의 한계와 무지를 느낀다.[8] 그리곤 이에 대한 원망은 고스란히 벤에게 향한다. ‘아빠 때문에 엄마를 못 보는 거야.’, ’엄마는 아빠 때문에 미친 거야.’, ‘이렇게 사는 게 대단하고 아빠는 완벽한 것 같아?’. 아이들은 하나둘 불만을 표출하고, 첫째 보는 더 이상 와일드 스쿨링이 아닌 학교를 통해 세상을 알고 싶다며 결국 벤에게 대학합격통지서를 내민다. 배울 거 하나 없는 대학에 뭣 하러 가냐며 몰래 대학 입시를 준비한 보를 향해 ‘지금껏 날 속인 거야’라며 노골적인 불쾌함을 내비친 벤에게 보는 ‘도대체 내가 뭘 아는데’라며 벤이 직조해낸 세상이 아닌 ‘일반적인’ 사회에선 사람들과 전혀 섞이지 못하고, 무지함과 무력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자조한다. 결국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면서 ‘권리장전’이나 줄줄 읊는 영특한 모습이 아닌, 남들과 똑같은 ‘평범함’에 대한 갈증이 생긴 것이다.[9]

 

 

캡틴판타스틱3.jpg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틴!


 

아이들의 원망과 장인어른의 양육권 회수 압박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던 벤이 단숨에 그 의지를 꺾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렐리안 해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간 베스퍼가 지붕에서 떨어진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며 왜 지붕에 올라갔냐는 의사에 말에 ‘그냥 놀다가요’라며 떳떳하지 못하던 벤은 자신의 교육 방식이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들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결국 그는 장인어른에게 모든 양육권을 맡긴 채 혼자 숲 속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의 인생을 망친다며 짐을 정리해 떠나는 캡틴 벤의 모습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수실 물건을 챙겨 떠나는 캡틴 키팅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떠나기 전 벤이 전한 진심에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다시 숲 속에 가는 것을 택한다. 벤이 운전한 트럭에 몰래 타 그를 따라온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벤의 사회에 속하기를 택한다. 벤과 가장 크게 갈등한 렐리안이 촘스키의 “아직 변화의 기회는 있고, 더 나은 세상 만들기에 기여할 수 있다”를 인용한 것은 벤의 철학을 가장 이해할 수 없던 그가 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오랫동안 길러오던 (‘자연’의 상징과도 같은) 수염을 깎는 벤의 모습은 ‘변화의 기회가 있다’는 촘스키의 말이 와닿는 대목이다.

 

결국 벤은 아이들과 함께 레슬리의 유언을 지켜주고, 보를 대학에 보내며, 숲 속에서 살면서도 ‘스쿨버스’에 태워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보낸다. 벤 가족이 수년 간 만들어온 단절된 세계를 외부 세계와 비로소 연결하며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 초반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캡틴 가족의 모습이다.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캡틴 벤은 분명하게 ‘변화’했고, 벤을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들도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키엘러가 <롤리타>를 읽으며 내린 감상, ‘그 남자 관점에서 쓰여진 거라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는데 그게 놀라워. 본질적으로 아동 성추행이잖아. 근데 그 사랑이 아름다운 거야. 문제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심정적으로는 그가 싫어. 그런데 동시에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는 사실상 이 영화와 궤를 함께 한다. 내가 <캡틴 판타스틱>을 보며 느꼈던 감상과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동 학대와 다름 없는 벤의 양육방식을 보며 맹렬한 비판을 했지만, ‘자발적으로’ 벤의 사회에 속하길 원하는 아이들과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름의 조화로운 방식을 택한 벤을 결국 끄덕이며 보게 되었다.

 

나는 ‘캡틴’이란 단어에서 오는 기대가 있다. 캡틴은 멋있는 사람이며, 등장 인물들이 캡틴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서사를 보며 감동을 느끼는 것이 바로 나만의 ‘캡틴’ 장르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히어로물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전형적인 ‘캡틴’을 찾아서 헤매고 있었다. 영화 플레이버튼을 누르면서 나는 ‘캡틴’ 장르 문학을 기대했고, <캡틴 판타스틱> 속 캡틴 벤은 내가 생각한 캡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벤 가족을 끄덕이게 보게 만들었고, 이에 기여한 것은 단연 캡틴 벤의 ‘변화’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캡틴들의 모습은 전부 처음부터 완벽히 멋지고 이상적인 캐릭터였지만, 이와는 정반대인, <아름다운 실수>[10]를 겪고 자신을 굽힌 벤 역시 결국은 다른 형태의 캡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캡틴 판타스틱>의 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캡틴이지 않을까.

 

 


 

[1] <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2] 38분 56초 / 엄마 레슬리가 보고 싶다는 말을 벤이 할 줄 모르는 에스페란토어로 나누는 키엘러, 베스퍼의 모습은 ‘그리움’조차도 쉽게 표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서 있는 양을 차마 쏘지 못해 끼니를 거른 딸이 배고파하자 ‘그러게 빌어먹을(Fucking) 양을 쐈으면 됐잖아!’라고 소리친 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이 환경이 익숙한 듯 보이면서도 여전히 부적응하는 면면들이 드러난다.

[4] “할머니, 할아버지가 싫진 않아. 파시스트 자본가가 싫은 거지.” 라고 말하는 사자와 “아빠의 말을 그대로 베꼈네?”라고 말한 키엘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사자는아버지 벤의 생각을 그대로 흡수해 자신의 생각으로 굳혔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에서 교수인 아버지의 취향과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곤, 그것이 철저히 자신의 신념과 취향이라고 믿던 주인공이 결국 혼란스러움을 겪는 모습이 떠올랐다.

[5] 7분 40초 / 폴 포트는 캄보디아의 정치인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프랑스 식민지 기간 중 독립운동가로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순수한 농업국가를 지향하며 이상국가를 꿈 꾼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극단적 공산주의, 반자본주의로 나타났고, 교육체계를 못 마땅하게 여겨 학교를 폐쇄하고, 영화, 음악 등 문화매체를 전면 금지했으며 종교를 탄압했다. 결국 그의 극단적인 정치는 4년의 집권 기간동안 300만 명의 국민을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6] 장인어른이 벤에게 ‘이건 아동학대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벤의 와일드 스쿨링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의 존재를 드러낸다. 

[7] 벤은 아이들에게 레슬리의 죽음 뿐 아니라 레슬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하비 가족의 이야기(이모부가 엄마 레슬리를 향해 ‘개 같은 년’이라고 욕한 것까지도)를 숨김없이 말했다.

[8] 친척집에서 ‘나이키’ 신발을 그리스 신화 속 ‘니케’라고 이해한 것,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제대로 된 고백조차 못 하고 여자애가 즐겁게 말하는 ‘스타트렉’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등 아이들은 ‘캠핑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며 혼란을 겪는다.

[9] 대학 합격 통지서를 보여주기 망설이던 보가 결심을 굳힌 것은 렐리안과의 대화 (1:15:44~) 때문이다. 영화 초반 캠프파이어에서 새로운 박자를 만들어낸 렐리안과 형제들 중 가장 먼저 ‘렐리안’의 박자에 연주하기 시작한 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10] 재생시간 1:31:08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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