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글 입력 2022.02.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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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싸인 무진은 모호한 곳이다. 잡을 수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안개처럼,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농사 관계 시찰원인지도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 생계를 꾸리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다들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 이 무진은 평온하고 나른한 공간이다. 윤희중은 무진으로 가는 길에 상쾌하고 나른한 수면제를 떠올리기도 하고, 항상 무언가 잃어버렸을 때 무진으로 향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진은 마냥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뒤에서 희중의 신상에 대해 수군거리는 모습은 안개같이 음침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인숙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서는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무진의 냄새(p.124)’가 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서로를 속물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나른한 무진의 모습과 이에 대한 서술은 자꾸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숨 막히는 그림자 같은 무진의 어두운 모습과 충돌한다. 이는 무진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윤희중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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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중은 무진의 한 골방에서 그렇게 나오고 싶어 했으면서도 도피가 필요할 적마다 젊은 시절을 보낸 무진으로 향한다. 윤희중의 무진으로의 여행은 무언가로부터 눈을 감는, 잠이 드는 수면제같은 여행이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도망치기의 목적지로 무진을 택한다. 4년 전,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동거하던 여자가 떠나버렸을 때 그는 무진으로 도피했었다. 그런데 현재에는 딱히 그가 잃어버린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든든한 전무 자리에 오를 미래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희중은 왜 무진에 오게 되었을까. 현재 희중이 잃어버린 것은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다. 장인과 아내가 자신을 전무로 만들어 놓을 동안 정작 자신은 역할을 잃어버리고 할 일이 사라졌기에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채 무진으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이처럼 무진은 굉장히 달콤하고 상쾌한 수면제를 품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 이면에는 희중의 도피와 외면이 있다.

  

희중이 이런 무진에서 보이는 태도는 애매하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그것을 배신하지도 못한다. 우선 그는 무진에서 문득문득 과거의 일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반짝이는 별 같은 개구리 울음소리에, 냇가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에 그는 골방에 처박혀 가혹하게 자책했던 지난날을 떠올린다. 무력하고 괴로웠던 시간을 떠올리고 감정이 뒤죽박죽된 채 모든 것들을 저주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그는 인숙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는 인숙에 대해 정말 인간적으로 궁금해하고 그녀를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시선으로 그녀를 이해하며, 그녀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떠올린다. 인숙이 심심하다고 했을 때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희중은 ‘그래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p.126)’ 내지는 ‘아마 그건 사실이리라(p.128)’라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글자로 표현하지 않은 자기 생각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이렇게 현재 자신을 잃어버린 희중이 무진에서 마찬가지로 자신을 잃어버렸던 과거를 자꾸 회상하고 마주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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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안개' 스틸컷

 

 

그런데 그렇다고 그가 과거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거나 이와 뒤늦게 화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진을 ‘시골’로 규정하고 자신은 ‘서울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진 사람들이 일상에 매달리는 모습이 갑자기 하찮고 우습게 느껴진다고 하며, 과거에 심하게 빠져들었던 화투를 현재에는 거절하기도 한다. 또 그는 조에 대해 생각할 때, 그가 무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단정 지었다가, 다시 고쳐 생각하며 누군가를 잘 아는 척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던진다. 다른 사람에 대해 수군거리며 서로를 속물이라 단정하는 무진의 모습과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또 그는 조가 바쁜 일상을 자랑하는 모습을 서울 생활과 비교하며 가엾게 여기고 서투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희중은 무진 사람들을 완전히 타자화하기도 하며,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은연중에 시골인 무진과 도시인 서울을 자꾸 구분하며, 자신은 더는 무진에 속하지 않는 ‘서울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한다. 그는 다음 날 아침의 부자유스러움을 생각하고 조의 집에서 자라는 청도 거절하는데, 여기에서 자신은 결코 무진에 속하지 않으며 이곳에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맡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희중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든 희중은 무진이라는 공간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와 마주했다가, 또 완전히 선을 그으며 현재 자신의 모습과 분리하는 등 분열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과거 자신의 기억들을 더듬으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다가도 무진을 냉소적으로 비난한다. 그는 문득문득 현재 서울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자신의 전무 자리를 생각하고 이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 무진을 긍정하는 등 다른 선택을 할 용기는 없으며,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또 무진에 회의를 느끼며 자기는 무진과 다르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무진의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 이면에 검은 구덩이가 곳곳에 있는 것처럼, 희중의 마음 역시 무진에서 스스로를 마주하는 모습과 그것을 부정하는 모습이 쳇바퀴 돌듯 나타난다. 그의 분열된 모습과 회의, 모순적인 감정은 마치 겁쟁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무진은 윤희중과 닮았다. 스스로는 자꾸 외면하지만 말이다. 무진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만큼 희중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윤희중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이런 무진과 윤희중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다. 바로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p.129)’이라는 인숙의 말이다. 정말이지 무진에는 책임도 무책임도 없다. 어떤 여자의 죽음에 대해 무진은 책임을 지지도, 그렇다고 무책임하지도 않다. 그냥 무진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희중 역시 마찬가지이다. 희중은 자신의 과거에 책임을 지지도, 그렇다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지도, 그렇다고 배신하지도 못한다. 인숙을 서울로 데려가지도,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는 인숙에게 흐린 날엔 헤어지지 말자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다가도 그 어색함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 인숙과 잔 날 밤에 희중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p.138)’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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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개" 포스터

 

 

무진은 이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곳이다. 무진에서는 자꾸 무언가가 사라진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무책임도 사라진다. 무진은 마치 ‘내 머리와 손가락 빼곤 내 몸을 전연 느끼지 못하게 만들던 노름(p.123)’과 같다. 희중은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p.116)’한다고 말한다. 무진은 ‘없어짐’의 공간이다. 통금 사이렌이 부는 장면에서 이 ‘없어짐’은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중첩된다. 통금 사이렌이 불자 모든 사물과 모든 사고는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생각이 떠오르는 듯했다가 또 조금씩 사라져버리고,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희중은 일단 무진을 떠나면 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자꾸자꾸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이곳은 그야말로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공간이다. 희중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경멸하든 받아들이든 잊어버리든 붙잡든 아무 상관이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무책임도 없다.

 

그가 육체적인 관계를 떠올리는 순간은 항상 이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의 개의 교미, 모든 것이 사이렌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 떠올리는 부부의 교합, 이미 죽어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정욕. 윤희중은 혹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분열된 감정을 느끼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붙들고 싶었거나, 혹은 자신의 존재를 은밀히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럴 때 다만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육체적인 감각 하나만 살아남은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잊힐 수 있다는 아내의 전보에 희중은 어설프게 상처가 남는다고 외친다. 그러고는 엉성한 타협안을 만든다. 자신의 과거, 무진에 대해 한 번만 긍정하자고 했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책임지지 않은 채 그냥 떠난다. 그는 편지를 찢어버림으로써 또 한 번 현실과 과거를 구분하고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나 무진은 언제까지나 그와 닮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문제와 희중이 마주한 과거의 모습은 또다시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남는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 감상적인,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희중이 마지막 장면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은 마치 이야기보따리의 매듭을 짓지 않은 채 헐레벌떡 도망치는 것만 같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꾸 사라지는 곳,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곳이 바로 희중의 무진이다. 그리고 희중은 이런 과거를 직면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도피할 것이다. 무진을 안개 쌓인 어느 심연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진으로 왔으나 결국 또 무진에서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현실로 도피한다. 이게 바로 희중이 무진에 오는 이유이자 희중에게 무진이 갖는 의미가 아닐까.

 

 

[정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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