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도서/문학]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글 입력 2022.02.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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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펜데믹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 지 어언 2년이 넘어간다. 동시에 그 2년은 내가 전역을 기다린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난 2년은 나에게 다소 공허한 시간이었다. 사회적, 신분적 제약에 따라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게 눈에 띈 책이 있었으니,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다.

 

 

고도를 기다리며.jpg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 속 등장하는 부랑자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텅 빈 언덕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두 부랑자는 무의미한 대화를 반복하며 시간을 죽인다. 새로운 인물인 포고와 럭키가 등장하지만, 또다시 공허한 대화만을 나눌 뿐이다. 막이 끝날 무렵엔 한결같이 오늘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소년이 등장하고, 부랑자들은 내일도 고도를 기다리리라 다짐한다.

 

이 공허한 희곡을 논하기 위해, 일각에선 ‘고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대개는 신, 또는 신에 의한 구원이라 해석하는 것이 정론이다. 그러나 베케트가 이미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내가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 밝힌바, 나는 구태여 ‘고도’의 정체에 대한 논의를 적고 싶진 않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기다리는 대상보다는, 기다리는 ‘나’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본래 베케트는 실존주의 작가로 분류되는바, 새삼 다른 길을 통하지 않고 다소 우직하게 실존주의적 관점을 관철하겠다. 애초에 『고도』란 부조리극 아닌가.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


 

‘고도(Godot)’가 ‘신(God)’ 또는 그로 말미암은 구원이든, 펜데믹의 종식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도’로 대표되는 우리가 갈망하는 대상은 결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이는 그것이 지닌 성질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는 주체의 초월성에서 기인한다. ‘고도’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것을 기다리는 주체인 ‘나’는 인간이다. 인간은 대타존재로서 의식을 지닌 존재다. 현상학에서는 이러한 의식을 ‘지향성 이론’으로 설명하는데, 쉽게 말해 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지향으로서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의식의 지향적 행위이다. 그런데 의식은 즉자존재처럼 시간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현재’라고 느끼는 순간은 현재가 아니다. 그 순간은 이미 과거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는 ‘지난-미래’이며 미래는 ‘일어날-과거’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내일’은 오는가?


본래 대타존재는 비존재를 근거로 존재를 규정한다. 무, 결핍, 삭제를 통해 개별적 존재로 세계를 해석하는 의식의 특성상, 결핍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언제나 만족할 수 없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미래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 그리고 자유


 

이제 우리는 ‘고도’가 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고도’는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이며, 그 대상은 영원히 결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비탄에 빠질 법도 하다. 실제로 실존주의가 등장할 무렵엔 실존주의자들을 회의주의자라 비난하는 여론이 거셌다. 그러나 그러한 평에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강의로 답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결핍으로 인해 기다림이 숙명이 된 인간은 그 일시성으로 인해 자유롭다. 의식은 오직 미래를 향한 과거의 초월로서 존재한다. 즉 의식은 반드시 미래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의식은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펼친다. 적어도 자신이 인식하는 한계 내에서 의식은 자신의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한 가지 미래 가능성을 선택한다. 그러면 그 가능성은 다시 지난-과거의 미래 가능성으로 전락하고, 의식은 다음 미래를 향하는 초월로 존재한다. 인간은 이 과정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택, 곧 자유를 선고받은 셈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자유다.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극 중 에스트라공은 몇 번이나 나무를 보며 목을 매겠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는 그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책세상, 김화영, 15P) 극 중 인물이 끊임없이 신음하는 것은 본래 삶이 산 정상에 돌을 굴리듯,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자살을 종용하는 것일까?

 

 

 

자기기만


 

인간의 자유는 한계가 없다. 인간의 자유는 장애도 방해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내가 절름발이로서 나를 선택하지 않는 한, 나는 절름발이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곧 내 장애를 구성하는 방식(‘견딜 수 없는 것’으로서, ‘굴욕적인 것’으로서, ‘숨겨야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으로서, ‘굴욕적인 것’으로서, ‘자부심의 대상’으로서, ‘내 실패를 정당화하는 핑계’로서 등등)을 나 자신이 선택한다는 뜻이다”라 말한다. 비단 장애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에게 한계 없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말은, 자신의 모든 선택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두려운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인간 사용하는 수단이 자기기만이다. 자기기만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필연적이었다며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유를 행사한다. 만약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고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생각했다.”생각한다면, 이는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그보다는 앞서 언급한 장애의 경우처럼, 자기 자신이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 실존주의적 자세일 것이다. 삶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반복적인 고통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타존재인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언제나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조르는 에스트라공과 반해 블라디미르는 그런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를 기다릴 것을 상기시키고 종용한다. 무의미한 극 중 대화처럼 삭막한 자신의 삶 속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로서 삶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습관은 이성을 무디게’한다는 블라디미르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관철하려 한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인물은 ‘고도’가 아닌 에스트라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트라공 역시 기다림에 멈출 뿐이다. 무위를 택한 그의 행동은 사르트르보단 카뮈의 입장에 가깝게 느껴진다. 부조리를 인지하고 담담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라면 인간의 능동성을 더 중시했으리라. 황지우 시인의 명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으나, 그것이 주저앉아 흐느껴야 함을 뜻하진 않는다. 기다림을 핑계 삼아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았나? 오늘도 나는 스스로 질문한다.

 

 

[김민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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