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헤르만 헤세가 사랑한 음악에 관한 글 -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글 입력 2022.02.17 12:4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헤세 책 표지 찍은 사진.jpg

 

 

 

오마주 투 헤르만 헤세

 

개인적으로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 20년도 아직 되지 않은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소름 돋을 정도로 좋았던 최초의 책이 <데미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험기간 몇 주 전이었다. 빨리 읽고 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책이 너무 좋았다. 최대한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싶었다. 머리로는 빨리 읽어야 함을 아는데 책을 읽는 나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문장을 여러 번 곱씹고, 또 곱씹고, 또 한 번 더 곱씹고 싶었다. 문장들이 내게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서 그만큼 진하게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 정도로 내게 <데미안>은 소중한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책은 처음이었다.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헤세의 문장력에 반했다. 헤세는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다. ‘에너지 드링크를 남용하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각이 날카로우며 그 감각으로 포착한 자잘하고 미묘한 느낌을 글로 적어내는 능력이 훌륭하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살아있는 듯 했고 이 책은 글로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

느낌을 제대로 말로 표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미묘하고 복잡하고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복잡한 마음을 퉁 쳐 버리곤 한다. 썩 정확하지는 않고 여전히 답답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니 만족하려 노력해본다.

이럴 때 헤세의 글은 말문을 트이게 해준다. 헤세는 느낌을 제대로 대면하고 이를 분명하고 예리한 글로 묘사해 우리에게 들려준다. ‘글 장인’ 덕분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노래를 들으며 닭살이 돋고, 무아지경에 빠지고, 묵직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형태가 없는 ‘느낌’을 글을 이용해 형태를 만들어 붙잡아 둔 것 같은 책이다.
 
 

hands-g48bcfe518_1280.jpg

 
 

책에 나온 문장들_ 마음에 걸린 문장들

 

 
9) 공기는 상쾌했고 쌉싸름한 향이 났으며, 구붓하고 큰 참나무들 사이로 난 거무스레한 들길은 이웃의 땅을 제멋대로 둘러가며 이어져 있었다.
 
11) 서늘한 가로등 불빛이 가물가물 비치고 있다.
 
 
헤세의 문장을 읽으면 감각이 일어난다. 시원한 느낌, 쌉싸름한 냄새, 나무의 형태, 색깔, 모양새, 멀리 이어지는 풍경으로의 확장, 촉각, 후각, 시각, 공간감. 문장에서 생생한 느낌이 든다.

 

13) 음악 스스로가 공간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휘감는다. (...) 이 대담하고 무아경에 빠진 대가는 자신의 막강한 목소리를 신을 향해 들어올리며 애원하고 간구한다. 그의 노래는 음을 휘몰아치며 원 없이 펑펑 운다. (...) 마침내 성당이 완성되어 고요히 서 있다.

 

14)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지금 이 큰 성당 안 많은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즐거워하며 해사하게 미소 짓고 있다.

 

 
노래가 만드는 웅장함과 공간감, 우렁차고 성스러운 느낌을 성스러운 성당을 지어나가는 것처럼 표현했다. 음악을 건축으로 표현하다니! 또한 헤세는 멜로디가 어떻고, 화성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음악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노래로 인해 변한 주변 사람들을 묘사하며 노래를 설명한다.

 

15) 이런저런 소리와 두런거림

 

 
미묘하게 뜻이 다른 어휘가 사용되었다. '이런저런 소리'와 '두런거림'으로. 그렇기에 문장을 읽으면 비슷하기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소리를 더 잘게 듣게 된다. 문장이 묘사적이고 풍성하다는 인상이 드는 건 이 때문인 듯하다.
 

 

28) 하지만 보라, 세계가 그 사람을 향해 울린다.

 

 
엄청난 공연을 보고나서 이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지 않은가? 음악을 듣고나서 청중이 느낄만한 감상으로 '커다란 세계가 그 사람을 위해, 그 한 사람을 향해 울리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겁이 날만큼 엄청나지만 동시에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가.
 

 

30) 우리는 여전히 압도된 채 박수갈채를 쏟아내 가벼워지려 한다.

 

33) 우리는 젖은 눈시울로 일어서며 영혼의 터진 구석구석이 진동하고 경고받고 비난받고 정화되고 화해한 것을 느낀다.

 

 
공연을 다 보고나면 휘몰아치듯 지나간 강렬한 느낌에 얼이 빠진 채로, 환상에서 깨어나듯이 우레같이 박수를 치지 않는가. 이 때의 압도된 느낌을 무게감으로 표현했다. 박수를 치며 가벼워지려 한다는 표현이 너무나 알맞았다.

 

59) 내 길쭉한 얼굴을 보다 모차르트는 우렁차게 웃기 시작했다. 웃다 못해 허공에서 거꾸러지더니 두 다리를 구르며 트릴을 연주했다.

 

132) 생동하는 박자로. 시간은 미소 지으며 무한에서 풀려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남긴 헤세의 감상이다. 음악을 듣고 있는데 모차르트의 현생이 자신을 만나러 와서 대화하고 웃고 농담을 한다. 모차르트가 헤세의 말에 웃겨서 뒤집어진다. 이 떄 모차르트가 거꾸러진 채로 '다리를 구르며 트릴을 연주한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익살스럽고 재미진 표현이었다. '시간이 무한에서 풀려난다'는 표현도 멋지지 않은가. 헤세는 이렇듯 재미와 멋짐을 이용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113) 웃거나 미소짓는 활기가 아니라 소리 없이 반짝이는 평화로운 활기였다.

 

 
어휘에 익숙해지면 어휘가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에도 익숙해진다. 그 이미지에 변화가 없다면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헤세는 이럴 때 어휘에 색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활기'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활짝 핀'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헤세는 '소리 없이 반짝이는 평화로운 활기'라고 표현한다. 기존에 내가 떠올렸던 이미지와는 상반된 이미지인데 글의 상황과 너무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표현이다.

 

124) “내겐 어려운 일이에요. 수줍음이 많고 밀고 나가는 재능이 없거든요.” “그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고 싶거나 용기 낼 만한 일이 전혀 없나요?” (...) “사랑하는 신은 각자의 쓸모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적극적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 친애하는 이여, 다른 도피처는 없어요.”

 

126) 근면하고 두려워하고 희망하던 세월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상자 가득한 책들, 그중 절반은 그 자신 손으로 빽빽하게 적은 악보집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삶의 교훈을 얻게 되기도 한다. 수줍음이 많고 밀고 나가는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며 말해주는 선생님. '근면하고 두려워하고 희망하는 세월'에 남은 근면함의 흔적에 대한 생각. 음악 책이지만 삶의 교훈을 건져올릴 수도 있는 책이다.
 
 
[이진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