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의 존재에 대한 빈틈없는 90분 논쟁, 연극 라스트 세션 [공연]

신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사유가 인간의 숙명임을
글 입력 2022.02.05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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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라스트세션_티저포스터(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어려서부터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극도로 예민했다. 내 존재가 ‘무’의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고 당연히 이를 피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너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을 때에는 불안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 폭발 직전이 되는 감정까지 겪어내야 그제서 조금 가라앉는 식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내가 불안했던 시기에,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릴 때마다 나를 괴롭혔는데, 나는 그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재미도 없는 영상을 돌려보고 더 자극적인 상상을 하는 등의 치사한 방법으로 '나의 최후'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귀신이나 괴물에 대한 공포 같은 것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기 때문에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공포였다.

 

내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처음 떠올렸던 건 종교를 갖는 거였다. 그런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종교’나 ‘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 모를 반발심, 혹은 신이 없거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나에게, 단지 필요하다고 해서 신은 찾아와 주지 않았다. 사실 나의 내면에 그런 반발심이 존재했기 때문에, 내 두려움이 남들보다 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과 천국, 사후 세계 같은 것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믿고 싶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을 관람하면서 내내 해답 같은 것을 바랐다. 자연스럽게 당연히 무신론자의 논리가 맞을 거라 믿으면서, 내심 내가 납득할만한 반박이 내 본질적인 공포를 흔들어 놓았으면 했다.

 


22라스트세션_가로프로필(클린본)_오영수(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자그문트 프로이트 역 | 오영수

 

 

관람한 연극 <라스트 세션>은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Mark St. Germain)이 아맨드 M. 니콜라이(Armand M. Nicholi, Jr.)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THE QUESTION OF GOD)>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를 한 무대 위에 불러 놓고 논쟁하게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다. 작중 두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는 만난 적이 없으나, 작가가 연극을 통해 이를 실현시켰다. 작품 배경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이다. 이 2인극에서 각 논리의 극단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신’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토론을 쉴 틈 없이 계속한다. 그리고 나아가 삶의 의미와 죽음,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서도 치열한 논변을 펼친다.

 

 

<시놉시스>

 

영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1939년 9월 3일 오전, 런던. 프로이트의 서재.

옥스퍼드 대학의 젊은 교수 겸 작가 루이스가 저명한 정신분석 박사 프로이트의 초대를 받고 그를 찾아온다.

루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비판한 탓에 불려왔다고 생각하지만 프로이트는 뜻밖에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변증을 궁금해한다.

 

시시각각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오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종교와 인간, 고통과 삶의 의미를 넘어 유머와 사랑에까지 지칠 줄 모르는 논쟁을 이어가는데 ...

 

 

 

두 배우의 빈틈없는 논쟁


 

22라스트세션_가로프로필(클린본)_전박찬(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C.S. 루이스 역 | 전박찬

 

 

2인극은 처음이라 관람 전부터 기대가 컸다. 모든 회차의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강력한 배우였기 때문에 한 쌍의 배우가 이끌어낼 극의 호흡이 특히 궁금했다. 엄마와 함께 관람했던 당일 공연에서는 정신병리학자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을 오영수 배우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영문학 교수 C.S. 루이스 역을 전박찬 배우가 맡았다. 프로이트의 서재로 꾸며놓은 소극장은 두 배우의 논쟁만으로 가득 찼다.


작은 소품들로 섬세하게 꾸며놓은 세트장은 실제 프로이트의 서재와 최대한 비슷하게 구성하려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 위에 놓여진 90살의 늙은 프로이트를 연기하는 오영수 배우는 마치 프로이트 그 자체처럼 존재했다. 구강암을 앓는 고령의 나이라는 설정으로 인한 약간의 부정확한 발음이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반면 이에 맞서는 젊은 교수 루이스를 연기하는 전박찬 배우는, 연극적 톤으로 완벽한 딕션을 자랑하며 당돌하고 패기 있는 어린 교수의 면모를 뽐냈다. 두 배우의 정반대의 연기 스타일 덕분에 작품은 연극과 현실의 중간 단계에서 완벽히 조화를 이뤘다.

 

배우들의 호흡은 관객들이 그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동조하고, 때로는 반박하고, 실소를 터뜨리게 했다. 사전에 소재를 읽으며 꽤 엄숙하고 어려운 분위기일 것 같다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연극은 의외로 유머러스했고 배우들과의 감정교류가 쉬웠다. 아주 깊은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래서 더 편하게 극에 몰입할 수 있다. 두 배우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빈틈없는 논리의 공격과 수비가 마치 운동 경기를 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20세기 무신론의 시금석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와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루이스’, 둘의 논쟁은 신의 존재, 보편적 도덕률의 유무, 사랑과 유머 등 자유롭게 주제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그러나 결국 대화의 목적은 ‘신이 존재하는가’를 밝히기 위함이다.

 

극을 특히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은,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요소의 삽입이었다. 극 내에서 프로이트는 고령의 나이에 구강암 말기였고, 치료를 위해 입에 넣어둔 보철물이 수시로 그의 입을 찔러대서 피를 토하게 했다. 그는 이제 삶과 고통을 한번에 끝낼 자살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반면 루이스는 삶도 죽음도 그리고 고통조차도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강력한 신앙심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들은 완전한 양극단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공습 경보가 잘못 울리는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계기로, 극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절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학자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자살을 계획하던 무신론자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던 유신론자 둘은 모두 공습 경보가 울리자 빠르게 방독면을 찾아쓰거나 급히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제서야 완전히 다른 것 처럼 보였던 두 인물도 사실 눈 앞에 닥칠 죽음에 대해 똑같이 공포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결국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나약하다.

 

극 중에서 프로이트는 '신이 있다면 선한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을 행할 리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신이 없음을 주장한다. 신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그의 근거는 마치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선사한 신에 대한 신랄한 비난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사실은 신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음악이 꼭 감정을 조정하는 기분같아 싫다'며 음악 소리를 줄이던 프로이트는 루이스와의 논쟁이 끝나고 혼자 남아 음악의 볼륨을 서서히 키운다. 죽음을 앞둔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암시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대가 어두워지고, 이번에는 조명이 좁게 켜지자 스포트라이트가 의자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프로이트만을 비춘다. 그리고 자막과 함께 조용히 나레이션이 흐른다. 프로이트는 그의 생전 의지대로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고, 그의 장례절차에서는 어떠한 종교적 의식도 치르지 않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짧은 커튼콜 동안 두 배우에게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한시간 반 동안 끊기지 않는 대사를 소화한 배우들의 대단한 연기력에 대한 박수이기도 했지만, 나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의 생을 살아낸 프로이트를 향한, 인간을 향한 박수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찡했다. 그는 신을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 장면이 꼭 피할 수 없는 최후를 맞을 '나'의 모습을 예언하는 것 같았다.

 

 

 

마무리


 

“시대를 초월한 미스터리를 하루 아침에 풀어보겠다고 생각한 게 미친 짓이었죠”

“그렇다고 생각을 접는 게 더 미친 짓이지”

 

극에서 두 학자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결론을 내리기 위한 대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연극이 끝난 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 누구에게도 완전히 설득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배타적 세계관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인류 전 역사에 걸쳐 양립해왔다. 내가 항상 의문을 가졌던 것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내려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종교만이 유일하게 벗어나 다른 믿음체계를 소유할 수 있는지였다.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가 사유해 본 적 없는 또다른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방식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역량의 부족으로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편에서 이번 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의 논리가 옳게 느껴지는 지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진실’이라고 여기기에 조금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고, 유물론적 사고에 길들여진 내 뇌는 반복해서 프로이트처럼 반론했다. 그래서 연극이 끝난 후 나는 실제 많은 이들을 회심시켰다는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론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졌고, 원작 도서를 읽어볼 계획이다.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고 죽음이 두려운 무신론자이지만, 혹시 나에게도 신의 존재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얕은 기대를 가지고.

 



[신지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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