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연빛-인공빛-어둠, 노스텔지아 [영화]

인간이 햇빛을 피하는 게 가능할까? 절대자의 시선, 빛으로 그려진 구원.
글 입력 2022.02.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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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탤지아>는 의도치 않게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담겨버린 작품이다. 영화의 제작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배타적이었던 고향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공식적인 망명을 선언한다. 타르코프스키는 본인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의 영혼이 내가 영화 속에서 다룬 것과 똑같은 향수를, 그것도 영원히 갖게 될 줄을, 나는 촬영 중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영화는 러시아 작가 고르차코프가 러시아 음악가 소스노프스키의 생애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방문한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중간 중간의 흑백화면들로 피부가 하얗지 않았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아늑했던 집을 떠올린다.


이탈리아에서 회상한 자국 러시아에 대한 ‘향수鄕愁’는 영화 속 인물이든 그것을 관장했던 감독이든, 영화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 정취인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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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영화는 진한 종교적 색채를 자랑한다. 시적 언어와 문학성, 국가와 역사, 전쟁과 가족, 미학과 동선 등 감독의 스타일을 표현할 다양한 서술어들이 있지만 <노스탤지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종교성을 표현한 ‘빛’의 활용이다.


 
자연빛(태양) - 인공빛(조명) - 어둠(빛 없음)
 


그는 세 가지 단위에서 빛을 활용하며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점철 시킨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단순 ‘향수’뿐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빛을 통해 절대자, 구원자, 영적 존재를 암시함으로써 ‘향수’와 ‘구원’의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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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활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호텔에 도착한 고르차코프가 자신의 방을 처음으로 둘러볼 때다.

 

그는 창문을 열어 밖을 보지만 이내 문을 닫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야외에서 비춰진 환한 자연빛, 창문을 닫자 순식간에 방을 뒤덮는 어두컴컴함, 화장실의 백열등이 만들어내는 푸른색의 인공적인 빛. 세 가지 빛을 거치는 과정은 방을 가로질러 둘러보는 동선과 원테이크 만으로 만들어진다.


어둠 속에 몸을 누이는 고르차코프의 행동은 그가 햇빛(자연빛)을 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호텔 로비에서 늘 어둠 속에 위치해 있으며, 온천가를 걸어갈 때도 그림자 안에 숨어 스스로의 모습을 실루엣처럼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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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햇빛을 피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고르차코프는 하늘로부터 내리 쬐여지는 햇빛을 피하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왜 자연빛으로부터 숨으려 할까? 빛을 피한다기 보단 어둠을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과거의 시절을 본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적당한 산맥 위의 아늑한 집. 은은히 울려 퍼지는 민요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가축들. 흑백으로 그려진 회상들은 까만 어둠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이젠 실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눈을 감아야만 그릴 수 있는 헛된 망상과도 같다.

 

이미 떠나간 것을 잡으려 하기에, 간혹 향수는 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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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물은 대개 영적 존재를 상징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하찮아지는 인간이란 존재. 그 어디로도 숨지 못하고 피할 수도 없는 거대한 시선. 어둠 속에만 웅크려 있으려 하는 고르차코프라 하더라도 결국 빛에 노출 될 수밖에 없다. 자연빛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은 막강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며 그를 내리쬔다. 조명으로 만들어낸 인공빛으로 대체하기엔 그것의 힘이 너무나도 크다.


때문에 도메니코 집에서의 장면은 빛과의 대면을 보여준다. 입구에 펼쳐진 산맥과 강물의 모형들은 멸망 후 새로운 세계로 구원 받고자 했던 그의 실패한 소망과, 그 실패마저 움켜쥐려 하는 집착을 보여준다.

 

그러한 역사가 깃든 집의 벽에 기댄 고르차코프의 얼굴에 조각 같은 자연빛의 파편이 박힌다. 눈 부분에만 햇빛이 들어와 있다. 어둠을 피하려만 했던 고르차코프는 자연으로부터 암묵적인 계시를 받고 도메니코에게 말로써 자신의 임무를 설명 받는다. 마치 신을 직접 보았다는 종교인들의 증언처럼, 이 공간에서 고르차코프는 초월적 분위기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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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차코프는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려 한다. 늪(어둠)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여기가 집인데 왜 날 끌어냈냐며 따졌다는 누군가의 일화를 들먹이며 잔뜩 술에 취하고 투정한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공간이야 말로 완벽하게 종교적 공간이다.

 

바위와 풀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상아색 햇빛이 잔뜩 들어와 일렁거린다. 어린 아이에게 위협을 가해보지만 아이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책(성서)을 불태우고 백포도주에 취하려 하지만 결국 그가 처한 상황은 성수의 한 가운데 젖어들었다는 것뿐이다.

 

자연빛 속에서 눈을 감았을 때 그려진 것은 예전과 같은 흑백의 회상이 아니라 도메니코의 얼굴을 본인에 투영하는 일이다. 그곳에서야 그는 자신이 빛을 피했음을 인정한다. “만 년 동안 태양을 보지 않고 햇빛을 겁내며…”라고 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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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주인공들이 그렇듯 그는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자신보다 더 하찮은 불꽃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물이 빠져버린 온천에는 온전한 자연빛이 가득하고 뿌연 안개가 사라져 시야는 맑다. 빛을 피하던 고르차코프는 스스로 피워낸 새로운 빛을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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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스탤지아>는 인공빛으로 눈속임을 하며 어둠 속에 숨으려 했던 고르차코프가 자연빛으로써 신과 마주하고, 그 빛을 받아들이며 자기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다. 어둠으로부터만 파생되었던 과거는 그리움을 넘어 자기파멸과 죄책감에 이르게 했으며, 신은 그것을 빛으로써 구원하고자 한다.


향수라는 감정이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된 이유는 타르코프스키 감독 본인이 겪었던 향수가 더 이상 추억의 정취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해치려 한다’고 표현했던 조국에 대한 애정이 어쩔 수 없는 원망과 증오로 변해가고, 그럼에도 끊을 수 없는 정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이 되었다가 이내 지나간 세월에 대한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지만 종교적 숭배미를 통해 극복하고 구원 받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훗날 향수의 대상이 되어버릴 스스로에 대한 그의 자기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노스탤지아 Nostalghia>,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3, 이탈리아,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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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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