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에 아주 풍덩 빠져보고 싶다면, 연극 '언더스터디'

등장인물과 관객,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뛰어넘는 유쾌한 블랙코미디
글 입력 2022.01.3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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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극 <언더스터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으나, 관람 전에 읽으셔도 무방할 수준의 약한 스포일러임을 알려드립니다.



공연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언더스터디’라는 말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언더스터디(Understudy)’란 어떤 공연에 출연 중인 배우가 공연하지 못하게 될 경우, 그를 대신해 공연하는 배우를 뜻하는 공연계 용어다. 예를 들어 현재 예술의전당에서 *원캐스트로 공연 중인 <리처드 3세>의 주연 배우 황정민이 어떤 사정에서든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경우,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려면 누군가는 그를 대신해 ‘리처드 3세’ 역으로 무대에 올라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언더스터디 배우이다.


*원캐스트: 공연 프로덕션에서 1개의 역할에 1명의 배우만 기용하여 공연을 진행하는 것. 한국의 경우, 대다수의 프로덕션이 1개의 역할에 여러 명의 배우를 기용하는 ‘멀티플 캐스트’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지킬/하이드 역을 3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연기하는 것이 멀티플 캐스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브로드웨이와 같은 해외의 공연들은 기본적으로 원캐스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언더스터디 제도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연극 <언더스터디>는 바로 이 '언더스터디' 배우들의 이야기다.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작품이 공연 중인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에서 언더스터디 배우를 위한 리허설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언더스터디 '해리'와 '제이크', 리허설을 진행하는 무대감독 '록산'이 한 데 모여 얼키고설키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연극 <언더스터디>는 공연계의 언더스터디 제도라는 소재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와 화려한 예술계의 이면을 훌륭하게 담아냄과 동시에, 독특한 형태의 구조를 취해 보는 사람의 흥미를 쉽게 자극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더스터디'다

 

연극 <언더스터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언더스터디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해리'는 '제이크'의 언더스터디이고, '제이크'는 '브루스'의 언더스터디이다. 즉,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불안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무대 감독으로 등장하는 '록산'도 처지는 같다. 무대 감독은 작품 별로 고용되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한 자리인 것은 마찬가지다.


또한 그들은 모두 스포트라이트를 꿈꾸면서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 '해리'는 언더스터디 자리도 인맥을 통해 간신히 얻어내는 무명 배우로, 자신의 예술을 펼치고 싶어하며 스스로는 대본을 '재창조'할 자격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대체할 기존 배우의 연기 노선을 그대로 따라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제이크'는 대박이 난 영화에 출연해 유명한 배우가 되었고 돈도 잘 벌지만, 항상 다른 '더 잘 나가는' 배우들과 비교당하며 경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심지어 진다.) '록산'은 자타공인 뛰어난 배우였으나, 여배우가 설 자리가 없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무대 감독으로 커리어를 전향한다.


이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이 세 사람은 무대 위에 있지만 꼭 바로 곁에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바로, 실제로 우리 옆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별이 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사회에 뛰어들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의 삶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대체가 가능한 사람. 불안이 삶이 되어버린 사람. 모두가 그렇다.


무대 위의 삶이 언뜻 보면 화려한 듯 하지만 결국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삶일 뿐이라는 것을 이 연극이 알려주는 순간, 묘한 위안이 찾아든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 속 비범한 인물의 파멸을 지켜보며 나보다 나은 사람이 나보다 큰 괴로움을 겪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언더스터디>를 보는 우리는 무대 위 인물이 나보다 나아 보이지만 사실상 다를 것 하나 없이 똑같다는 데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제이크의 경우 단순한 액션 영화 배우에서 벗어나 무대 연기 같은 진정한 예술을 하고 싶어하지만, 파라마운트와 브로드웨이로 대변되는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 중에서는 망설임 없이 상업 예술을 택하며 순수 예술을 폄하하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보기 좋지 않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종속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씁쓸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언더스터디_기사사진2.jpg


 


그래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언더스터디>야, 카프카 작품의 리허설이야?

 

<언더스터디>는 아주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바로 '제 4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4의 벽'이란 객석과 무대 사이의 존재하지 않는 장벽으로, 객석의 시공간과 무대의 시공간을 분리한다는 약속이다. 다시 말하면,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객석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제 4의 벽이 존재할 경우 무대와 객석은 소통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극엔 제 4의 벽이 존재하지만, <언더스터디>에서는 아니다.


우선, 극중 등장인물이 관객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가장 첫 장면에서 해리는 아예 객석 한가운데에서 등장해 무대 위로 걸어올라간다. 그리고 한참 동안 관객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독백을 한다. 특이한 점은, 오로지 해리만이 제 4의 벽을 뚫고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넨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유일한 인물인 해리에게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가장 몰입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극과 객석이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극장에 처음 들어가면, 무대 위에는 카프카의 연극 공연을 위한 세트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 나는 <언더스터디> 공연을 보러 왔는데 웬 카프카?'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객은, 공연의 막이 오르면 자신이 앉아 있는 객석이 <언더스터디>의 주 무대인 '카프카의 작품이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의 객석'임을 깨닫게 된다. 관객이 말 그대로 연극의 이야기 속에 들어앉게 되는 셈이다.


리허설을 객석에서 지켜보는 무대 감독 록산 역의 배우는 <언더스터디>의 관객 옆 객석에 앉아 리허설 진행을 '연기'하고, <언더스터디>의 조명과 음향 콘솔 쪽에 끊임없이 사인을 보내는 '연기'를 한다. 심지어 <언더스터디>의 배우들은 '무대 뒤에 다녀올 일'이 생길 때마다 관객이 입장하는 객석의 문을 드나든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한몫 했겠지만, 계속 이런 장면이 반복되다 보면 연극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진다. <언더스터디>의 관객은 내가 지금 연극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작품의 리허설 현장에 앉아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런 경험은 정말로, 신선했다. 더불어 인물들이 한층 더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감정 이입하기도 더 쉽다. 그리고 연극을 관람할 때 나 자신을 이입하게 되면, 연극을 한층 더 인상 깊고 재밌게 관람할 수 있게 된다.


*

 

사실 <언더스터디>는 줄거리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인물들이 얼키고설키며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예상치 못한 전개가 유쾌함을 더한다. 거기에다 공감하기 쉬운 인물들의 사연이 더해지면 단순한 코미디 이상의 울림을 주는 작품이 되고, 마지막으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박한 형식이 이 작품을 남다른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의외의 전개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극을 관람하는 내내 축적해온 생각과 감정이 폭발하며 내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해볼 기회를 준다. 이 작품을 관람한 사람들은 각자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았을까? 함께 웃었을까, 아니면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까?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언더스터디일지도 모를 당신은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게 될까?

 

 

[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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