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킹메이커', 애기똥풀의 초상화 [영화]

글 입력 2022.01.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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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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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은 늘 존재한다. 이름 끝에 대통령이 붙는다니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주변의 누군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면 우리도 모르게 놀라거나 푸스스 웃을 수도 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마지막 한자리까지 나아가겠다는 꿈은 어느 치열한 오디션에 비할 수가 없다. 실패와 탈락은 쉽고, 성공에 이르는 게 너무도 험난하기에 나오는 반응이다. 모든 성공이 그렇듯 혼자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내 이름에 도장이 찍힌 표로 얻어야 한다.

 

만에 하나 대통령이 되어도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을 기대하기에 가장 많이 실망하고, 그 때문에 가장 많이 욕을 먹는다. 힘든 소리를 할 수도 없는 게 사람들이 되물을 것이 뻔하다. 그러게, 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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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서창대. 그림자. 그가 마블이나 디씨의 슈퍼히어로라면 그림자라는 별명이 탐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게 큰 장점이었을 테지. 그러나 이 그림자는 빛을 갈망하고, 스스로 훤히 드러나는 곳에 머물고 싶어 하는 안타까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게, 그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정치다.


한낱 궤변론자처럼 보인 건 잠시뿐이다. 좋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선거에 보기 좋게 미끄러지는 김운범이 얼마나 답답했나 보다. 사부작거리며 적은 손 편지에 잘 말린 애기똥풀까지 얹은 걸 보니 이거 진심이네. 직접 찾아가 나를 믿고 써보라며 지박령처럼 기다렸다. '정의가 사회가 질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한 김운범에게 그는 '정당한 목적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라며 운범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있는 법인데, 스승이라는 게 모든 걸 방어할 수 있는 카드인가. 순간 운범의 말문을 막은 대가로 기회를 얻었고, 창대는 선거에서 승리만을 가져왔다. 그전까지는 운범이 줄줄이 고배를 마시던 그 선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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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반드시 이기는 전략. 선거 승리의 달인. 창대에겐 대체 무슨 비결이 있을까? 뚜껑을 열어보니 영리하고도 영악하다. 때로는 더럽고 치사하고 뒤통수가 난무한다. 전혀 혹은 차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방법도 많다. 상대가 독재 정권에서 힘과 사람, 돈을 선점하고 온갖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터라 이 정도는 큰 잘못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상대 당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방법은 연기와 의상, 발품이 담겨 있었다. 기껏 잔뜩 돈을 풀어 상대 편이 전달한 물품과 자금을 교묘하게 빼앗아 심지어 '택갈이'를 해서 쓰다니. 이런 참신한 발상이 또 어딨겠나. 돈도 없고 든든한 뒷배도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적을 그들도 모르게 우리 편으로 돌리는 일이다. 때로는 입에 바른 말보다는 비밀이라며 귓속말을 한마디 흘리고, 이성보다는 욕망을 공략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실제로 어떤지만큼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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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이런 방식을 운범은 마음에 들어 하진 않는다. 상대가 이런 방식을 쓴다고 해서 나까지 그 길을 가야 하겠냐 싶은 거다. 사실 운범과 창대의 충돌은 이미 처음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창대도 애기똥풀이라면서 독이기도 하지만, 독을 치료하는데도 쓰인다고 자신을 소개한 걸 보면 양날의 검이라는 건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운범은 종종 창대에게 근신을 내리고 거리를 둔다. 그 벌을 창대 역시 별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엔 언제 그랬냐는 듯 해결사처럼 창대가 등장한다. 가까이 두기에도, 멀리 두기에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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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비대칭적인 성장이 돋보인다. 운범이 성장한 만큼 창대도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그림은 볼 수가 없다. 운범이 더 빛나고 커다란 존재가 되어갈수록 창대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곤 한다. 운범을 지금의 운범으로 만든 장본인은 창대인데도, 그에게 와닿는 건 없다. 어느 당선 사진에도 없으며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도, 자신의 존재감을 키울 수도 없다. 이 정도 능력이 있다면 다른 생각을 품을 만도 하다. 당신이 앉아있는 그 자리, 내가 앉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창대가 운범의 뒷받침이 되기로 한 건 왜일까. 그가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운범은 정책만으로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자신의 고향이 이북인 것만으로도 당시 정치적으로는 큰 영향력이 있을 수 있었다. 그동안 전면에 나오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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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하지만 창대가 운범의 '곶감 단지'처럼 느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배경은 운범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빈말이라도 운범은 같이 일하는 비서에게 말했듯 창대에겐 공천을 주겠다거나, 정치를 할 때 지금 도와준 걸 잊지 않고 나도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그들이 다른 길을 가게 된 순간까지도.


이해는 간다. 운범은 이제 대권후보가 되었고 마음대로 창대를 위해 달려갈 수는 없는 처지다. 심지어 운범의 자택에 일어난 일종의 테러가 창대의 소행으로 몰리고 있어 위험하다. 상대편이 창대가 운범의 해결사이자 그림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창대가 생각하고 해왔던 수법으로 역공을 맞게 됐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 마지막 대화에는 진심을 숨긴 채 마음에도 없는 말이 오고 갔다. 잔인했다. 운범이 영화 전반에 걸쳐 창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건 역설적으로 그때였다. 그간 수많은 고마운 순간이 있었을 텐데도. 창대는 스스로를 하지도 않은 짓을 했고 국민을 어리석고 멍청하게 생각하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운범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게 국민의 뜻이라는데 헛웃음을 지었다. 국민의 뜻? 그 번지르르한 작품은 실은 누구 작품인가? 나를 부끄러워하면서 필요로 해서 쓴 건 누군가? 그 '누구'에 나 역시 작품에 상당한 지분이 있진 않냐고.


그제서야 창대는 운범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네를 마음 편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운범은 그에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 '자네는 정치를 해선 안될 사람'이라며 비수를 꽂았다. 늘 그에게 '준비가 되면', '때가 되면'이라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준비가 안 된 게 아니라 애초에 준비란 걸 해서도 안되는 거였다면서. 표현하지 않는 마음을, 반대로 표현하는 진심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프고 실망스럽다. 혹시나 진심의 파편이 크다면 실망하게 되고 그 파편이 눈속임이라면 아프다. 어느 쪽이든 상처는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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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운범과 헤어진 후 애기똥풀은 독이 되었다. 창대는 이번 선거에서도 역시 이겼다. 문제는 이번에는 반대편이라는 점. 그는 자기 손으로 운범과 바라보던 길을 막은 셈이다. 그것도 꿈이 이뤄지기 직전에.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을 주겠다고 회유하다가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수법은 진작에 본 적 있으니까.

 

한참 후에 운범은 꿈을 이뤘다. 창대가 없이. 누군가 내 달걀을 훔쳐 가면 닭에 붉은 실을 묶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범인으로 몰자는 창대. 훔친 사람에게 달걀을 선물로 줘서 마음을 돌리게 하자는 운범.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바른 목적과 바른 수단이 승리한 건 아닌가. 운범이 옳고 창대는 틀린 것 아니라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배운 내용이 그렇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그건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못하다. 노력하면 성공은 뒤따라 온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결국. 그런데 그렇게 배운 건 왜일까? 거꾸로 생각하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 도덕, 윤리. 이것들이 처음에 왜 생겼을지 생각해 보자. 현재 잘 지켜지는 미풍양속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하는 조상님의 따듯한 애정일까? 오히려 지켜지지 않는 것을 막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약속은 깨지고 신뢰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약속을 지키고 신뢰가 중요하다고 남긴다. 그게 지켜지기 쉽지 않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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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다르다. 그 이상에 상처 입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과정만 좋고 결과가 없어선 소용이 없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고 바라는 성공이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는 익숙하지 않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조금은 손해 보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건 능사가 아니다. 약하거나 만만하게 보이면 무시하거나 착취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생긴다. 때로는 거래를 하고 타인의 약점을 알아둬야 하며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써야 한다. 정치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전략을 쓸지 선택해야 한다. 더 높은 자리, 돈과 명예, 유한하고 희소성이 있는, 얻고 지켜야 할 모든 것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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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과정과 결과, 목적과 수단을 생각하면 운범과 창대의 이야기는 살아가는 방식 어디에 적용해도 이상하지 않다. 운범과 창대의 목적은 같았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 운범의 수단은 정당할지 몰라도 때로 효과가 부족하고 창대의 수단은 효과적이지만 때로 정당하지 않았다.


창대는 반드시 틀리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운범의 전략가였다. 이름을 걸고 독자적인 뜻을 펼칠 기회가 없었기에 그가 '왜'보다 '어떻게'를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략가로서 그는 최고의 결과를 선사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들었고,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움직였으며, 언론을 활용하여 수많은 위기를 벗어나 승리를 얻었다.


창대가 운범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운범은 더 빨리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람들은, 운범은 창대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뤄준 장본인에게. 운범보다 창대의 능력이 빛을 발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생겼을 것이다. 킹메이커가 누구를 선택하냐에 따라 모든 게 달렸을 뿐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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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창대 없이 운범이 최종적으로 선거에 승리했다는 말은 그저 운범의 꿈이 결실을 맺었다는 점이 드러낼 뿐이다. 창대가 왜 참여할 수 없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창대가 없이라는 말은 사족일 수도 있다. 이미 운범은 창대와 함께 하면서 창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창대 역시 단순한 전략가가 아니라 운범처럼 목적과 여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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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선거에서 제일 필요하지만 제일 재미없는 사람은 투표를 하는 유권자가 아닐까?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이 고생을 하고 정치를 하나 싶었다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재밌을 수도 있지만 잊지 말자.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재창작되었다는 걸.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창대의 전략이 먹혀들어갈 때마다 옳거니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무엇보다 성공의 결과가 눈으로 보인다. 사무실의 크기가 성공의 지표다. 처음 창대가 찾아갔던 운범의 사무실은 작고 허름하고 어두웠다. 그 사무실은 점점 크고 넓고 환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한다.


둘이 쌓아 올린 성공은 커졌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꿈을 향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느라, 막상 서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더 쉽게 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창대는 운범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운범이 늘 그렇게 강조하던 이상과 목적이 창대에게는 곧 운범이었다. 상대 진영에서 거저 주겠다는 공천권을 창대는 포기했다. 운범이 창대가 준비가 더 필요하고, 정치를 해 선 안된다는 말은 기대치와 관점의 차이였다. 상대편의 이 실장은 창대가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나. 보기보다 순정파인 게 문제라 아깝다고 웃어넘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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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2022

 

 

이러면 어땠을까. 근신시키거나 기약 없이 준비하라고 하는 대신 운범이 창대를 정치를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었다면, 애기똥풀이 약이 될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면. 운범이 창대에게 그림자로 불리게 해서 미안하고,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창대가 운범에게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난처한 상황을 종종 만들어 미안하다고 했다면. 듣는 귀가 많았다면 글이라도 남겼다면 어땠을까. 결이 다를 뿐 열망은 같다. 그래서 서창대 없이 김운범이 선거에 우승했다는 말에 씁쓸하지 않았다. 바라던 순간이 이제야 찾아오지 않았나. 아마 운범은 기억 속에 창대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곁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세상사는 알 수 없는 일이지 않나. 그토록 빛을 갈망하던 그림자,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들판의 애기똥풀. 영화에서 그림자 서창대는 빛이 나고 그의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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