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제주라는 땅에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건축가들을 만나다 - 나는 제주 건축가다

글 입력 2022.01.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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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형훈 기자가 제주에서 활동하는 19인의 건축가와 만나 그들과 나눈 대화를 담은 인터뷰집 <나는 제주 건축가다>를 읽었다. 직관적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제주’와 ‘건축’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이 내용의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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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형제가 많은 내게 ‘온전한 나만의 공간’은 오랜 염원이었다. 복작복작한 집에서 벗어나 룸메이트와 지내야 했던 기숙사를 거쳐 드디어 지금의 독립 공간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에겐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완벽한 보금자리는 없다. 쓸고 닦으며 미루던 집안일을 끝낼 때 문득 고개를 들어 집을 살펴보면 구석구석 모든 공간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험난한 서울살이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인 이 집에도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정해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여지없이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이지, 내 소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집’이라든 단어에서 안락함 대신 초조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치솟는 집값 소식을 접하며 죽기 전까지 온전한 내 집을 가질 수 있을까, 평생 다른 이의 건물을 빌려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절망하는 나날이 이어진다. 지금 내가 편하게 지내고 있는 이 집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격과 그에 발맞춰 올라가는 고층빌딩들의 향연인 현대사회에서 건물의 의미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농담으로 소비될 정도로 근본적인 의미를 벗어나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에서만큼은 건물에 대한 현대사회의 삭막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장소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다. 가격이나 크기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제주 건축가다>에 나온 건축가들 모두 건물을 설계할 때 화려한 외형이나 크기에 집착하지 않고 건축주가 이 공간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생활할지에만 집중했다. 인터뷰에는 건축주와의 협의 방법을 묻는 공통 질문이 있었다. 인터뷰이 대부분이 의견을 밀어붙이기에 급급했던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을 인정하고 결국 그 공간의 주인은 건축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답변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건물 붕괴사고에 관한 뉴스를 자주 접했다. 신식 건물의 화려한 위용을 자랑한 지 불과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부실 공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사례였다. 책을 읽다가 유독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자기를 뽐내기 위해서라도 고개를 내미는데, 뭔가를 보기 위해서도 고개를 내민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높을 필요가 없다. 마당 자체로도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굳이 너머에 있는 오름이나 한라산, 바다를 보려 하지 않아도 됐다. 어떻게 보면 가치의 차이일 수도 있다.

 

-P.51

 

 

‘제주에 맞는, 제주에 어울리는 건축은 뭘까.’라는 질문에 대한 백승헌 건축가의 대답이다. 이 부분을 읽고 지금 새로 세워지는 모든 건물이 고개를 내밀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SNS에 올린 사진을 보면 건축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이 사용하는 내부일 텐데 언젠가부터 시야와 외관만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러한 인식에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길을 걷다가 화려한 건물을 마주하면 ‘저 건물 비싸겠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저런 데 살아보고 싶다.’라는 세속적인 한탄이 절로 나오곤 했다. 그러나 인터뷰 중간중간에 삽입된 건축가가 작업한 건물 이미지를 보면서는 그러한 박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건축가가 얼마나 해당 건물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이미 인터뷰를 통해서 접했기 때문에 그 노고의 결과물이 찬란하게 빛나 보일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거쳐왔던 수많은 특별한 장소들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추억의 공간을 찾으면 모든 게 시시각각 변하는 이 세상에서 세월의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장소를 보면 안도감이 느껴지곤 했다. 모든 게 변하고 나라는 사람마저 변해도 여긴 그대로니까 내가 지녔던 추억도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이었다.

 

책을 다 읽고 다시금 나의 작고 소중한 보금자리를, 이 험난한 도시에서 겨우겨우 마련한 나만의 공간을 바라본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자명하지만, 머무는 동안만큼은 행복한 기억으로 메워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제주


 

이 책에서 인터뷰한 건축가들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제주에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지역 중에서 타지 사람들에게 제주도만큼 대상화된 공간도 없다. 지금은 예전보다 수월하게 오고 가기 때문에 제주도라고 신기해하는 시선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제주도는 주거지보다 관광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책에 나온 건축가들은 대부분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단순히 멋진 건물 한 채 완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주의 독보적인 자연경관의 가치를 살리는 방향으로 뻗어내고자 노력했다.

 

책을 읽으며 건물 하나가 새로 만들어질 때 주변 환경과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롭게 깨달았다. 몇 년 전부터 SNS에 제주도 여행 게시물이 많이 올라오면서 사진 찍기 좋은 예쁜 공간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사진에 매혹돼 그곳을 찾으면 만족스럽기도 했지만, 주변 경관과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건물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건물이 존재하는 도시다. 책에서 언급되는 제주와 몇백 년 전에 세워진 비슷한 결의 건물들로 이뤄진 유럽의 거리를 비교하면서 읽었다. 제주도는 섬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곳인데 언젠가부터 ‘스팟(Spot)’이라는 이름으로 혼자서만 예쁜 공간이 군데군데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공간이 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는 세심한 배려는 비단 제주에서 건물을 새로 지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미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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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능의 책방 아베끄

 

 

이 독서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바로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떠나온 제주 사람으로서 내 뿌리인 제주도의 지역성을 건축과 함께 논의해보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제주의 특징을 새로 자각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안거리와 밖거리에 대한 분석이나, 제주에는 땅의 끝이 있어 좋다는 조진희 건축가의 답변이 그러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답답한 섬을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고유한 특징을 분석해본 적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줄 알았던 나의 유년 시절 곳곳에 제주 고유의 지역성이 깃들어있었다.

 

집 앞에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저 너머의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육지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제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빠르게 잊어버렸고, 그렇게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줄 알았다. 육지 생활도 제법 길어져 더는 이 환경이 새롭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문득 깨달았다. 내 안에서 제주의 뿌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걸.

 

이 책을 읽는 경험은 애써 외면했던 애증의 인연과 다시 만나 그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책에 언급된 건물 중 내가 가본 곳은 거의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활동했으면서 제주는 지루하다고,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한 과거가 반성 되었다.

   

 

“터무늬(터에 새겨진 무늬) 없는 삶이란 땅과 무관한 유목민적 삶이다. 정주한다는 것은 땅에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며, 기억을 적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재화를 축적하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는 도시유목민 우리에게, 땅에 남겨진 기억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사라져야 하는 폐습이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기억상실을 강요받았으며, 과거란 그냥 지나간 것으로만 안다.”

 

-P. 198

 

 

건축가 승효상의 책에 담긴 문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은 나 혼자 읽은 게 아니다. 제주라는 땅에 깃든 나의 유년 시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수많은 역사와 함께한 독서였다. 책을 통해 건축과 지역성의 의미를 되돌아본 지금 다시 제주도를 찾게 된다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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