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직 무대는 끝나지 않았다 - 언더스터디

글 입력 2022.01.2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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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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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언더스터디>, 2022년


 

시작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총 소리가 무대 위를 울려퍼진다. 그리고는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뛰쳐나오는 한 남자. 총소리의 주범이 자신임을 알림과 동시에 관객석을 향해 깜짝 놀랬냐고 묻는다. 수수한 차림에 수더분한 인상을 보유한 그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연기해서 깜짝 놀랬을 것이라 말한다. 시작부터 제4의 벽을 허물어트리며 대담하게 행동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해리', 무명배우다.

 

'해리'는 운좋게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작품(Castle Trial)이 원작인 연극의 언더스터디로서 캐스팅된다. 스타 배우 '브루스'의 언더스터디, '제이크'의 언더스터디라는 다소 복잡한 관계도 안에서 그는 20세기 최고의 대문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리라 천진난만하게 다짐한다. 한편, '브루스'의 언더스터디이자 상대적으로 '해리'보다는 조금 인지도가 있는 '제이크'는 자신의 언더스터디로 캐스팅 된 이름 모를 배우 '해리'의 존재가 영 달갑지 않다. 그 가운데 무대 감독 '록산느'는 제이크의 언더스터디가 과거 자신의 前 약혼자였던 '해리'였음을 발견하자 주체 못할 감정 앞에서 쉽게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다른 목적을 가진 채 복잡한 이해관계 안에서 숱한 갈등을 벌이는 와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에 모두가 직면한다. 자신의 처지를 쉽게 긍정하지 못한 언더독들의 대환장쇼는 그렇게 폭주하기 시작한다.

 

연극 <언더스터디>는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작품이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의 어느 가상의 무대 공간을 배경으로 방대한 텍스트들을 쏟아낸다. 행간에 감춰진 작품의 메시지와 통렬한 유머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110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주제를 향한 스타일리시한 관점과 위트들이 무대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관객석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웃음보를 터트리지만 동시에 자신의 현실을 일정 부분을 상기시키는 국면으로 작품이 전환되는 순간 묘한 처연함을 불러일으킨다.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유발하는 연극의 서사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언더라는 그늘 속에 감춰진 실존의 실체에 토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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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배우로서 인지도가 1도 없지만 예술을 향한 집념 하나로 궁핍한 삶을 어찌어찌 영위 중이다. 변변치 않은 영화에도 제대로 캐스팅 되지 못할 만큼 박복한 와중에 프란츠 카프카라는 대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공연에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은 그에게 한 줄기 빛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큰 그는 '제이크'와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시종 실수를 거듭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신을 고깝게 보는 '제이크'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인한 언쟁이 지속되면서 사태는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좋게 말하면 천연덕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다소 눈치가 없는 그의 성격은 자신을 무시하는 '제이크'의 시선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한다. 하지만, '록산느'와 관련해서는 결코 그렇지 못한다.

 

결혼을 2주 앞두고서 홀연히 자신을 남긴 채 사라진 '해리'를 향한 '록산느'의 감정은 결코 곱지 않다. 자신을 왜 떠났냐는 그녀의 질문에 단지 예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냐는 답변으로 애써 무마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그 이상의 변명도 내뱉지 못한다. 그로인한 업보는 한때 연인이었다는 이해관계 이전에 무대 감독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록산느'가 '해리'에게 불리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되돌아 온다. 카프카의 작품을 향한 자신의 시각을 해리가 내비취자 록산느는 언더스터디에게 그 어떤 발언권도 없다는 점을 내세우며 그의 입을 가로막는다. 언더스터디의 언더스터디라는, 그늘 속의 또 다른 그늘안에 위치한 해리의 존재는 자신의 인지도 만큼이나 무대 위에서 역시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이 꿈꿔온 예술적 가치를 무대 위에서 뽐낼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무명배우 해리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해리에게 카프카는 도달하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않은 환상을 의미한다.

 

반면, '제이크'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해리'가 언더스터디인 것처럼, 자신 역시 브루스의 언더스터디라는 '제이크'의 입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개봉 첫 주에 9천만 달러를 거둔 액션 영화의 주연이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인지도가 높은 브루스의 언더스터디라는 점은 제이크의 하늘 높은 자존감을 수시로 가로막는 그늘이다. 그 와중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브루스가 무대에 설 수 없을 수 있다는 소식은 자신을 널리 알리고 싶은 제이크의 욕구를 자극한다. 하지만, 리허설 중간에 수시로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제이크가 민감하게 반응하듯, 그의 진짜 관심사는 자신이 출현하고픈 영화의 캐스팅 여부다. 그 와중에 자신의 언더스터디로서 생짜 무명배우가 기용되었다는 소식에 제이크의 자존감이 다시한번 발동되면서 그를 향한 날선 시선을 시종 들이민다.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동선으로 움직이는 그를 향한 제이크의 성난 힐난이 이를 대변한다, "변신의 그레고르처럼 말이에요. 아시겠죠?"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은 브루스의 언더스터디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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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언더스터디>, 2022년

 

 

물론, '제이크'의 캐릭터는 결코 자존감 넘치는 배우에 국한되지 않는 입체적 캐릭터성을 띄고 있다. 유머와 위트가 산재한 작품 내에서 가장 큰 웃음 지분을 '제이크'가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에 사용할 소품 총을 자신의 세탁물 밑에 놓고 올 만큼 헛점 많은 그의 성격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론을 해리에게 설파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그와의 앙금을 해소시키는 아이러니를 촉발시키며 예측하기 어려운 작품의 유머를 몸소 책임진다. 그 과정에서, 카프카의 작품적 특색을 언급하는 장면은 '제이크'가 단순히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혈안이 급급한 배우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종국에 이르러 브루스라는 스타 배우가 출현해서가 아닌, 프란츠 카프카라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을 지가 궁금했기에 관객들이 찾는 것이라는 '제이크'의 외침에서 이는 더욱 부각된다. 관객의 열렬한 반응에 힘입어 배우로서 한 몫 챙길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 싶어하는 현실지향적 캐릭터 제이크에게 카프카는 환성을 의미한다.

 

'록산느'의 경우는 말 그대로 고래 등에 시종 터지기 급급한 새우의 처지다. 한 쪽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스타로서 대우해주길 바라는 어린애 같은 '제이크'가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자신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안겨준 꼴도 뵈기 싫은 남자 '해리'가 있다. 그 사이에서 두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언쟁을 어떤 식으로든 무대감독으로서 조율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무엇하나 나아질게 없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보좌해야 할 조명/음향 스태프는 자신이 내린 지시와 정반대로 일처리를 하면서 그녀의 속내를 사정없이 헤집기에 이른다. 누구하나 의지할 구석이 조금도 없는 그녀는 공과 사의 한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행한다. 물론, '해리'와 '제이크'만큼이나 그녀 역시 속내는 여러모로 복잡한 또 한 명의 언더독이다.

 

'해리'와의 인연은 록산느 역시 무대 위를 갈망해온 배우라는 점에 기인한다. '해리'와 '제이크' 못지않게 배우로서의 열정을 가진 그녀는 한때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지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관계로 현재 무대 뒤를 지키는 스태프가 됐다. 그럼에도 연기를 향한 욕구가 여전한 그녀는 취조 장면과 관련한 연출을 놓고서 '제이크'와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었던 현실의 불만을 터트린다. 재판관은 왜 여자가 맡으면 안되냐는 공연 업계의 공공연한 성차별을 시작으로 기존의 시각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재해석한 배역 연기를 '제이크' 앞에서 말 그대로 휘몰아치듯 선사한다. 벙찐 '제이크' 만큼이나 그녀의 과거를 몰랐던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록산느'의 공연은 두 언더들 사이에서 감춰진 또 다른 언더의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향해 응어리진 감정을 표출한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되려 고통만 안겨준 예술을 향해 그녀는 말한다, "나는 카프카가 너무 싫어!" '록산느'에게 카프카는 환멸,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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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언더스터디>, 2022년

 

 

세 사람의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록산느'에게 걸려온 단 하나의 통화가 그 모든 과정들을 도로아마타불로 만든다. 브루스가 새로운 영화의 출현이 결정되면서 차후 예정되었던 공연 회차들이 전부 취소될 것이라는 통화는 이 모든 과정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 벌어졌는가 하는 허무함을 진하게 드러낸다. '해리'는 물론, 자신 또한 언더스터디라는 처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제이크마저 사실상 공연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은 스타 1명에 좌지우지되는 쇼비지니스의 잔인한 현실을 대놓고 노출시킨다. 1편의 영화 출현에 2,200만 달러 개런티를 보장 받는 브루스에게 멀쩡한 공연을 취소함으로써 발생하는 위약금 따위는 아무 의미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브루스에게 카프카 또한 아무 의미없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관점의 차이, 의미의 탄생

그렇게 형성된 언더독들의 무대



카프카의 작품을 보기위해 찾은 관객들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제이크'의 일갈과,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록산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벙찐 상태로 서있는 '해리'. 언더독들을 위한 무대는 그렇게 소멸되고 만다. 하지만, 해리의 천연덕스러운 한 마디는 상실된줄 알았던 언더독들의 전투의지를 다시금 생성시킨다. "제이크 뭐해요? 빨리 남은 춤 가르쳐줘요"

 

흥겨울 수 없는 상황에서 '해리'가 던진 한 마디는 잔잔한 호수 위로 던진 조그마한 돌맹이가 자아낸 파장처럼 격정적인 기운을 세 사람에게 자아낸다. 해리의 눈치 없는 말과 행동을 '록산느'는 자중하려들지만, '제이크'는 오히려 '해리'의 말을 맞장구치며 관객 없는 무대를 위한 마지막 춤사위를 벌인다. 비록, 무대를 준비하기까지 저마다의 속내는 다를지라도 카프카로 상징되는 예술을 향한 사랑 하나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해리와 함께 '제이크'는 신명나는 춤 한 판을 벌인다. 두 남자의 어처구니 없는 춤사위를 지켜보던 '록산느'는 '해리'와 '제이크'의 지속적인 요구에 끝내 굴복하듯, 그들 못지 않은 몸짓으로 대환장쇼의 방점을 찍는다. 물론, 끝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록산느'의 속내를 뒤집어놓는 스태프는 이 모든 대환장쇼의 대미를 장식하는 음악을 재생시킨다.

 

극작가 '테레사 레벡만'의 재기 넘치는 대사들은 유머와 쓰린 감정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유발하며,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로 로컬라이징 된 몇 몇 대사들은 작품에 내재된 재기를 더욱 증폭시킨다. 재치로 가득한 작품의 연출은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이 서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대목으로서, 현 시국을 반영한 인물들의 마스크 착용은 물론 각기 다른 공간에 위치한 인물이 다른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며 전개에 큰 영향을 주는 사내 스피커가 대표적인 극 중 사례들이다. 백미는 무대와 관객석 사이를 적재적소로 넘나든는 인물들의 독백으로서, 인물의 심적 상태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서 작품에 생기까지 불어넣는다. 이는, 자신을 위한 무대는 존재하지 않다는 무기력한 순간을 체감한 관객들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서사와 시너지를 이루며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작품을 승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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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언더스터디>, 2022년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브루스 측으로부터 걸려온 통화 하나로 세 명의 언더독들은 삽시간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하나 쉽게 입을 열기 어려운 순간 '해리'는 앞일은 뒤로한 채 오로지 지금을 즐기자는 마인드로 하던 춤연습을 계속 하자고 외친다. '해리'의 진심이 도달이라도 하듯 이에 호응하는 '제이크'지만 '록산느'는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녀의 무관심을 진정 되돌리려는 두 남자는 그녀의 동조를 요하며 외친다, "침묵은 x나 최악의 패배야!"

 

관점을 달리하는 순간 의미는 전혀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침묵을 깨트린 '해리'의 요청으로 세 사람의 리허설은 예술 하나로 이 자리에 있게된 언더독들을 위한 또 다른 무대로 탈바꿈한다. 내가 서있는 지금 이곳이 바로 무대라는 마인드는 설령 지금 이 순간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내일을 위한 약소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연극 <언더스터디>는 최선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아닌, 최소한 끔찍하게 패배하는 것만큼은 결사 반대하는 언더독들의 현실 극복기다. 오늘도 승리대신 패배를, 하지만 침묵 대신 몸짓으로 그들은 퍽퍽한 하루하루를 감내하고 있다. 보이지 않을지 언정, 언더독들의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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