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퍼펙트 월드를 향하여 -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글 입력 2022.01.15 20:5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표1.jpg


 

뉴스 속보에서 한 달 후면 소혹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란 믿기 힘든 소식이 흘러 나온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의 모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셈이다. 자력으로 지구를 탈출하는 기행을 벌이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 나는 남은 한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고득학생 소년 유키와 그를 키우는 가난한 미혼모 시즈카, 청부를 받아 살인까지 저지른 깡패 메지카라, 그리고 거식증에 걸린 가수 미치코까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동안 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한 발은 자신이 사는 삶에 또 다른 발은 멸망에 딛고 선 사람들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인류를 멸망시켜주세요’하고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유키 뿐이지만, 다른 주인공들 역시 한 번 쯤 마음 한 켠에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살던 곳을 ‘샹그릴라’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샹그릴라는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가상의 이상향이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는 ‘샹그릴라’, ‘퍼펙트 월드’, ‘엘도라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제목으로 한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을 제외한 세 단어는 모두 이상향을 가리킨다. 이야기들은 모두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쫓는데, 느슨한 기준으로 보아도 제목과 어울리는 삶은 아니다. 그런데 지구 멸망을 한 달 앞둔 그 시점에서 그들의 삶은 어떻게 해서 유토피아로 상징 될 수 있는 걸까?

 

 

우울한 미래를 전부 리셋해준다면 소혹성이든 뭐든 떨어지면 좋겠다. 출구 없는 미래를 통째로 쾅 하고 단번에 전부 날려주면 좋겠다. 그렇게 이따금 울화통이 터지는 건 나뿐일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빛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을까?

 

_46쪽, '샹그릴라'

 

 

멸망과 관해 생각하자면 스피노자가, 혹은 루터가 말했다던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멋진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미래를 향해 가치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태도는 대단하면서도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태도다.

 

책을 읽으며 나에게 한 달의 시간이 남는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스피노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 미래를 위해서 해 왔던 일들, 이를테면 공부나 저금 등을 그만두고 당장의 한 달을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놀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것이란 것도 안다.

 

멸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것처럼 자극적으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을 보면 절로 마음이 피곤해지지만, 동시에 이 사회에서 멸망이 일어난다면 비슷한 장면을 떠올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고 저래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편리와 즐거움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노동과 희생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은 그 노동에 정당한 보수를 받을테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길이 없어 계속 희생당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평한 한 달짜리 멸망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면, 누구도 몇 푼 돈을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


결국 멸망을 앞두고 제 몫을 챙기기 위해서 살인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까. 그러나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서는 그 사이에서도 희망과 미래를 그린다. 그 모든 것들은 관계로 설명된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에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그들을 유토피아로 이끈다

 

이상향의 중요성은 그것이 실제로 있기 때문도, 닿을 수 없는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고 그러한 상상이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에나는 종종 상상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 상상에 샹그릴라는 없었다. 그러나 멸망 직전의 순간, 그들은 유효기간이 있을 지언정 마지막 날까지의 하루하루 이어지는 희망과 내일로 나아갔고 비로소 샹그릴라를 완성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사실 그런 정형적인 단어로 표현되지는 않는 느슨하지만 분명 묶여 있는 관계다. 그들은 그 지난 날들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을 서로를 향해 비로소 샹그릴라를 완성했다. 그렇기에 '샹그릴라', '퍼펙트 월드', '엘도라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두 전에 없던 이상향이 되는 게 아닐까.

 

 

"당연히 무섭지.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보다 나는 내가 훨씬 좋아졌어. 예전 세상은 평화로웠지만 언제나 어렴풋이 죽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태연하게 내뱉는 말의 무게에 가슴이 막혔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앞으로 열흘밖에 없어. 슬프고, 무섭고, 최악이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괜찮게 변한 것 같아. 세상이 그대로였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모른 채로 죽었겠지."

 

_286쪽, '엘도라도'

 

 

 

[김민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