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과거를 어루만지고 오늘을 아름답게 응시할 수 있는 장소,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

글 입력 2022.01.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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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어루만지고 오늘을 아름답게 응시할 수 있는 장소 

: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

 

 

길리앗, 공간에서 장소로


 

장소(place)는 시간과 가치를 포함한 공간(space)을 일컫는다. 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저서 『공간과 장소』를 통해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빈 여백과 같은 곳이 ‘공간’이라면, 인간의 시간과 그에 따른 의미가 부여된 곳이 ‘장소’라고 밝혔다. 누군가에게 뉴욕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대도시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이 빌딩 사이를 웹 스윙 할 것 같은 도시인 것처럼, 인간의 시간과 경험이 만드는 곳이 바로 장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은 130여 분의 러닝 타임을 통해 이야기 속 미국 위스콘신주의 작은 마을 ‘길리앗’을 장소로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퍼씨를 따라 관객들이 도착한 곳은 “별 볼 일 없는 마을” 길리앗과 이 마을에 하나뿐인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 목재가 만드는 고즈넉한 가게의 풍경과 그 뒤의 계단과 기둥으로 표현되는 마을의 모습은 따로 떼어놓기 힘들 만큼 닮아 있다.

 

그리고 무대 맨 뒤의 풍경은 산등성이 같기도 하고 낡아서 마모된 판자 같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주인공 '퍼씨'에게도 낯선 마을 길리앗, 그리고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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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생활을 마친 퍼씨는 길리앗에 도착해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에서 일하면서 식당의 주인 '한나'와 그의 조카와 결혼한 '셸비' 등 마을 주민들과 만난다. 이처럼 전원의 삶을 다루지만 이 작품은 '<삼시세끼> 길리앗 편'은 아니다.

 

이를테면 <스핏파이어 그릴>은 주인공이 마냥 아름답고 따뜻한 시골 마을에 뿌리내리는 전원 로망스가 아닌 것이다. 달갑지 않은 시선과 낯선 공간 속에서 퍼씨는 팔리지 않는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을 경품으로 내놓는 콘테스트를 벌이면서 이 마을과 주민들이 가진 아픔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이를 끌고 가는 것은 컨트리 스타일을 담은 정겨운 음악이다. 키보드, 아코디언 사운드, 기타, 만돌린, 첼로 등의 악기가 만드는 음악은 길리앗이 가진 폐쇄적이면서도 소박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 주고 들려준다. 미국 농촌 서민층의 삶을 표현하는 컨트리 음악이 <스핏파이어 그릴>의 정서를 만드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더군다나 작은 알림 종, 각종 연장, 체인 등 지극히 일상적인 물건들로 음악 위에 다채로운 소리를 얹기까지 하는데, 덕분에 관객들은 짧은 시간 안에 길리앗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스핏파이어 그릴의 역설


 

그렇다면 길리앗은 어떤 곳인가. 무대의 모습처럼 길리앗의 역사는 스핏파이어 그릴과 그 주인인 한나의 가정사가 대표한다. 길리앗은 가부장제 산업 사회가 무너진 미국의 작은 마을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한나의 조카 ‘케일럽’은 폐쇄된 채석장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길리앗이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는 “건장한 일꾼들과 선량한 여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트남전 작전 중 실종된 한나의 아들 ‘일라이’라는 옛 영웅의 이름이 이 마을의 사라진 희망처럼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이 다루는 것은 과거의 가치가 무너진 곳에서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실존이다. 식당의 이름이자 작품의 제목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핏파이어(spitfire)’는 ‘불을 뿜는 것’이라는 뜻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투기 이름으로, 한나의 남편이 붙인 것이었다.

 

폭력에 대한 예찬이 담긴 이름인데,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모두 그 폭력성에서 비롯한다. 한나와 일라이의 비극도, 퍼씨가 복역하게 된 것, 셸비가 남편의 그늘에서 살게 된 것 모두 갖은 폭력과 사회의 지배 구조가 만든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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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속 서사가 획기적이진 않을지언정, 고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동명의 원작 영화가 1990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스핏파이어 그릴> 속 미국의 역사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나, 셸비, 퍼씨라는 서로 다른 세대 개인들의 역사에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성 역할을 강제하고 폭력을 용인했던 사회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의 한나, 셸비, 퍼씨의 삶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현존하는 아픔이다.


이때 <스핏파이어 그릴>은 치유의 방법을 친구들 간의 연대에서 찾는다. 퍼씨가 길리앗에 오고 한나, 셸비와 친구가 되면서 길리앗이라는 공동체는 과거를 해소하고 친구들의 연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장소로 변해 간다.

 

과거를 예찬하는 케일럽은 마을이 과거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지만, 퍼씨는 자신과 친구들의 아픔을 꺼내게 하며 과거와는 다른 오늘과 내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그렇게 달그림자 속에서 쓸쓸히 노래 부르던 퍼씨는 길리앗에 뿌리내리며 한나, 셸비, 조 등의 인물에게 길리앗을 이전과는 다른 장소로 인식하게 한다.

 

 

 

삶의 한 자락이 있는 장소


 

겉으로 보면 바뀐 것은 크지 않다. 채석장이 다시 문을 연 것도, 스핏파이어 그릴이 비싼 값에 팔린 것도 아니다.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은 더욱 아니다. 결말 이후로도 케일럽은 채석장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을 수 있고, 퍼씨가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조와 사랑을 완성했을지도 미지수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엔딩이 말 그대로 동화이듯, 삶은 대체로 번잡한 갈등의 연속이니 말이다.


하지만 길리앗이란 장소는 분명히 재의미화되었다. 아픔과 후회가 있었던 길리앗은 ‘천국의 빛깔’로 물든 아름다운 곳, 사랑하는 가족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곳,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기쁜 일에 웃고 슬픈 일에 울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작품은 행복한 퍼씨, 한나, 셸비의 오늘에서 이야기를 정지시키며 이 ‘현재’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박용호 프로듀서의 말처럼,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마냥 “지나치게 동화적이지는 않은” <스핏파이어 그릴>이 주는 감동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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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을 특출나게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예상 가능한 개인사로 굴러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배우 조정은이 퍼씨로 분하고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의 개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2007년 한국 라이선스 초연에서 2021~2022년 재연까지 10여 년 이상의 시간 동안 국내 소극장에 이와 같은 뮤지컬이 얼마만큼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결코 익숙해서 고루한 축에는 속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세대 세 여성의 수난사를 자극적이지 않게 그려내면서, 연대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주는 감동에 방점을 찍는 뮤지컬, 여전히 드물지 않던가.

 

후회와 회피의 길리앗은 연대와 희망의 장소로, 그리고 무대라는 공간은 현실적이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장소로. <스핏파이어 그릴>이 만드는 '장소'는 이런 점에서 특별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물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무대예술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같은 곳을 전혀 다른 장소로 만드는 것, 무의미한 곳을 삶의 시간과 가치가 담긴 장소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관객에게는 '천국의 빛깔'이 아닐까.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


 

일시 : 2021년 12월 08일(수) ~ 2022년 02월 27일(일)


시간

평일 8시

주말 및 공휴일 2시, 6시 

(월 공연 없음)


장소 :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


티켓가격

R석 66,000원, S석 44,000원

 

관람시간 : 130분 (인터미션 15분 포함)

 관람등급 : 8세 이상 관람가

 

제작 : ㈜엠피앤컴퍼니

주관 : 달 컴퍼니

 

 


 

 

*작곡/대본 : JAMES VALCQ(제임스 발크)

*가사/대본 : FRED ALLEY(프레드 앨리)

*원작(영화)  : LEE DAVID ZLOTOFF (리 데이비드 즐로토프)


*연출_허연정, 음악감독_이나영

안무감독_박은영, 번역/우리말가사_이희준


*출연 : 퍼씨 / 유주혜, 이예은, 나하나

한나 / 임선애, 유보영

셸비 / 방진의, 정명은

조 / 이주순, 최재웅

케일럽 / 최수형, 임강성

에피 / 이일진, 민채원

방문객 / 허채윤, 성우진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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