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폴더폰 무시하지 마라

나의 아날로그 생존기 1편.
글 입력 2022.01.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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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리즈 시절'외모, 인기, 실력 따위가 절정에 올라 가장 좋은 시기은 언제였는가? 어떤 이는 지금이라고 답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고3 때 나의 외모나 인기가 절정이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잠재력과 의지만큼은 단연코 고3 때 이미 절정이었다.

 

나는 야간자율학습 2차시가 끝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운동장을 달렸던 나를, 하루 5시간을 자면서도 일과시간 단 1분의 졸음도 허용하지 않았던 나를, 더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요일 낮에 잠긴 철문을 넘어 자습실 문을 따던 나를 추억한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종종 '라떼 인간'이 되곤 한다. 그리고 이 추억팔이의 큰 축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폴더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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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인터넷 버튼을 누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과금되어

부모님께 등짝을 맞곤 했던 바로 그 폴더폰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스마트폰 중독을 타개하기 위해 외갓집에 굴러다니던 2G 폴더폰을 공수해와 1년 동안 사용했다. 조약돌 자판을 꾹꾹 눌러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애니콜 젠더를 꽂은 유선 이어폰으로 SD 카드의 음악 파일을 들었다. 하얀색 애니콜 폴더폰은 내 수험생활 성공의 일등공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3 향수를 느낄 때마다 항상 이 폴더폰을 떠올렸다.

 

그러던 지난 2021년 10월 말, 전공 과제들에 파묻힌 채 늘어나는 인스타그램 DM과 밀려가는 카카오톡 메시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아이폰을 집어던졌다. 갑자기 모든 것에 환멸이 났다. 국어 영어 수학 사탐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내가 그리워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중고상점에서 내가 쓰던 폴더폰과 꼭 같은 기종의 폴더폰을 주문하게 되었다.

 

 

 

폴더폰 무시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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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폰 구매 이후 처음 찍은 사진. 미역국이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나의 아날로그 생존기는 그 이후로 11월 말까지 약 1달 지속되었다. 아이폰에 굴복한지 그로부터 또 1달 가량이 지난 22년 1월 현재 간단한 소회를 밝히자면, 고등학생 때만큼은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된 내가 보기에 생각보다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다시 말해 21세기 한국 사회는 2G 유저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폴더폰과 함께하는 30일간 느낀 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낯선 곳에 찾아가기가 두려워졌다. 늑장을 부리다 늦게 출발하는 일이 잦은 필자는 집을 나설 때마다 각 교통수단별 배차 시간을 실시간으로 비교, 목적지를 향한 최적의 조합을 빠르게 계산하곤 한다. 이에 큰 도움을 주었던 요소가 바로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이었다. 스마트폰이 사라지니 낯선 곳을 찾아가는 최적 코스를 알 수 없게 되어 약속 전날 밤에 노선과 경로를 모두 외워야만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일에 길이라도 잃으면 몇 시간이고 식은땀을 흘리며 대로변을 배회해야 했다.

 

둘째, 우리는 생각보다 인터넷을 통한 연락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나는 수많은 단톡에 속해 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과 서로 인스타그램 맞팔을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나를 단톡에서, 혹은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폴더폰 유저인 내게 한사코 카톡과 인스타그램 DM을 보낸다.아무리 내가 'DM 안봅니다', '카톡 안봅니다'를 알려 줘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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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폰으로 찍은 두 번째 사진. 11월 당시 필자의 심정을 대변한다.

 

 

필자는 바득바득 인터넷 메시지로 연락을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원인을 분석해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2G 차원의 문자와 전화보다는 3G 차원의 카톡과 DM이 더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톡과 DM은 전화번호를 몰라도 보낼 수 있고, 상대가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는 이유 혹은 상대가 스토리로 자신의 일상을 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찔러 보듯' 가볍게 전송할 수 있다. 심지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 나는 이 참을 수 없는 연락의 가벼움에 잠시 환멸에 잠겨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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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폰으로 찍은 발레 커튼콜.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폴더폰만이 줄 수 있는 '강제된 고요함'이 필요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당시의 나만큼 폴더폰의 고요함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예의를 차려야 하는 관계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폴더폰을 쓰는 30일 동안만큼은 다시 나 홀로 존재하는 세상에 돌아간 기분이었다. 시간이 남으면 인스타그램을 켜는 대신 e북 리더기를 켜서 책을 읽었다. SMS 50자 제한에 맞추기 위해 꼭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전하는 법도 연습했다. 그리고 폴더폰으로 찍은 사진들은 SNS 없이도 나름의 감성으로 나의 일상을 기록해 주었다. 항상 급변하는 소식들에만 눈길을 주었던 내가 변하지 않는 활자와 풍경들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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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폰으로 찍은 첫 셀카.

 

 

요컨대 나는 "할 수 없기에 할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켤 수 없기에 미련없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기에 고개를 들고 풍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 어찌보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셈이었지만 사실 인터넷과의 단절이 내게 족쇄는 아니었던 듯하다. 다음 학기 휴학을 앞둔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하얀 폴더폰을 꺼내 들 준비를 하고 있다. 5G의 시대라곤 하지만 2G가 선사하는 '느림의 미학'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끝으로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 5G 유저들에게 외친다. "폴더폰 무시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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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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