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님'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 [문화 전반]

두루 높이는 우리네 호칭 문화
글 입력 2022.01.0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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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수험생들의 결과가 하나둘 결정되고 있을 테다. 고작 몇 년 먼저 대학에 다녔다고 마치 훈시와 같은 글을 남기려니 필자는 몹시 겸연쩍다. 학문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취업 양성소가 요즘의 대학을 일컫는 데 제격이겠다는 예상이 엇나가지 않았으므로 오늘의 글은 비단 교문을 나서는 새내기에게만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친근한 호칭과 순수한 동기로 점철된 사담이 오래전 기억임을 깨닫는다. 과연 존칭을 주고받는 순간에 필자는 진정 존중받았는지도 의문이면서.


 

간밤에 내게 주신 은밀한 사랑의 언약 가슴에

품고서 잠 못 이룬 채 날이 새누나

세상에 그 누구도 나는 부럽지 않구나 간절한

나의 맘 이렇게 쉽게 받아주시니

울고 있어도 웃고 있어도 매한가지 어여쁘구나

꽃다운 나의 청춘에 님과 함께 단 둘이서만

그저 오순도순 살고 싶어라

 

- 김동률 2집 「희망(希望)」 <님>

 

 

입에 배어 굳은 말버릇을 돌이켜 보았다. 낯익다는 평가가 도리어 어색할 만큼 오래도록 함께 한 입버릇이 노랫말이 되어 울려 퍼지면 자못 생경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님은 오로지 선생님밖에 없다고 여기던 어릴 적 필자에게 가사는 다의어와 동음이의어를 알게 한 최초이자 가장 알맞은 교재였다. 김추자는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줬지만 멀어져 버린 님을 그렸고 남진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했다. 이때의 ‘님’은 사모하는 이를 뜻하는 ‘임’을 이른다.

 

혹자에게는 직위나 신분에 맞춰 상대를 두루 높이기 위한 용례가 더욱 익숙할 것이다. 남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결혼한 시동생 또는 손아래 시누이의 남편을 부르는 표현의 ‘서방님’,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높여 부르는 표현의 ‘도련님’처럼 가족관계에서 요구되는 언어문화가 있다. ‘사장님’, ‘대리님’처럼 직급에 따른 표현도 있다. 자신보다 연장자인 손윗사람에게는 자연스레 존칭을 쓰다가도 어리지만 지위가 높은 이에게는 멈칫거릴 수 있다. 특히 연공서열에서 성과 중심으로 승진 체계의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호칭에 대한 고민이 쌓이기도 한다.

 

과거 세상에 사는 님은 오직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필자는 처음 마주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반사적으로 선생님이라 부르고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아직 명확한 정리가 되지 않아 난처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한다. 시작은 관공서였다. 나도, 옆 좌석의 할아버지도, 번호표를 뽑는 아주머니도 모두 선생님으로 불리었다. 존경과 사제 간의 정이 무색해질 만큼 낯설어진 ‘선생님’이다. 얼굴 붉힐 일 없도록 서로를 무한히 높이려 드는 작금의 세태가 때론 두터운 관계를 막는 두꺼운 벽이 된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좋다. 배려와 존엄을 실현하자는 의도는 낱말 하나로 대체될 수 없을 정도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익숙해지면 처음의 동기는 무뎌지더라도 상대의 이름에 접미사 ‘님’을 붙여 부르기를 반복하면 절대 그 누구의 인격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혹시 실수했을까 걱정하며 자기 검열을 시행하기도 한다. 한편 기저에는 타인의 나를 향한 시선이 있다. 하대함으로써 상대를 무시한다며 사람 됨됨이를 향한 손가락질보다도 사회가 구축한 당위를 지키지 않는 비상식적인 사람이라는 지적에 더 취약하지 않은가. 결국 수평적 관계를 향한 님은 이기를 위한 이타를 방증한다.

 

담백해야 한다. 연인 사이에서도 사랑의 크기를 논하듯 사회에서 강자와 약자를 따지는 건 예사이다. 나이를 묻고 빠른년생임을 밝히고 속된 말로 족보를 정리하지 않는가. 인간사는 이삿짐처럼 쉬이 정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첫 만남에 정해진 호칭은 관계를 명시한다.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권력을 인정할 때 존칭과 경칭을 아우르는 무게는 덜 할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냐는 태종 이방원의 말마따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호칭은 산란한 감정까지 정돈해줄 수 없다. 진심으로 공경할 수 없으나 마땅히 존대해야 하는 숱한 경우에서 어쩌면 ‘님’을 붙이는 문화는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각한다. ‘님’ 앞에는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을. 시끄러운 파티장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정보에 집중하는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는 사람의 이름에도 적용된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태도는 온통 감각이 자신 그 대상 자체를 감싸고 있음을 명징한다. 아들딸의 부모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가려진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이름을 통해 찾아온다. 따지고 보면 자의는 아니었다. 태어나 누군가의 작명으로 칭해지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믿으며 살아간다. 나를 의미하는 소리가 나를 있는 그대로 나타낼 수 있다고.

   

*

 

존중의 이면은 다양성이다. 뿌리이기도 한 고유의 이름을 두고 개명을 택한 자유의지는 더 이상 미명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필명이나 예명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도 있으며 타국에서 수학하면서 본명이 아닌 그 나라 식의 별호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천부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천부인권을 실천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님’으로 하여금 타인을 의식적으로나마 존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많고 많은 이름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었을까. 상대의 존칭이 기계적인 습관일지언정 필자가 더는 타인의 의중을 의심하지 않고 대세를 따르기로 한 이유는 벽에 문을 내기 위해서다. 님들에 대한, 사람 본연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을 표해보려 한다.

 

 

 

윤하정.jpg

 

 

[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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