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랑이 연마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최지은 저 「이런 얘기 하지 말까?」
글 입력 2022.01.0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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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덕질’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케이팝 마니아였던 나는 음악을 통해 느끼는 희로애락으로 일상을 채웠고 문화 산업의 다채로운 세계를 호기롭게 누비며 취향을 구성했다. 아주 오랫동안 ‘덕질’과 일상은 서로가 서로를 이루는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다. 일상으로부터 파생된 ‘덕질’이 또다시 다음 일상을 채웠다. 그러나 먼 거리에 있는 존재가 대부분 그러하듯, 열정을 쏟아부은 세계가 누군가의 소망으로 점철된 가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순간 재빠르고 날카롭게 목전에 다가와 현실을 일깨웠다. 사회면을 침범한 연예계 이야기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침묵과 방조 속에서 유지되어 온 결과물이었다.

 

환상이 깨어진 후에도 허무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그럼에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시야 바깥에 있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올바르게 좋아하는 법을 찾아 나갔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삶의 전반에 대한 것으로 유의미하게 확장되었다. 변화한 지평의 새로운 모습 또한 재미있었다. 감시하는 사람들과 나아지는 콘텐츠의 상호작용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웠고, 함께 실망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있어 갑자기 마주한 변화에도 서서히 적응할 수 있었다. 불편한 것도, 그래서 더는 좋아할 수 없게 된 것도 많아졌지만 깨닫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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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 하지 말까?》의 저자 최지은 작가는 그 격동을 용기 내어 맞닥뜨리며 성실하게 실망하고 분노해 온 기록자이다. 10여 년간 대중문화 기자로 활동하며 우리에게 친숙한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전달한 저자는 첫 저서 《괜찮지 않습니다》로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통해 딩크 여성의 삶을 선택한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이런 얘기 하지 말까?》는 비교적 주제가 명확한 전작들보다 작가 개인의 삶을 내밀하게 조명하는 데 집중한 산문집이다.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역설적으로 덧붙이는 SNS상 유행어를 인용한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으나 저자의 삶에 있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들을 소개하며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가 한 사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덕질’로 열정을 불태웠던 과거와 대중문화 기자로 활동하면서 마주한 현실, 2015년 한국 사회에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와 ‘버닝썬 게이트’로 대표되는 연예계 일련의 사건을 목격한 이후 달라진 시각과 일상을 기록한 이 책은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그리하여 독자의 삶 구석구석에 숨은 공감대를 건드리며 보편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대중문화와 함께 호흡하며 삶을 채워 온 저자는 ‘덕질’과 일상의 혼란스러운 중첩을 고백하듯 서술하며, 대중문화의 불편한 진실을 매일 같이 목격하면서도 그에 대해 늘 할 말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저자가 자칫 간과하기 쉬운 콘텐츠의 허점을 지적하고 변화의 낌새를 포착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예리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열정적인 팬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정할 수 없이 즐거웠고 뜨거웠던 ‘진지한 낭비’의 순간을 솔직하게 회고하면서도 ‘더는 어떤 남자의 팬도 되지 않기로(56p)’ 다짐하기까지 느껴야 했던 겹겹의 실망감과 책임감에 대해 털어놓는다. 15년 전 대중문화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당시 ‘덕질’에 관해 기고한 글을 인용하고 그것을 되돌아보며 달라진 생각을 정리한 대목은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인 형태로 인식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푹 빠져 이성을 잃는 감각(42p)’을 사랑했던 저자는 ‘너무 많은 엔딩이 사회면(52p)’이라는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좋아할지라도 자신을 잃지 않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태 가려지기 일쑤였으나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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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제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를 직시하는 감시자이고 잘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삶을 가시화하는 전달자이다. 수많은 사랑의 경험이 오히려 연마한 날카로운 시선 하에서는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가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이 아니다. 젊은 여성 연예인이 호소하는 고통은 한국 이십 대 여성이 처한 현실과 궤를 같이하고,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낳은 연예인이 받는 악성 댓글은 결혼 후 자녀를 낳지 않는 여성들이 받는 무의미한 훈계와 비슷해 보인다. 혹자는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들지 말자’고 하지만, 우리의 삶에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곧 일상 속의 부당함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저자는 포기한 웃음만큼 미처 보지 못했던 슬픔을 포괄하며 건강한 사회를 향한 열정에 불을 붙인다. 이전보다 신중하게 뻗어지는 시선 때문에 글을 쓸 때 더 많은 고민과 염려를 더하게 된 저자는 가끔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그는 ‘그냥 이런 사람이 되었다(72p).’ 사회가 바뀌었고, 삶이 달라졌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더는 뒷걸음치지 않는다.

 

예민한 시선은 모른체하고 싶은 세상의 어두운 면까지 들춰내지만, 동시에 분명히 이뤄지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 역시 눈치채게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강연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내면서 밝지만은 않은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소식과 함께 위로를 전한다. 페미니즘 동아리에서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맞서 싸우는 어린 학생들, 자신의 글에서 분노 너머 슬픔을 읽어낸 중학생, 페미니즘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는 학생들에 자부심을 느끼는 선생님 등 변화를 함께 느끼고 이끌어나가는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저자의 글이 일으킨 파동이 퍼져나가 다른 이의 파동과 맞부딪치고 세상에 울림을 전하는 과정은 약한 개인이라도 함께 무언가를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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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감정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었다. 부채감이 아닌 연대감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던 어느 편집자의 말, 여성혐오에 저항하기 위해 시위를 하러 나온 여성들의 용기, 지렁이를 아스팔트 바닥에서 화단으로 옮겨주기 위해 함께 대작전을 펼쳤던 어린아이의 다정하고도 강한 마음을 이 책은 조명한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애틋하게 묶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끈(210p)’이 구체적인 경험으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단은 냉혹한 겨울에도 따뜻한 불을 피우고 있는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변화에는 부담과 책임이 따르고 그것은 매번 즐겁지만은 않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내 그것을 짊어질 용기를 품게 하는 경험이 있다. 그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거듭되는 좌절 속에서도 이전보다 희망차게 전진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경험과 믿음이 차곡차곡 쌓인 단단한 기록물이다.

   

 
산뜻하고 한가로운 말로 ‘이런 것’과 선 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서로의 고통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여성들은 그럴 수 없다.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삶 어느 부분은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닮았다는 걸 알기에 쉽게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5p)
 

 

부제에서 언급된 ‘열정적 덕질’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친근감을 품고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삶이 얽히고설킨 기록을 보며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뜻밖의 용기를 얻기도 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와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어느 교점에서는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에세이가 주는 큰 기쁨이다. 문장들에 떠오르는 얼굴들에 나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결코 같지 않아 완전히 포개지지 않지만, 그 사이를 메우는 생각과 감정이 홀로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각자의 일상을 살다가 함께 열광하고 분노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마주한 그 파도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작은 물결이 모이고 또 모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기에, 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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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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