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를 업(業)으로, 예술은 취미로 (11)

개조식으로 쓰다 보면...
글 입력 2022.01.0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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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업(業)으로, 예술은 취미로 (11)

개조식으로 쓰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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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문과인 나는 글과 꽤 오래 친구처럼 함께 지냈다. 최근에는 오랜 친구인 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원인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재밌고 위트 있는 글을 쓰는 데에는 재능이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나게 쓰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어쩐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1년이 넘는 시간을 문화예술 기관에 몸 담으면서는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형식과 내용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써오지 않았던 형식의 '문서'라는 더 딱딱한 이름으로 불리는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글도 자연스레 경직되는 것 같다. 글에 담긴 내용을 찬찬히 보다 보면 과연 내가 쓴 글이 맞는가 하며 낯섦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은 내 글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고찰해볼 겸 기관에서 쓰는 문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파고 들어가 보았다.

 

 

 

개조식으로 글쓰기 개조하기


 

사람처럼 글에도 패턴이 있다. 오랜만에 아트인사이트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내가 쓰는 글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크게는 두 개에서 세 개 정도의 큰 선을 그어 큰 주제를 나누고, 그 주제 안에서도 5~6줄 정도의 문단을 나누어 글을 쓴다. 문단에도 보통 5개 정도의 문장이 자리하는 '서술식'으로 작성하는 데 익숙하기에 그렇게 써왔던 것 같다.

 

우리의 공공기관에서도 정해진 형식이 있다. 기관에서는 보통 '개조식' 형태의 문서를 작성한다. 개조식은 써야 할 주제에 대해 번호 등을 붙여 요점만 간단하게 작성하는 방식으로 문장이나 문단으로 이루어진 '글'과는 성격이 다르다. 마침표로 끝나지도 않고 보통은 명사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글꼴부터 앞머리, 자간까지 정해져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예컨대 회의를 주최하기 위한 기획서를 쓴다고 해보자. 개조식 글 앞머리의 도형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불필요한 내용은 모두 잘라내고 순전히 뼈대만 남은 글을 쓴다. 내용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표나 차트가 있다면 더욱 좋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쓸 때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고 중요한 요점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개조식의 머리말 하나를 차지할 내용은 아니지만 내용 상 빠트리면 안 되는 주요 사항이 있다면, 당구장 표시(※)를 활용하여 넘어가는 등 가끔은 유연함을 발휘할 필요도 있다.

 

한번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정기 회의를 개최한다고 상상해보자. 회의에 꼭 필요한 요소는 일정, 장소, 참석자, 회의 내용, 필요하다면 추후 일정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선택하여 하나씩 간단하게 적는 것으로 개조식은 시작된다. 사실 글을 쓴다기 보다는 개조식의 형식에 맞춰 글자들이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 이 회의에 대한 계획 문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하고 개조식을 간단하게 맛보자.

 

 

제목 :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정기 회의 추진


○ 주제 : 문화를 업으로, 예술을 취미로 11회 차 주제 선정

○ 일정 : 2022년 1월 1일 13시 ~ 15시

○ 장소 : 온라인 Zoom 회의

 ※ 코로나 확산세와 강화된 거리두기 수칙을 고려하여 비대면 회의로 진행

○ 목적 : 글 주제 선정 및 아이디어 정리

○ 회의 안건

 - 11번째 글 소스 취합 및 주제 선정

 - 2022년 문화예술 현황 및 이슈 논의

 - 추후 글 방향성 토론

○ 예산 : #,###원

○ 추후 일정 : 월 1회의 정기 회의 개최 예정

 

 

개조식으로 쓰는 글 외에도 메일부터 시작해서 원고 청탁서, 안내문, 지시서 등 개조식을 활용하지 않은 형식의 글도 작성할 때도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의 글을 쓰다 보면 개조식으로 작성한 글을 다시 서술형으로 옮겨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어떤 일의 계획서와 실제로 진행할 때 필요한 문서는 형식부터 내용까지 달라지기도 한다. 문서의 목적과 독자를 고려한 여러 형식의 문서는 꼭 필요하지만 가끔 일이 바쁠 땐 손가락과 오랜 기간 수련해 온 타자연습 속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개조식 글이나 기관에 익숙한 문서를 쓰다가 다른 성격의 글을 쓰다 보면 순간 그 문서의 딱딱함이 짙게 묻어나기도 한다. 홍보문구나 심지어는 문자를 보낼 때에도 자연스럽게 개조식으로 작성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안내 메일이나 조금 더 편한 글을 작성할 때에는 친절하고 사람 냄새나는 글을 쓰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문서에는 정보 전달의 목적도 있지만 '나'와 함께하는 일에 대한 편안함이나 친절함도 함께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조식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글쓰기와 문서 작성을 구분하기


 

이렇게 개조식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글들이 자아의 혼란을 겪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든 익숙해지면 정해진 방식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개조식 '문서 작성'에 익숙해져 버린 내 글들은 어느새 이전의 '글쓰기' 방식을 잊어버린 듯하다.

 

불과 1년 전에 썼던 글들에는 생동감이 있었는데 지금의 글들은 분명 다르다. 원인이 개조식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 저 딱딱한 개조식에 뭔가가 있다. 이 생각이 지속되다 보면 심지어 개조식도 어려워질 게 분명하여 하루빨리 시급한 대처가 필요하다.

 

내가 내린 솔루션은 2022년의 목표인 '성숙한 글짓기'와 함께한다. 성숙한 글짓기가 도대체 뭘까, 늘 고민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써야 하는 글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의식적으로 아트인사이트의 글쓰기와 개조식 문서 작성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글쓰기와 문서 작성은 다른 영역에 두고 의식적으로 쓰기 위한 노력을 해보려 한다.

 

정보보다는 생각을 적는 것은 '글쓰기'에, 생각보다는 정보와 사실을 적는 것은 '문서 작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 과연 맞는 것일지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지는 이후의 글들에서 확인하도록 하자.



[손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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