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

글 입력 2021.12.2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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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에 난 열렬히 사랑에 빠졌다. 혼자. 내가 사랑한 여자아이의 이름을 세영이라 하자.

 

세영은 검은 긴 생머리가 가슴께로 내려왔고 키는 나보다 한 뼘 반 정도 작았다. 그해에 난 전학생이었고 새로 온 학교가 익숙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사귀고 적당한 무리와 어울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무료했다. 그 학교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과목별 선생님을 따라 합반에서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내 반은 수학 시간이면 학생 절반 정도가 옆 반으로 넘어가 같이 수업을 들었다. 세영은 옆 반에 있었다. 그녀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였고 반도 달라 쉽게 친해질 일이 없었다.

 

복작거리는 교실에서 처음 세영을 본 나는 그녀가 무척 작고 귀엽다고 생각했고, 초점이 한 사람에게만 맞춰진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그녀가 “지구보다 큰 질량으로” 날 끌어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초면이고, 앞으로도 마주칠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세영과 인사를 나누고 웃고 떠들고 자리에 돌아와 고뇌에 잠겼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난 저 애를 사랑해. 확신만 있고 나머지는 원인불명인 상태에서 나는 이 감정이 전에 느낀 여느 호감과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건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이야. 누가 옆에서 물어보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내 안에서 순식간에 발생한 사랑의 감정이야.

 

교복을 입은 내가 했던 마지막으로 했던 이 사랑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걸 감수하기에는 내게 너무 소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수련회 날 밤에 친구들이 이불 위에 앉아 어느 반의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시시콜콜함이 아니었고, 해마다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간질간질하고 싱거운 호감의 연장 선상에 세영을 놓을 수 없었다. 그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건 내가 어느 집단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나, 어떤 애를 좋아하는 나로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종류의 호감과 달랐다.

 

당시에 누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은 내가 이성과 연애하길 원하냐는 질문과 같았고 사회적으로 정해진 성별 각본에 따라 여자라면 당연히 느낄 감정을 너도 느끼냐는 확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대화 이면에 흐르는 성별 각본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게 호감의 칠 할은 만들어진 것이었다. 새 반에 들어간 나는 남자아이들을 하나씩 훑어본다. 외모, 체격, 성격, 학급 내 서열, 힘, 다른 여자애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 이런 것들이 판단 요소가 된다. 소거법을 거쳐 한 남자아이를 골라낸다. 인위적인 계산이지만 재미도 있고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이것이 에로스적 감정이 만들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규칙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사랑.

 

세영이 내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사랑이 자연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폭죽 터지듯이 펑! 물론 그게 전부였다. 같은 반도 아닌 데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라는 거리는 멀었다. 세영과 나는 오며 가며 인사했고 쉬는 시간에 종종 다른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았다. 오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수학 시간뿐이었다. 나는 세영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수업 시간 내내 턱을 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뺨은 희고 입술은 작았다. 내 시선이 그녀의 동그란 코끝을 따라 목선으로 내려가다 귓불까지 올라갔을 즈음이면 세영이 샤프 끝으로 긴 머리를 귀에 꽂아 넘겼다.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네.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고…수학 시간이 끝나면 우울해졌다.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성큼성큼 세영의 앞으로 가 첫눈에 너를 사랑하게 됐으니 연인이 하는 온갖 짓을 하나부터 백까지 전부 너와 하고 싶다고 고백이라도 해야 할까? 하지만 세영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교복 바지를 레깅스만큼 줄인 남자친구는 멀대같이 키가 크고 여드름이 울긋불긋 나 있었다. 세영과 남자친구는 쉬는 시간에 교실 구석에서 손을 잡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처음으로 아무런 각본 없는 상황에 놓였고, 전혀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상상과 기대를 섞어서 미래지향적인(어쩌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에 부풀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나와 상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온갖 역경과 경우의 수를 상상하면서 그에 대한 생각으로 푹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해에 나는 아무 상상도 하지 않았다. 세영을 두고 하는 어떤 상상도 의심스럽기만 했다. 내 상상이 그 애의 본질을 흐리는 것 같았다. 세영의 생각을 많이 했지만 그건 그 애가 보고 싶어서였지 다른 환상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세영의 생각을 하지 않을 때면 난 인생이 지루하고 학교는 무의미하다는 환멸에 그대로 뻗어버리고 싶었다.

 

날이 추워질 즈음 남자아이들은 각반에서 누가 가장 예쁜가를 두고 순위를 매겼다. 난 그 애들의 관심 밖이었고 세영도 순위에 오르지 않았다. 세영은 내게서 체육복을 빌려 갔고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주었다. 난 방문 앞에 체육복을 걸어두었다가 며칠 뒤엔 침대 옆에 체육복을 두고 잤다. 섬유유연제의 향이 은은하게 코에 맴돌았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보이는 세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게 어떤 암시가 될 수 있을까 혼자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겨울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난 연애가 부담스럽고 피로한 지친 성인이 되었다.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인생의 제약은 다 무시할 수 있던 사춘기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젠 내 정체성을 불문하고 연애와 그에 수반하는 모든 행위를 수행하는 것 자체가 피로하다. 만나고, 탐색하고, 나와 맞는 점과 맞지 않는 점을 알고, 연락하고, 감정을 신경 쓰고, 제모하고, 화장하고, 체중계에 올라가고, 머릿속으로 내 지갑 사정을 늘 염두에 두고.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난 그게 부담스럽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나는 연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문득 내가 반쪽으로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 때(높은 확률로 남의 연애를 듣고 왔을 때) 난 데이트 어플을 깔았다가 빠르게 흥미가 식어 다시 삭제한다. 그럴 때면 난 사랑이 하고 싶은 거지 연애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 둘이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진다.

 

그 시절에 나는 사랑에 빠지면 뭔가 성공한 것 같았다. 연애가 성인으로서의 통과 의례 같았고, 거기서 확신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좋았다. 이제 사랑은 불안하다. 이성과 연애할 때 나는 미래로 치닫는 생각을 멈출 수 없고, (결혼하게 될까? 임신하면 어떡하지?) 사실상 엔딩에 이별 아니면 결혼이라는 두 가지 결말밖에 없다는 게 날 지겹고 무섭게 한다. 성별로 인한 힘의 차이가 공고한 사회에서 내가 이성 상대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패배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변기에 앉아 이번 달 생리 예정일이 며칠 지났는지를 짜증스럽게 계산하다 이 모든 게 너무 우습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열다섯 살과 여전히 똑같이 남아 있다. 지금도 보호받고 싶을 때, 불안감을 잠재우고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싶다고 느낄 때, 견고하게 유지될 어떤 미래를 바랄 때 나는 남성을 좋아하고 그렇게 여러 욕망의 찌꺼기를 거쳐 사랑은 만들어진다. 폭죽이 펑! 하고 터지지 않는다면. 아는 언니가 술 먹고 내게 입을 맞춰올 때 미래는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단둘이. 이 사랑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이고 매우 현재적이다. 여기에 굳이 미래가 없어도 좋다고 느끼는 건 내가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이상을 생각하길 두려워하는 나의 용기 없음일 수도 있다. 이보다 더한 걸 원하게 되면 어떡하지? 연애하고, 결혼하고,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함께 늙고 싶어진다면. 자질구레한 다툼과 미래와 안정감 모두를 한 여자와 함께하고 싶어진다면……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건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내가 원하는 걸 위해 지금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 거라는 주저함.

 

십 년 만에 옛날 집에 찾아갔던 날, 나는 책장에서 낡은 붉은색 에이포 노트가 눈에 띄어 꺼내 보았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노트였다. 고양이와 나무와 만화풍으로 그린 몇몇 인물과 이리저리 휘갈긴 추상적인 형체의 그림들이 있다. 혼자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들이 날 기다리며 낙서한 흔적도 있다. 한장 한장 넘겨보며 감회에 젖어 있던 나는 노트 중간에 등장한 그림에 손을 멈췄다. 세영의 옆모습을 그린 초상이었다. 종이가 가득 찰 만큼 크게 그녀의 얼굴이 있었고 무척 공들여 그린 게 분명했다. 난 이걸 수학 시간에 그리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교실 속에서 혼자 앉아 이 순간 그녀가 필요하고 보고싶다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그렸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곡선, 작은 입술과 부풀어 오른 뺨의 모양. 귀 뒤로 넘긴 검은색 긴 머리까지. 내키는 대로 휘갈겼을 뿐 제대로 그린 게 거의 없는 노트에서 그건 가장 사실적이고 선명한 그림이었다. 십 년만에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다시 한 번 그녀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이걸 그릴 때 얼마나 정확하게 그리려고 노력했는지도 떠올랐다. 나는 지우고 덧칠하고, 선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계속 세영을 생각했다. 눈, 코, 입, 웃는 얼굴. 그건 상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이걸 그릴 때 나는 어떤 불안도,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녀가 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에게 말하지 않아도 사랑의 순간을 온전히 남길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나는 손끝으로 천천히 그림을 쓸어내렸다. 이마 선을 따라 귀로, 귓불에서 뺨으로, 뺨에서 목선으로. 내 손이 한 번도 가 닿은 적 없는 선이었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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